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서울 자가에 생계형 프리랜서 촬영인 김감독
2006년, 스물일곱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며 봉천고개 꼭대기의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스물일곱, 아직은 예술가를 꿈꾸던 어리고 철없던 꼬마 부부 우리에게 프리랜서 생활을 지속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자가로 집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혼수, 예단등 불필요한 예식의 과정은 대체로 생략하고 집에 올인을 하기로 결정을 한 것은 당시로서 흔한 일은 아니었다.
남자가 집, 여자가 혼수, 결혼할 때 신부에게는 명품백을 사주고... 이런 공식이 흔하던 시절 그냥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끌어모아 우리는 집을 장만하기로 결심을 했다.
그 시절만 해도 아직은 집값이 이렇게 미친 듯 춤을 추기 전이어서 꿈을 꿔볼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의 예산안에서 구입할 수 있는 집을 찾아 학생이던 김해인과 새내기 방송 조연출이었던 나, 우리 두 사람은 틈만 나면 미아리부터 봉천동까지 서울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우리가 예산으로 구입할 수 있는 집을 찾아 헤매었다.
그렇게 마련한 첫 번째 집이 봉천고개 꼭대기의 작은 집이었다.
사실 부모님들은 조금 좋은 동네 전세로 시작하는게 어떨까, 권하셨지만 우리에게 우리 소유의 집은 재산으써 돈을 불린다는 개념보다는 프리랜서 부부로 유혹 없이 살아가기 위한 보호 장치였다.
봉천고개의 작은 집에 사는 동안 나의 별명은 자연스럽게 정감 가는 봉천댁이 되어 10년을 꼼짝 안 하고 그 집에 살았다.
별로 이동의 필요성도 못 느꼈고 남들은 봉천동이다, 언덕이라 집 값이 안오른다.. 이런 평가를 하든지 말든지 우리의 작은 낙원에서 행복하고 안전했다.
그 작은 집에서 첫째가 태어나고 자랐다.
그리고 결혼 십 년 만에 둘째가 태어났다.
둘째가 생기자 그 집은 너무 좁아져서 이사를 결심을 했지만, 언덕 꼭대기 우리들의 낙원은 터무니없이 싸서 그 어디로도 이사를 갈 수 없었다.
하지만 결심을 했으니 움직여야 해! 속으로 끊임없이 파이팅 파이팅을 외치며 영혼의 코딱지까지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방이 세 개 있는 , 하루종일 해가 잘 드는 남향의 30평대 아파트를 소유하게 되었다. 비록 일생 최초의 대출을 안기는 했지만 말이다.
여기서 잠깐, 직장이 없이 직업만 있는 영화인 김해인 씨는 어떻게 대출에 성공했을까?
그때까지 대출을 한 번도 받아보지 않았던 우리는 적당한 서류를 들고 은행에 가기만 하면 당연히 대출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난 무려 %% 은행과 오래오래 거래한 VIP 고객이었고 비록 부부 공동 명의이긴 하지만 대출 없는 서울의 아파트 소유주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와 달리 은행에 가자마자 심사도 들어가기 전에 대차게 까였다.
그리고 은행의 기준으로만 따지자면 나는 마이너스 통장 개설도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럴 수가..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우리는 무일푼도 아니고 지역가입자로서 어마어마한 의료보험료를 내고 있고 , 작은 세금 한 번 밀린 적 없는 성실 납세자인데 국가는 우리는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낙원에서 사느라 세상의 평가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기준 속에서 우리라는 존재는 너무나 초라해서 소멸되어 없어질 위기였다.
당장 회사에 들어가 소속을 가져야 할 것 같다는 위기감이 마구 몰려왔다.
다행히 우리는 우리의 작은 집을 담보로, 소득은 의료보험으로 증명하여 겨우겨우 대출을 받아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새로 이사한 집은 여전히 안방 하나 정도가 은행의 소유였지만 이 전의 작은 집에 비해서 해가 너무 잘 들어서 나는 한참동안 커튼도 블라인드도 달지 않고 햇살이 눈 부신 집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다.
모두들 나를 보며 웃었지만
' 내가 은행과 부동산을 상대로 투쟁을 하여 얻어낸 것이 바로 이 햇살이거든.'
이런 기분이 들어서 쏟아지는 그 햇살을 지겹도록 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