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장애인권리위원의 마을살이 2편
김미연 (UN장애인권리위원, 위스테이별내 입주자)
아파트 단지에 살다 보면, 엘리베이터에서 이웃들을 만날 때가 종종 있다. 대개는 숨막힐 듯 어색한 공기가 잠시 맴돈다. 어색함을 덜기 위해 누군가는 거울을 보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누군가는 엘리베이터의 층수 전광판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런 모습을 포착한 밈이 인터넷에 떠돌고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을 정도로, 실은 아주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이다.
우리 동네, 위스테이별내에서는 이웃 간에, 설령 서로를 모를지라도 엘리베이터나 복도에서 마주치면 가벼운 인사를 나눈다. 동아리나 프로그램에서 한 번이라도 마주친 적이 있다면, 더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이런 풍경이 이제는 나에게도 익숙하고 편안하게 다가오지만, 이전에 살았던 곳에서는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전에 살았던 아파트 단지에서는 이웃을 마주칠 때, 묘하게 불쾌하거나 위축되는 일들이 더러 있었다. 예컨대, 아이를 동반한 이웃이 나를 보면, 본인의 아이에게 ‘위험하니까 가까이 가지 마’라고 한다거나, 큰 개를 만난 것처럼 놀란 표정을 하고 쳐다보는 경우도 있었다. 이 정도는 양반인 것이, 개를 동반했던 한 이웃은 나에게 ‘우리 애가 놀라니까 다음번에 타라’고 나의 엘리베이터 탑승을 저지하기도 했다.
그간의 경험이 이렇다 보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본인의 아이들에게 “인사해야지”라고 가르치는 위스테이별내의 문화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곰곰 생각해 보게 된다.
엘리베이터는 한정되고 밀폐된 공간이다 보니, 아무래도 다양한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아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과 관심을 더 가까이에서 느끼는 것이다. 같이 살아가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도 내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을진데, 다양한 지하철 역의 엘리베이터는 이보다 더 스펙터클한 만남의 연속이다.
하루는 대낮의 지하철 엘리베이터에서 세 분의 할머니들을 만났다. 그 중 누구에게나 친화력 좋게 다가갈 것 같은 할머니 한 분이 전동휠체어 손잡이 위에 올려 놓은 내 손을 덥썩 잡고 쓰다듬으며, “아이고, 일을 안 하고 사니 손이 곱다 고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물론 내 손이 곱긴 곱지만! ^^). 나는 업무 미팅 때문에 바쁘게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장애인은 일하지 않을 거라는 편견으로 나에게 그런 막말을 하고 함부로 손을 끌어당긴 것이다. 그것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 내내 붙잡고 계셨다. 게다가 50대가 넘은 성인인 내 손을 거리낌 없이 잡다니(어린아이의 손은 막 잡아도 된다는 건 아니다), 내가 휠체어를 타지 않았어도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이런 경우, 만만치 않은 장애인으로 돌변한다. 나를 만난 할머니 세 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나에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제가 왜 일을 안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제가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이렇게 막 어린애 취급하며 만지셔도 되나요?” 내 손을 마구 잡았던 할머니가 진심 어린 사과를 할 때까지 나의 잔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사실, 그냥 돌아서서 아무 말 않고 내 갈 길 가도 될 일이지만, 굳이 나쁜 역할을 자임하는 이유는 그 분이 다른 장애인들에게도 이와 유사한 행동을 할 것 같다는 불길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이런 수치심은 내게서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살고 있는 남양주에서 서울로 미팅을 다녀오려면 최소 12번에서 16번 정도 장애인을 비롯한 교통약자들을 위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야 한다. 그 길에 내가 만나는 풍경은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조금이라도 빨리 엘리베이터에 타기 위해 나를 앞질러 뛰어가는 많은 사람들, 정원이 차버린 탓에 나를 두고 가는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휠체어를 타고 있는 나를 20초 이상 마주보는 수많은 눈들.
이런 일들이 야속하지만은 않다. 매번 화가 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안타까운 순간들도 있다. 어느 날인가는 엘리베이터에 탄 (우리 아이들 또래의) 청년들을 보는데, 얼굴이 너무 헬쓱하고 피곤해 보여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오늘 외근이 많았으려나, 월경통이 심한 날일 수도 있겠다. 얼마나 피곤하면 휠체어를 보고도 모른 척했을까, 싶은 것이다. 독 안의 쥐 같은 서울 생활이 얼마나 빠듯할까. 좀 더 마음의 여유가 있는 날이면, 그 순간만큼은 나를 ‘가진 자’라고 생각해 본다. ‘지금은 내가 저 청년들보다는 가진 자야. 바퀴 달린 의자를 가졌잖아?!’
휠체어 장애인에게 엘리베이터를 양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애인만을 위한 엘리베이터라고 여겨져선 안 된다는 생각도 한편 든다. 모두가 누릴 수 있어야 모두의 것이 되고, 그래야 이 엘리베이터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모두가 함께 원인을 찾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의 편안함, 타지 못했을 때의 막막함을 더 많은 사람이 경험하고 공감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 공감이 내가 겪는 일상, 감정과 연결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어떤 날은 나를 두고 떠나는 야속한 엘리베이터를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잊지는 않았으면 한다. 지하철을 타기 위한 엘리베이터 앞 혹은 당신의 아파트 어느 곳에든지, 휠체어를 탄 장애인, 유아차/어린이와 동행한 사람들, 무거운 여행용 가방들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걷기가 어려운 어르신들이 우선되어야 한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불편을 공유하고 감수할 수 있는 감각과 연습이 필요하다.
다시 위스테이의 이야기로 돌아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나를 기다려주고, 반갑게 인사를 해주고, 휠체어가 편안하게 오갈 수 있도록 동선을 배려해 주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전 입주민들을 대상으로 장애인권 교육을 진행한다거나, 우리 아파트 단지 벽면에 ‘장애인들의 인권을 보장합시다!’라는 문구가 써붙여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이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한다. 주변 사람들과 ‘왜 그럴까?’, ‘유독 착한 사람들만 들어온 아파트인가?’ 등등 상상의 나래를 펼쳐봤지만, 생각은 돌고 돌아 늘 ‘마을’이라는 단어 앞에 멈춘다. 이곳은 ‘마을’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살면서 나를 계속 마주쳐야 한다는 사실, 특히나 내가 이 마을에서 누군가를 함부로 대하면 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전해질 수 있다는 조심스러움… 가끔씩 아파트 인터넷 카페에 “우리 마을에서는 이런 일들이 없었으면 합니다”라는 내용의 글이 올라올 때마다,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이웃들의 마음속에 ‘우리 마을’이라는 상이 서서히 자리 잡아 가고 있구나를 느낀다.
‘우리 마을다운 게 뭔데?’라고 물을 수도 있겠다. 저마다의 머릿속에는 각기 다른 마을이 존재할 테다. 하지만 마을을 마을답게 하는 건, 우리가 서로에게 ‘이웃’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점일 것이다. 일종의 “이웃이 될 결심”이랄까. 내가 설령 불편하더라도 이 정도의 불편은 감수할 수 있다는 마음, ‘서로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고, 우리 평등하고도 원만한 관계를 만들어 가자’는 마음’,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자’는 마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다.
장애 인식 개선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방송, UN의 권고… 여기에 얼마나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투여되는지 아는가? 나는 ‘마을’이라는 안전망이 이 모든 것의 총합보다 더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장애인들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별도의 마을을 만들자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훌륭한 물리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더라도, 장애인들만 분리되어 살아가는 이상, 결국은 ‘시설’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인도에서, 어딘가 엉성하고 불편해 보이는, 쟁반 같은 것에 바퀴를 단 이동수단을 타고 있는 장애여성 동료를 만난 적이 있었다. 모두의 지혜를 모아 만든 탈것을 타고 마을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그를 보며, 나는 이것이 바로 장벽을 없앤 ‘배리어 프리’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나와 신체적인 여건이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는 것은, 거창하게 돈이 많이 들고, 심지어 낯설 것 같은 어떤 시설물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이웃들의 존중 안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소속되는 것이 먼저이다. 그러다 보면 같이 사는 방법을 함께 만들게 되어 있다. 위스테이별내를 입주하기 전, 생애 처음으로 내가 살 공간을 휠체어가 다니기 적합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설계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우리 조합원들에게 함께 살아갈 공동체 일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마을의 엘리베이터에서 내가 경험하는 따뜻한 온도만큼, 우리 사회의 다른 많은 엘리베이터에서도 이런 적정한 따뜻함과 배려를 경험하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더 많은 장애인들이 사회에 대한 ‘소속감’, 그리고 ‘자긍심’을 느끼며, 더 자유롭게 일상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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