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장애인권리위원의 마을살이 3편
김미연 (UN장애인권리위원, 위스테이별내 입주자)
나는 위스테이별내에서 3층에 산다. 낮은 층에 사는 덕에 우리 집 거실에서는 동네의 잔디 마당을 사계절 그림처럼 바라볼 수 있다. 봄꽃이 흩날리고 초록이 싱그러운 풍경을 바라보고,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뭇잎이 쓸쓸히 떨어지는 가을을 지나, 눈이 쌓인 마당에서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드는 정경은 참 정겹다. 이 사계절 동안 동네 아이들이 행복하게 떠드는 소리를 맘껏 들으며 산다는 것은, 아이들이 사라지는 시대에 얼마나 행복이고 행운인가.
‘저출생/저출산’이 문제라고들 말한다. 많은 매체에서 여성들이 본인의 커리어와 출산, 양육을 두고 깊은 고민 속에 있음을 조명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 속에 어쩐지, 교묘하게 장애여성들의 재생산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음을 느낀다.
나는 20대인 자녀가 둘 있다. 안타깝게도, 내가 젊은 시절만 해도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부족하거나 뒤처지는 것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장애여성이라 결혼을 못한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결혼을 꼭 해야겠다 결심(?)하고 아이들을 낳았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여성들에게 일종의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던 시대였다. 나도 당시에 그러한 지위와 ‘정상성’을 갈망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내가 당시 사회가 만든 함정—일종의 가스라이팅—에 빠졌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결혼과 출산은 그 이전에 결코 맛보지 못한, 여성으로서의 존재적 충만함을 느끼게 했다. 장애로 인한 어떤 결핍이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었고(순전히 당시 개인의 생각과 감상이라는 점을 밝힌다), 장애인이라 결코 획득하기 어려웠던 소속감과 사회적 지위까지 부여받은 것 같은 기쁨이 있었다. 당시의 내 입장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신체장애로 인한 나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고 온전한 재생산능력을 보여 줌으로써, 확고한 사회적 소속감과 지위를 획득하는 확실한 길이라 여겨졌다. (사실 나는 자유롭고 싶은 날라리과에 속해서, 지금 20대였다면 결코 결혼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성들을 만나 연애를 즐기고,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았을 텐데 아쉽다.^^;;)
그때로부터 벌써 25년 이상 시간이 흐른 지금, 특히나 많은 여성들이 출산을 거부하는 현재, 여전히 출산과 양육의 (고행)길로 들어서길 갈망하는 장애여성들을 보면, 이런저런 양가적 감정이 들기도 한다. 소속감과 지위를 획득하고 싶어서이든 다른 이유에서든, 분명한 건 출산을 원하는 장애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는 왜 이 점을 외면하고 있을까?
현재, 대한민국은 0.78명의 초저출산 시대를 맞이하여, 어떻게든 여성들의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온갖 정책적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출산율을 높인다는 명목하에, 이주여성과의 결혼과 임신 출산을 지자체에서 적극 지원하고 장려하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결혼과 임신, 출산에 진심인 장애여성을 지원하는 데는 거의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직까지도 ‘장애가 유전되는 것이 아닐까’,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면서 아이를 어떻게 낳고 기를 수 있겠는가’ 등등 미신과 편견에 휩싸여 장애여성들의 임신과 출산을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장애인이 무슨 애? 더 복잡해져’라는 것이다.
장애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지원책이 많지 않다는 건, 엄마가 겪고 있는 “사회적 소외와 분리”라는 사회적 “장애”가 아이에게도 대물림되는 것을 의미한다. 20여 년 전, 엄마 아빠가 휠체어 타는 장애인인 딸아이가 9살이 되도록 놀이공원 한번 가보질 못해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한다는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장애엄마들이 아이와 함께 박물관이나 놀이공원에 신나고 재미있게 놀러다닐 수 있는 <장애엄마 날개 달다>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장애엄마들, 그들의 아이들까지 50여 명과 함께 3년 동안이나 놀러다녔다. 놀이공원을 못 가보았다는 사실 자체보다, ‘내 아이 같은 아이들이 학교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다니!’라는 분노가 우리의 놀이 문화를 만들게 했던 것이다.
장애인 부모가 받고 있는 제약된 환경 안에, 그들의 자녀가 똑같이 가둬지는 것을 목격할 때가 있다. 신체적 장애가 유전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장애를 만드는 환경이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거기에 빈곤까지 겹치다 보면, 장애인의 자녀들 역시 소외와 무시를 당하고 이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고 성장한다. 그것도 주로 학교에서 말이다. 장애와 빈곤의 대물림 문제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임에도, 장애인 부모의 자녀들은 극소수의 사회구성원들이라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사회는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장애인 부모를 케어하라’고 세뇌시킨다. 엄마의 휠체어를 끌고 가고 밀어주는 아이들을 칭찬한다. 그 칭찬의 이면에는 “장애인 부모를 책임져야 한다”라는 강요가 숨겨 있다. 겉보기엔 친절하지만, 엄연한 “강요”이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사회적 가스라이팅이라고 생각한다.
터놓고 얘기하자면, 우리집 애들은 장애인 엄마의 착한 아들 딸로 자라질 않았다. 오죽 하면, 아이들이 어렸을 때, “너희 엄마는 엄연한 장애인이야. 빨래를 제발 빨래통에 넣어 줘… 나는 이런 일도 하기 어려운 장애인임을 기억해 줘 부탁할게…”라고 외치고 살았다. 우리 아이들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엄마가 장애인이란 엄살은 안 통해!”였지만! (이게 좋아해야 하는 태도인지, 교묘한 말대꾸인지 헷갈렸지만) 사실 나는 이게 또래 아이들처럼 평범하고 ‘정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장애엄마의 딸 아들은 착해야 하고, 집안 일을 자기들이 온통 감당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어린 아이에게 주입시키기에는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부적절한 태도라 생각한다. 나 또한 마음속 깊이, 우리 아이들이 착한 애로 강요받고 크지 않길 바랐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와 우리 아이들은 일상적으로 가스라이팅을 겪을 때가 많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주민자치센터에 방문하는데, 우리 딸이 심심해서 나를 따라온 날이 있었다. 그런데 나를 상담해주는 상담사가 내가 눈앞에 뻔히 있음에도 우리 딸에게만 자꾸만 뭔가를 물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딸에게 시키는 것 아닌가. 참지 않고 그곳을 뒤집어놓고(!) 나왔다. 내가 서류를 떼러 왔는데 왜 우리 딸에게 물어보냐, 엄지손가락 지문도 우리 딸 지문으로 찍지 그러냐, 그리고 왜 당신이 할 일을 우리 딸에게 시키냐고 말이다. 참고 지나치지 않았던 것은, 다른 장애인이 자녀를 데리고 왔을 때, 똑같이 그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제 겨우 서너 살 된 아이가 성인인 엄마의 휠체어를 밀고 다니는 걸 칭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임을 알지 못한다. 아이를 두고 너무 착하다, 네가 엄마 보호자다, 이런 얘길 하는 건 어쩌면, 아이가 아이답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폭력적 억압이 된다.
“우리 애 안 착해요. 우리 애 못되게 놔두세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다들 혼란스러운 눈치다. 분명히 내 딸을 착하다고 칭찬(?)한 것인데, 혼이 났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장애엄마들이 이러한 칭찬의 탈을 쓴 가스라이팅에 굴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억압을 내재화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돼, 그건 네 자유야, 라고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기도 못 펴고 살아가게 된다.
저출생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고민, 아이를 자유롭고 건강하게 키워내기 위한 고민들 속에 장애인 양육자들의 고민도 함께 녹아들기를 바란다. 장애여성이 동등한 위치에서 출산에 대한 고민을 하고 지원받는 것, 장애인 양육자가 양육자로서 역할할 수 있도록 지원받는 것, 그들의 자녀가 (부모의 보호자가 아니라) 아이답게 자유롭게 클 수 있도록 지원받는 것 역시 ‘공동체’의 고민 속에 녹아들 수 있기를 말이다.
나는 오늘도 거실에 앉아, 온통 푸른 여름의 잔디밭에서 젊은 부모들과 뛰노는 위스테이별내 어린이들을 바라보는 재미로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이 멋지고 아름다운 그림 속에 장애가 있는 부모와 자녀들도 함께 있는 미래를 꿈꾸어 본다.
‘아! 내가 30대였을 때, 위스테이별내 같은 동네에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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