'너'라는 세상이 '우리'를 열고 들어왔다. (4)
23주차가 되어서야 비로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마음'에 뱃속의 아기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생겼다. 11월 17일, 23주 1일째 되던 날 썼던 편지(라고 썼지만 고백 일기라고 읽는 게 맞을 거 같다.).
태명을 부르며 말 거는 것조차 낯간지럽고, 초음파 사진을 붙이는 앨범에 "까꿍아, 엄마는 오늘~"같은 말로 시작하는 일기 같은 건 쓴 적도 없어. 난 그게 너무 좀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남들이 하니까 하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해서 난 정말 그런 느낌을 못 견뎌하거든. 그래서 안 했어. 진심으로 우러나오지 않으면 안 하게 돼. 나는 예전부터 그랬고, 그게 나이를 먹으면서 더 심해지고 있어.
아기에게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말들로 시작하는 편지인데, 너가 아기일 때는 어차피 이런 글을 읽을 수도 없으니 그냥 너라는 대상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의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쓸게.
오늘 아침 회사에서 문득 '너는 어떤 아기일까?'하는 생각이 들었어.
너를 '너'라고 거의 처음 인식한 것 같아. 그래서 비로소 '너'라고 (마음속으로) 부를 수 있고 (마음속으로) 말을 걸게 됐기 때문에 이런 걸 쓸 수 있게 되었어. 나는 이제 배가 많이 나와서 (앞으로 더 나오겠지만) 허리며 엉덩이며 여기저기 아파. 밤이 되면 다리가 부어서 쑤시고 갈비뼈도 아파. 임신하면 배는 원래 나오는 거고 그게 그렇게 힘들다고 생각이 들진 않았는데, 내 몸은 힘들어하고 있더라고.
나는 벌써부터 너라는 존재를 위해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있어. 생색을 내려는 게 아니라, 그냥 숙명처럼 '엄마'라는 사람들은 자식을 눈앞에 보기도 전부터, 품고 다니며 희생을 해야 하는 건가봐. 내 피도 너와 나눠 쓰느라 모자르고, 너를 위해서 나는 술도 마시지 못하거든. 아마, 지금 하는 이런 것들은 새발의 피도 안 될 거야. 네가 세상에 태어나면 나는 더 많은 희생들을 해야 할 테니까.
'희생'이라는 말에서 나는 숭고함 같은 것보다 억울함 같은 걸 느끼는데, 그래서 '희생'이라는 말을 웬만해서는 쓰지 않고 실제로 누군가를 위해 아주 작은 '희생'도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살았어. 우리 엄마는 나에게 베풀고, 양보하며 살라고 그렇게 가르치고 보여줬는데도. 아주 조금도 그러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누군가는 나를 인색한 사람으로 생각했을지도 몰라. 그래도 나이를 먹으면서,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좀 더' 마음을 쓰는 일에는 인색하게 굴지 않게 되었어. 물론 그런 걸 희생이라고 할 순 없지만. (내 기준엔 이런 것조차 희생이고 양보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어 아무튼.)
그럼에도 엄마들은 희생이라는 말을 입에 잘 달고 살거든. 우리 엄마, 그러니까 너의 외할머니도. 자신의 희생을 자식들이 알아주길 바라. 엄마는 그냥 그게 다인 거야. 알아주고 인정해주면 자신의 희생따위는 아무렴 괜찮아져. 간단한 문제같지만, 실상은 그걸 알아주길 바라는 그 과정에서 자식들은 생각할 수밖에 없더라고.
'누가 그렇게 하랬어?'
자식들은 종종 이래. 엄마가 정말 듣게 된다면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들을 잘 하거든.
나도 나중에 너에게 내가 너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감수했는지 말하고 네가 알아주길 바라고 그럴까?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선택해서 한 일을 '희생'이라고 얘기하면서 그것에 대한 대가로 네가 내 말을 잘 듣기를, 네가 내 뜻대로 커주기를, 네가 내 원하는 바대로 살아주길 바라게 될까?
엄마는, 내가 엄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엄마였기 때문에,
엄마가 엄마가 아니었던 인생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듯이, 너도 나를 엄마인 나로만 알고 크겠지? 나는 벌써부터 너를 키우며 '나'가 사라질 것을 좀 무서워하고 있어. 내가 정말 엄마가 된다고? 어떻게 엄마가 되지? 아기만 낳고 키우면 그게 엄마인가? 엄마는 그냥 점점 되어가는 걸까? 해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나는 나의 엄마가 떠올라. 엄마도 그랬겠지. 엄마도 처음이었겠지. 엄마도, '나'에서 '엄마'로 어느날 아침 그렇게 되었고 응당 '엄마'라는 사람들이 갖게 된다는 모성애를 불태우며 다른 생각들은 차치하고 그저 나를 키웠겠지.
너를 배에 품고 나서부터 나는 나의 어린 시절과 엄마에 대해 많이 생각해. 우리 엄마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다 해주려고 안간힘을 썼던 사람이야. 물론, 세상에 어떤 부모님이 자식에게 좋은 걸 해주려 노력하지 않겠냐만은, 그와중에도 우리 엄마는 좀더 유별났던 것 같아. 옷도 먹을 것도 가르치는 것도 아이가 누리는 모든 것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게 최선을 다했어. 그런데 왜 어린시절의 내 마음속에는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닌데' 같은 말들이 가득했을까.
지금도 우리 엄마는 '난 정말 너한테만큼은 최고로 다 해줬어.'라고 가끔 말해. 그래서 내가 사춘기 때 홧김에 엄마에게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뭐야?"라고 소리쳤던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고. '어떻게 네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같은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이었겠지. 나는 많은 걸 받고 누리면서도 왜 그때 엄마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왜 나는 커서도 엄마가 나에게 '다해주었다'는 말을 들으면 목구멍으로 쓴 말을 한 번씩 삼키는 걸까.
그때 내가 왜 그런 울분을 터뜨렸는지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아. 엄마는 엄마 본인이 해주고 싶은 걸 해줬던 거지, 내가 뭘 원하는지는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가 백화점에서 사주는 비싼 옷보다, 만 원짜리 점퍼여도 친구들이랑 시내 옷가게에 나가서 사는 옷이 더 입고 싶었고, 억지로 받은 과외로 얻어온 점수에 못마땅한 엄마 얼굴 말고, 지난 번 보다 조금이라도 열심히 한 내 노력에 뿌듯한 엄마 얼굴을 원했던 것 같은데.
물론 지금은 알아. 엄마는 그게 최선을 다한 거였어.
그게 맞다고 생각했던 거야.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해주면서도 아이가 엇나가지 않게 하도록 때때로 엄하게 대하면서, 부족함 없이 해주고 본인이 받지 못했던 것들을 내 아이에게는 원없이 해주면서.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그냥 그때의 엄마로서 본인이 옳다고, 맞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총력을 기울였겠지. 이만큼 해줘도 모자르다고 생각하면서.
그럼에도 나는 우리 엄마를 많이 사랑하고 엄마에게 매일 고맙지만, 별수 없이... 전부 이해하지는 못할 것 같아. 하기사, 어떤 자식이 부모를 다 이해할 수 있겠어. 그 끝도 없는 헌신과 희생이 마구 뒤섞여 복잡해졌지만 '부모의 사랑'이라고 불리는 감정에 대해서. 그래서 아마 나중에 네가 나를 이해하지 못해도 나는 좀 덜 서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너에게 어떤 엄마가 될까.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나의 엄마가 나에게 해줬던 좋았던 것은 가지되, 성인이 되어 생각해봤을 때 상처로 기억되는 엄마의 행동들은 대체로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거야. 그게 노력한다고 되는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나는 너에게 너무 많은 것들을 희생하지 않을 거야. 나는 너의 엄마지만 또 '나'라는 것을, 네가 건강하게 인식하도록 할 거야. 그 방법은 차차 공부해야겠지.
그리고 네가 뭘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자주 물어볼 거야. 내가 해주고 싶은 걸 퍼주고 해주고 '다 해줬는데'라고 하지 않고, 그냥 네가 원하는 걸 해주거나 또는 원하지 않는 걸 안 하는 쪽을 택하려고 해.
근데 이 글 우리 엄마가 보면 많이 서운하겠다.
두어 번 재미로 본 사주에서 나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고 들었었어.(그게 너였어!) 두 번 모두 '그 딸이 거꾸로 철부지 엄마를 키우겠네.' 그랬거든. 사주에 정말 그런 게 나와 있는 건지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에게 그런 비슷한 말을 들었어. 아무튼 나는 너를 물리적으로 키우고 너는 나를 정신적으로 키운다는 의미지 않을까. 생각해.
너를 기다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네가 안겨 있고 그분들이 세상 다 얻은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봤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는 우리에게 온 축복이고, 기적이고, 믿을 수 없이 새로운 행운이야. 매일매일 더 사랑스러운 너의 아빠와 그리고 나의 유전자가 기적같은 확률로 만나 만들어진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니까. 착하고 성실하고 귀여운 너의 아빠를 네가 많이 닮았으면 좋겠다.
이 편지를 네가 정말 읽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 우리 서로를 잘 키워보자.
p.s. 나중에 이걸 읽게 되더라도 외할머니에게 이 편지의 내용은 말하지 말아줘.
방실방실 아조씨 | 포차성애자. 소녀 감성과 아저씨 취향 그 사이 어디쯤에서 소맥을 말고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