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일기 06.
"아무한테나 전화 와서 아무 말이나 하고 싶어."
(…)
"나하고 싶은 말은 못 했어. 존재하는 척 떠들어 대는 말 말고 쉬는 말이 하고 싶어. 대화인데, 말인데 쉬는 것 같은 말."
_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 중에서
출근해서 회사 문을 처음 열고, 퇴근할 때도 마지막으로 회사 문을 잠갔다. 아무도 없음은 이제 그런대로 익숙한 일이다. 신발을 신고, 사무실 전등 스위치를 모두 내리는 순간 집에 가기 싫다,를 생각했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내내 내 발걸음에는 요란한 깡통 소리가 난다. 텅 비었기 때문이다.
출퇴근길, 지하철 깜깜한 창문에 비치는 내 눈과 종종 마주친다. 그럴 때마다 내 얼굴과 몸이 뻥 뚫려 있는 것 같다. 요즘의 나는 하나도 빛나는 것 같지 않다. 무채색이고, 어둡다. 어느 날 대표님과 단 둘이 점심을 먹을 때 이런 얘길 했었다. 요즘의 나는 텅 빈 것 같다고. 예전에는 희미하게나마 빛이라도 났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런 게 없다고. 대표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필 사진도 내 사진으로 해놓을 때가 있었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밝고 에너지 넘쳐 보였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는 것 같다고.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 같으냐고 내게 물었다.
“저요.”
… 라는 말은 할 수 없어 속으로 삼켰다.
얼마 전 이전 직장 선배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 거리 두기가 해제되고 이제 전체 회식이 부활할 것 같다고 했다.(이전 직장에서는 한 달에 한 번씩 전직원이 회식을 함께 하는 게 문화였다) 그러면서 선배는 네가 아직 다니고 있었으면 100만 부 판 걸로 인센티브도 받았을 거고, 네 후배도 퇴사하지 않았을 거고, 마케팅실, 온라인팀 전체가 얼마나 화기애애했겠느냐고. 팀장으로 승승장구했을 거고, 지금처럼 여기저기 방황하며 불안해하지 않았을 거고, 연애도 하고 시집도 갔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동공 지진이 일어났거나 마음에 폭풍이 몰아친 건 아니었다. 그냥 웃으면서 말했다.
이직한 거 후회하지 않는다고. 선배들 만난 것만큼 지금 그 사람들도 소중하다고.
술이 꽤 취했고 택시를 타고 가라는 선배들 만류에도 꿋꿋하게 지하철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지하철 안에서 그렇게도 많이 울었다. 자리가 텅텅 비어있음에도 꿋꿋하게 서서 창에 비치는 나랑 마주친 거다. 그렇게 하찮고 볼품없어 보일 수가 없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내 인생에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던 삶이 이제와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었다. 주인공이 아닌 삶을 아침 출근길처럼 살아왔었으니까. 주인공인 사람이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나는 당연하게 그 필요에 응했고, 흔한 카메오들처럼 버려졌다. 주인공이 아닌 사람들의 희생은 주인공들을 위해 당연한 일이다. 나도 그런 셈이다.
집에 돌아와 테이블 앞에 앉아 켜지지 않은 티비를 멍하니 바라봤다. 열다섯 살 먹은 강아지가 나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면서 내가 그렇게 후진 사람이냐고 강아지에게 물었다. 그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