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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닷빛 Mar 07. 2023

청순함을 허하노라

격렬하게 쉬어보자

"격렬하게 쉬었어요."


책 탈고를 마치고 격렬하게 쉬었다는 보경 님의 말을 듣자마자 프로질문러답게 궁금증이 생겼다. 


"격렬하게 쉬는 게 뭔가요?"


"뇌를 청순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죠. 이게 끝났으니 이제 뭘 해야 한다 같은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책도 좀 보고 드라마도 좀 보고 그렇게 쉬는 거요."


갑자기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렇게 따지면 저는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사실이 아니다. 내가 기계도 아니고 여태 살면서 쉰 적이 없을 리가. 그렇지만 자발적으로 뇌를 비우고 길게 쉰 게 과연 몇 번이나 되려나? 엄마가 되면서는 더했다.

때로는 명상을 한답시고 앉아있을 때조차 머릿속은 바쁘게 돌아갔다. 


오늘은 어떤 일정이 남아 있지?
계속 못하고 있는 **는 언제 하지? 아, 맞다. 숨 쉬라고 했지. 그래 일단 숨을 쉬자.
아... 그런데 오늘은 뭘 먹지? 잠깐, 내가 빨래 돌리고 널었었나?
하나, 둘, 셋.
아, 계란 떨어졌는데. 헉. 알람이 울리네. 오늘 빨리 픽업하는 날이잖아!

약간의 여유가 주어질 때도 '자 이제 이걸 마치면 저걸 해야지. 그래, 이것도 읽고 저것도 봐야지.' 같은 생각들로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나를 굴려온 반평생. 그래서 이루고 성취한 것도 물론 많이 있겠지만, 미련하도다 인간이여. 얼마나 미련하냐고? 십여 년 전, 허리 디스크로 그야말로 몸을 일으켜 세우지도 못해 병원에 실려갔을 때, 입원하라는 의사의 말에 내가 했던 첫마디는  "선생님, 저 학교 가야 되는데요."였다. '환자분, 지금 몸을 일으켜 앉지도 못하시는데 학교를 가시겠다고요...?" 


다행히도 나란 인간이 아주 형편없이 미련하지만은 않다. 과거의 경험에서 배우고 배웠던 것을 비워내거나 새롭게 다듬어 나가며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 지난 2월, 급한 번역 때문에 무리하다가 목 어깨에 이어 허리가 고장 나는 신호가 왔을 때, 결국 한 달을 입원했던 10년 전 경험을 되풀이할까 두려웠다. 그때의 교훈을 기억하며 바로 모든 일을 손에서 놓았다. 집 앞 한의원에 걸어가서 진료를 받는 것 외에는 와식생활을 했다. 되도록 누워있으라고 해서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신조로 살았다. 예전에 봤던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다시 보고 '슬기로운 하드털이'도 찾아보고 배우들 인터뷰도 찾아보았다. 그렇게 마음껏 덕질을 하며 '청순한 뇌'로 쉬었구나. 나도 '격렬하게 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비록 계기가 아주 자발적이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2월의 반 정도를 누워서 보냈다. 비록 2월 중순부터 '2월을 또 이렇게 보내다니. 계획한 것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라는 마음으로 조금 초조해지긴 했지만, 그런 격렬한 쉼 덕분에 훨씬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3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내가 아플 때 일하랴, 밀린 집안일 하랴, 시아 챙기랴 고생했던 남편에게도 이번 주말에 2박 3일 주말 동안 혼자 스키를 타러 다녀오라고 미리 말을 꺼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아무 생각 없이 청순하게 최소한의 결정만 내리며 마음껏 쉬었던 뇌 덕분이 아닐까. (호기롭게 말을 해놓고 약간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것은 안 비밀...)


어디선가 미국인은 하루에 크고 작은 의사결정을 35,000번 정도 한다는 연구결과를 읽었다. 선택지가 많은 게 꼭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그렇게나 많은 의사결정을 하느라 우리의 뇌는 얼마나 힘들까. 그러니 이제 걱정과 근심을 조금 내려놓고 격렬하게 쉬어보자. 그렇다고 "아, 나 쉬어야 되는데..."라고 강박을 갖지도, "왜 이렇게 쉬지를 못하니"라고 자책하지도 말자. 그러다 보면 '쉼'조차 그저 또 다른 족쇄가 될 테니까. 마음 가는 대로 즐겁게. 적극적으로 쉴 테다. 이게 '잘 쉬고 있는 건지'라고 점검하는 생각조차 비워낼 테다. 

그간 주인 잘못 만나 고생한 뇌여, 이제는 청순함을 허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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