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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닷빛 Sep 30. 2022

어쩌다 '매의 눈'이 되어 (1)

라디오 피디 시절

저는 자타공인 '매의 눈'입니다. 남들이 그냥 지나치기 일쑤인 티끌 같은 오류가 저에게는 태산처럼 보여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가끔은 대체 나는 왜 그렇게까지 오타나 바른 언어생활에 집착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래서 한 번 '매의 눈 일대기'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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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PD, 광고회사 미디어 플래너를 거쳐 번역가이자 비영리단체 에디터이자 작가 지망생인 지금에까지, ‘오타’를 잡아내는 일은 꽤나 일관된 업무였다.

라디오 피디 시절, 작가들의 방송 원고를 검토해서 심의에 넘기고 방송 전까지 출력하는 게 주 업무 중 하나였다. 유독 오타를 많이 내는 작가분과 일했을 때였다. 원고 내용은 재미있고 좋았다. 문제는 오타. 심해도 너무 심했다. 빨간펜으로 수정하면 빨간 부분이 반을 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많았다. 어쩌면 입사 시험에서 가장 큰 고비였던 한국어 능력 시험을 봤던 덕일까. 그나마 심의에 걸릴 만한 비속어나 비표준어 등은 어느 정도 걸러낼 수 있었다. 표준어 규정의 모든 규칙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산호세'를 '새너제이'라고 표기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심의에서 지적받는 게 싫어서라도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고치고 일본어에서 왔다는 '오뎅'은 '어묵'으로, '바램'은 '바람'으로 고치곤 했다. (이제는 '짜장면'이 표준어가 되었다. 만세! GOD가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고 부른다고 생각해 보자. )

꼼꼼히 본다고 하지만, 생방 전후에 녹음까지 있는 날엔 그냥 제대로 훑어보지도 못하고 출력을 했다. 그럴 때는 꼭 사고가 생긴다. 어렵게 섭외한 초대 손님들의 이름이나 중요한 정보가 틀리곤 했다. 다행히 이름은 진행자가 실수를 미리 캐치하고 바꿔서 읽을 때도 있지만, 그 정보를 다 알아서 맞출 수는 없었다. 게다가 게스트들도 원고를 보는데, 어렵게 모셔놓고 그게 무슨 실례인가.

당시 함께 일했던 진행자는 그렇지 않아도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그 진행자는 방송을 끝낼 때마다 원고를 이 따위로 주면 어떡하냐고 타박하기 일쑤였다. 아니, 이 부분은 '까다롭다'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생방에서 원고를 바로바로 소화해내야 하는데 원고에 오타가 있으면 거슬리는 게 당연하다. 원고 준비는 결국 제작진의 책임이다. 비록 작가의 원고이긴 하지만, 프로그램의 최종 책임은 피디가 진다. 메인 연출은 조연출인 내게 화살을 돌렸다. "원고 다시 한번 봤어야지." 내가 쓴 글이 아니니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어쩌겠는가. 월급값은 해야지. 남의 돈 받아먹기 어디 쉬운가. 그러다 보니 더욱 원고를 열심히 보게 됐다. 그때 알게 모르게 훈련이 많이 됐다.


다행히 참고할 만한 곳은  많았다. 피디 시절, 선후배 동기 아나운서들과 일할 기회가 많았다. 아나운서들이라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선에서 방송을 진행해야 하는 당사자인 만큼, 한국어에 대한 엄정함은 남다른 편이다. '효과'를 [효꽈]가 아닌 [효과]로 발음하는 것은 기본, 짜장면을 [자장면]이지만 자에 조금 힘주어 발음하시는 선배를 보고 남몰래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KBS는 아나운서실 소속 한국어실이라는 곳이 따로 있었다. 급할 때는 그곳을 '검색 엔진'으로 활용했다.


메인 프로그램 외에도 내가 속한 채널에서 캠페인성으로 나가는 5분짜리 '우리말 비타민'이라는 미니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주로 잘 모르는 단어들, 혹은 흔히 하기 쉬운 실수 등을 아나운서가 전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때도 나름 훈련이 되기도 했다. 당시  <상상플러스>와 진행자 노현정 아나운서 덕에 한국어와 어휘에 대한 관심이 조금 많아지기도 했을 때였는데, 그곳에 나왔던 단어들을 재활용하기도 했다. (정의는 동아 프라임 표준국어대사전 앱 참고)


'휘뚜루마뚜루 (이것저것 가리지 아니하고 닥치는 대로 마구 해치우는 모양)' 


'천둥벌거숭이 (철없이 두려운 줄 모르고 함부로 덤벙거리거나 날뛰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등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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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퀴즈!


다음 중 표준어가 아닌 것은? 

1. 괴발개발 2.개발새발 3.금새 4.설거지


괴발개발  -개발새발이 아니었다고?!?! (제가 한국어 능력시험을 보던 당시에는 '개발새발'은 틀린 말이었어요. 이제는 복수 표준어로  인정받습니다. 참고로 글씨를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써 놓은 모양을 이르는 말은 ‘개발새발’ ‘괴발개발‘이고, 아주 더러운 발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은 ‘쇠발개발‘이라고 하네요.)


금세 : 금새가 아니라고????? (금시에의 준말이라서 ‘금세‘)

설거지: 1988년 표준어 규정에 따라 표준어였던 '설겆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설거지'로 대체된 예입니다. 예전에는 '설겆이'였어서 그런지 한국말에 꽤나 예민한 촉수를 가진 사람들도 이렇게 쓰는 걸 종종 봅니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몇 개만 더 예를 들어볼까요? 


쇠털 같은 날들: 새의 털이 아니라 소의 털이라 쇠털이래요. 참고로 띄어쓰기까지 가면 답이 없지만…

-> 쇠털 같은 날들이지만 ‘쇠털같이’ 많은 날들로 앞의 건 형용사 활용형이라 띄어 쓰지만 ‘같이’는 격조사라서 붙여 써야 한답니다. 한국어 문법이 영어 문법보다 어려워요… ㅠㅠㅠㅠ

몇  월 며칠: 며칠만 말미를 줘,라고 할 때는 '며칠'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월 몇 일'이 맞다고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혹시  틀릴까 봐 국립국어원 온라인 가나다 상담 사례에서 다시 한번 확인해 봤어요.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

"한글맞춤법  제27항에 따르면 둘 이상의 단어가 어울려 이루어진 말은 각각 그 원형을 밝히어 적되, 어원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원형을  밝히어 적지 않습니다. '며칠'이 만약 '몇 일(日)'이었다면 '몇 월(月)'[며둴]에 준해 [며딜]로 발음되었겠지만,  그렇게  발음되지 않고 [며칠]로 발음되므로 소리대로 '며칠'로 적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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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표준어를 잘 안다고 뻐기는 같지만, 이런 걸 나라고 처음부터 안 건 아니다. 계속 찾아봐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많다. 그래도 '우리말'에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자신감은 통번역대학원에 가면서 처참히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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