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을 그리다 Jun 26. 2020

나의 이야기

2019를 마치는 회고

어제저녁 기말고사를 마지막으로 4학년 1학기가 끝이 났다. 매 학기마다 "이번 학기가 가장 바쁜 학기가 될 것 같아”라고 이야기해온 지 3년째 매번 조금씩 더 바쁜 학기를 치열하게 살아오며 그간의 느낀 것들과 회고 같은 것들을 남기고자 느지막이 키보드를 잡는다.  



나만의 것

스물두 살. 또래 친구들보다 조금 늦게 들어간 군대에서 관물대의 녹 냄새가 익술 해 질 때쯤, ‘나만의 것’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남들과 다른 것이 차별성이었던 곳에서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들의 소중함을 뒤늦게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나의 지난 삶은 의미 없고 무용한 것들로 가득했다. 배우지 않아도 되었던 반항과, 자유를 빙자할 일탈은 나를 생각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만들어갔다. 모든 것을 내 뜻대로 살아가던 나만의 세상에서 군대라는 손발이 묶여버린 낯선 환경과 ‘나만의 것’을 찾는 사고의 시작은 그 당시 나에게 꽤나 큰 도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세상의 많은 위인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방법으로 이 땅에 기록을 남기고 갔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이 그 기록을 엮어 책이란 것을 만들어냈고, 우리는 그 매개체를 통해 위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처음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상병 쯔음이었는데 당시 운전병 대기실이 조종사 도서관 (필자는 조종사 출동차 운전병이었다.)으로 배치되면서 내 뜻과는 상관없이 군생활을 책 속에서 하게 되었다. 

책 속의 저자들은 각기 저마다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때때로 앞서 읽었던 책의 가치관과 후에 읽었던 책의 가치관이 상충되기도 하였고, 머릿속에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만의 기준을 세우게 되었고, 내게 필요한 방향으로 각각의 지식들을 이해하고 내 생각에 옷을 입혀가기 시작했다.




Design

그렇게 전역을 하게 되었고, 온갖 철학과 의지만 가득한 멍청이였던 나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공부를 해보고 싶었고 당시 학교와의 통학시간이 왕복 4시간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취방을 서울에 잡고 그곳에서 다양한 문화들을 접하고 학원을 다니며 공부해나가기 시작했다. 당시에 내 전공은 Virtual Design 즉 시각디자인으로, 사실 지식을 습득하는 공부라기보다는 가치와 영감을 잡는 훈련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한 학기 하고 절반쯤 흘렀을 때, 불현듯 내가 디자인과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질감이 들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집중력 있는 학습을 통해 나름 디자인 분야에서 성취를 이루고 있는 상태였는데(자랑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 했던 과제물을 교수님께서 수업에 활용하고 계신다.) 처음에는 "내가 디자인에 실증을 느끼는 건가?”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것은 실증과는 거리가 먼 좀 더 본질적인 이질감이었다.  

내가 디자인과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 정말 다양한 적성검사와 여러 분야를 체험해보려고 노력했다. (후에 들었지만 교수님께서도 내가 그 당시에 다른 무언가에 홀려있는 것 같다고 했다.) 코딩도 그중 하나였는데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아는 형에게 자바스크립트를 배워본 게 그 시작이었다. 당시에 변수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for문을 사용하는 것까지 배웠었는데, for문은 며칠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당시에 나는 머리가 텅텅 비어있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정말 너무 재미있었다. 뭐라 할까… 디자인은 물속에서 영감을 잡기 위해 물장구를 치는 느낌이었다면 프로그래밍을 한다는 것은 발 끝에 감촉을 느끼며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내게 확실히 다가왔고 개념의 이해와는 무관하게 좀 더 본질적으로 흥미로 다가왔다.

 

전과를 결심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만 하는 성격으로 70%의 확신이 들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고자 노력했다. 더군다나 디자인과의 과제량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복수 전공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분야의 학문을 익힌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너무 에러 사항이 많았다. 그렇게 복학을 한 지 1년 만에 예대에서 공대로, 끝에서 끝으로 나의 전공은 변경되었고 나의 덕후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Computer Science

처음 수강 신청할 때가 기억이 난다. 정말이지 무기력한 그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수강신청 페이지를 열었는데 과목 명을 보고 그 과목이 무엇을 알려주는 수업인지 알 수가 없는 답답함. 어떤 수업이 내가 들어야 하는 수업인지, 이 수업을 내가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수업인지. 선배도, 누군가 나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는 멘토도 없이 그저 감에 의지해서 수강 과목을 선택했다. 그 학기는 정말 힘든 학기였다.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 6개월은 코딩을 배운다기보다 프로그래밍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시간에 가까웠다. 그렇게 한 학기가 흘러서 다음 학기 수강신청을 할 때는 이번에 배우게 될 과목들이 무엇을 가르쳐주는 과목인지 대략적으로 알게 됐다. 그리고 또 한 학기가 흐른 뒤에는 수강신청을 하게 될 과목들을 이미 다 공부한 뒤였고, 그렇게 나는 조금씩 성장해감을 느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나는 늘 혼자 공부했고, 학교에서 배우는 프로그래밍과 현업에서 하는 코딩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간 학교에서는 성적을 유지해왔지만 나는 아직 주니어 개발자에도 끼지 못하는 헷병아리에 불가했다. 나는 늘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해당 학기에 목표를 먼저 구상했었는데, 이번 학기의 목표는 프로젝트 경험이었다. 어떻게 하면 프로젝트 경험을 쌓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우연히 취업상담을 통해 SOPT라는 IT 창업 동아리를 알게 되었다. SOPT는 10년이 넘은 IT 창업동아리로 기획, 디자인, 안드로이드, IOS 파트가 협업해서 프로젝트를 만드는 동아리였는데, 무엇보다 열정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나는 25기로써 SOPT에 지원하게 되었고, 6:1의 경쟁률을 뚫고 SOPT25기 서버 파트원이 되었다.




성장

처음 SOPT에 들어왔을 때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바로 배울 사람이 많다는 점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잘했고,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로 내 정신을 혼 빼놓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나는 삽질을 굉장히 많이 해왔다. 서버 파트에 들어왔지만 나는 서버를 다룰 줄 거의 몰랐고, 기껏 해봐야 get방식과 post방식을 이해하는 초보중에 초보였다. 내게 남들과는 다른 점은 단지 이해하지 못하는 레퍼런스들을 다섯 번 이상 읽어봤었다는 정도였다. (혼자 공부할 때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시니어들은 하나 같이 이야기한다. “삽질해봐라”, “실패해봐라”, “경험해봐라” 등등. 공부에 왕도가 있다면 나는 단연 그 길을 가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해온 공부는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물들이었고 남들이 굳이 경험하지 않는 오류들을 경험해야 했다. SOPT에서는 현장에서 세미나를 통해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고 언제나 모르는 것을 질문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었고, 내가 아는 것을 공유하였을 때 즉각적으로 피드백해줄 수 있는 서포터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들의 도움과, 지난 삽질을 양분 삼아서 빠르게 성장했다. 마치 지난 1년 반 동안 개념으로만 알았던 것들을 직접 사용해보고 적용해보고 공유함으로써 해당 기술의 코어를 이해하고, 지난 삽질의 노하우로 좀 더 빠르게 에러 상황을 탈출했다. 또한 늘 그랬듯 에버노트에 글을 남기며 회고했다.




늘 최고가 될 순 없지만 늘 최선을 다할 순 있다.

내가 습관처럼 나에게 해주는 주문 같은 말이 있다. 공부는 습관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찾아온다. 그건 모차르트 건 에디슨이건 예외가 없다. 하지만 그런 슬럼프가 찾아왔을 때 나를 잡아줄 수 있는 건 그동안 해왔던 습관 같은 성실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늘 습관처럼 공부 해왔다. 공부를 하나도 못한 날에도 노트북을 펴고 최소 3시간 이상은 앉아있었다. 코딩을 하다가 손에 습진이 생겨본 경험이 있는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에 설레서 밤잠을 설쳐본 경험이 있는가? 지금도 나는 스스로 내가 아직 한참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주니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고 누구에게나 가능성이 있다. 지금에 와서야 내 단편적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내가 처음부터 개발의 재능을 가진 줄 알았다고 내 기분을 띄워주기도 하지만… :) 나는 함수를 이해하는데 두 달이 걸린 멍청이였다. 나는 그만큼 고민했고 쉼 없이 배우고자 노력했다. 내 공부시간은 의대생보다 러닝타임이 길었지만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놓은 아웃풋은 형편없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포기하지 않는 즐거움을 알았으면 좋겠다. 도전하는 기쁨을 느꼈으면 좋겠다. 나는 앞으로 또 성장할 것이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기대되고 현재보다 미래의 가치를 꿈꾼다. 계속 갈망하라. 여전히 우직하게.


작가의 이전글 즐거움이란 흥미롭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