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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Nov 21. 2024

<직업은 있지만 직장은 없습니다>

15화. 이제는 내가 커야하는 시간




대학 졸업할 때 찍은 단편영화로 카메라 기자들이 뽑은 상을 수상하며 졸업한 김해인 씨는 열정 페이 30만 원의 시절을 지나 무럭무럭 자라서 어느덧 외국물까지 먹고 B팀 촬영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명백하게 김해인 씨의 업적이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알고 있지만 한쪽 눈은 꼭 감고 내가 뒤에서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혼자 위안을 삼으며 애써 현실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둘이 소꿉처럼 시작한 살림이지지만, 어느새 큰 평수로 이사를 했고 , 두 아이가 태어나 네 식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주희 주원, 우리 집 주남매는 엄마인 나의 시간과 정성을 먹으며 무럭무럭 잘 자랐다.

모든 것이 자라고 있었다.

김해인 씨도, 아이들도, 심지어 살림마저도.

나만 그대로 인 것 같았다.

놀이터만 십수 년째, 이렇게 그네만 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는  나도 커야 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결심을 했으니 일단 나가자!


웅. 근데 어디로 나가야하지?


10년 동안 집에서 살림을 하고 아이를 키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의식의 흐름에 따라 공부를 하면서 이런저런 자격증들을 따 놓았다는 것이었다.

이게 어디에서 어떻게 쓰일지는 모르지만  일단 해보자, 의  마음으로 해 놓은 공부들을 꺼내어 쓸 시간이 온 것이다.

하지만 자격증만 있지, 아무런 자격이 없는 나는 경력직도 신입도 뭐든 다 애매한 그런 사람이었다.

예전에 하던 방송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 있었고 , 무엇보다 나에겐 두 아이가 있었다.

확실한 것은 자기 이름 석자뿐인 김해인씨는  퇴근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휴일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덕에 나는 언제나 아이와 집은 모두 내가 책임진다! 라는 마음으로 생활을 해왔다.

그런 마음 덕분에 독박육아가 훨씬 많은 날들이지만 김해인씨에게는 특별히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쩌다 함꼐 있는 날이면 오늘은 운이 좋잖아! 생각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독박육아가 기본값인 상황에 나마저 다시 방송으로 돌아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영화나 방송을 사랑한 것, 그 이상으로 아이들이 내 눈앞에서 자라나는 그 순간들이 좋았다.

그 순간들을 놓칠 자신이 없었다.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친구는 이력서를 쓸 때면 저 많은 사무실들 중 내가 앉을 의자가 하나 없겠어? 하는 마음으로 쓴다고 하던데 정말로내가 앉을 의자가 하나 없었다!

그런 나에게 우리 어머님 (김해인 씨의 엄마)이 말하셨다.

아이의 엄마로 살다가 다시 내 이름을 걸고 문을 나서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용기있는 일이라고.

실제로 우리 어머님도 김해인 씨가 중학교 입학할 때, 대학원에 진학을 하시고 일을 다시 시작하셨다. 이미 그 길을 경험한 사람이 내 옆에서 해주는 따뜻한 조언이기에 마음이 놓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나니 누군가에게는 하찮아 보이는 일이라고해도 난 기꺼이 즐겁게 할 수 있을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그리하여 의자도 없이 책상도 없이, 내 가방 하나를 들고 구내의 어린이집을 돌아다니는 일을 시작을 했다.

 본격 업무에 투입되기 전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교육을 받던 날, 내 이름과 사진이 붙은 이름표 목걸이를 목에 걸고 앉아서는 마음이 쓸데없이 비장해졌다.


난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그럼 그럼.


교육을 받다가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으러 정동길에 들어섰는데 반짝이는 햇살이 너무나 눈부셔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시 사회로 돌아왔다는 그 기쁨, 설렘, 행복.

어디에서든 꼭 일인분을 해내는 사람이 되야지, 마음 속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


나는 매일 옷을 반듯하게 다려입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두와 양말을 신고 출근을 했다.

 내 마음 가짐을 표현하는 나의 방식이었다.

사실 가끔 월급이 들어오면 마음이 흔들리는 날도 있었다.

김해인 씨의 벌이에 비하면 내 월급은 너무나 초라했던 것. 하지만 난 내가 번 돈으로 아이들과 놀러 가고 엄마를 만나 멋진 곳에서 밥도 사줄 수 있는 나의 일터가 너무나 소중했다.

그렇게 일 년 쯔음, 센터에서 면접을 보고 드디어 나도 센터로 정식 출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계약직이었지만 센터에 출근을 하고 함께 일하게 된 선생님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하던 날, 모든 날이 꿈만 같았다.

내가, 정말 다시 사회에서 내 이름을 찾게 된 것이다.

그 무렵, 김해인 씨의 일은 최고조로 바빴다.

꾸준히 중국을 오갔고 한국에 오더라도 쉴 틈 없이 바빴다.

덕분에 나는 출근을 하고 , 아직은 꼬맹이인 두 아이의 육아를 하며 , 가끔은 김해인 씨를 픽업하러 공항으로 새벽에 뛰어나가고.. 그 시절 나는 늘 뛰어다녔다.

일인분의 몫을 하며 살겠다는 나의 각오가 우습게도 난 오인분쯤의 몫을 하며 사는 기분이 들었다.

그 시절 어린이 집에 다니던 꼬맹이는 엄마는맨날 뛰어다니는 타조 같아요, 이야기를 했다.



일단 작을 일이지만 다시 사회로 나오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꼬리를 물고 나를 찾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퇴근길에 대학교 현수막에 걸린 신입생 모집요강을 보는데 갑자기 가슴에 둥둥둥 북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일을 하며 늘 갈증을 느끼고 고민하고 있던! 그 일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그 뒤로는 불판 위를 뛰는 타조처럼 뛰어야만 했다.

머리는 복잡하고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참으로 개운했던 날들이었다.

돌아보면 딱 그 시간이 내 인생 가장 감사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김해인 씨의 일은 순조로웠고, 아이들은 잘 자랐으며 부모님은 너무나 건강하셨다. 그리고 나도 나의 하루하루가 만족스러웠다.



의자와 책상도 없이 돌아다니며 일을 했던 그 때 ,첫 월급을 타던 날.

나는 제일 먼저 쇼핑몰의 나이키 매장에서 김해인 씨를 위해 최고 신상 조던 운동화를 구입했다.

한 번도 신발을 정식 매장에서 구입한 적 없이 늘 아웃렛에서 그냥 적당히 사이즈 맞춰 사는 것이 내 눈에는 어쩐지 짠하게 보였던 것이다.

자, 자기도 이제 반짞이는 최신상 조던을 신는 사람이 되어보라고! 이런 마음으로 신발을 사주었는데 김해인 씨는 새 신발이 아깝다며 신지 않았다.

그리고 신발장에 넣어놓고 쳐다보기만 일 년.

 굴비 매달아 놓고 밥 한 입, 굴비 한번 쳐다보는 자린고비같았다.

그리고 다음 해가 되니 열심히 신고 다니기 시작을 했다.

이러면 아웃렛에서 일 년 지난 상품 사는 거랑 다를 바가 없잖아!

그 뒤로 우리는 다시 신발은 꼭 아울렛에서 구입해서 신었다.

그리고 자린고비 김해인씨는 일생 최초이자 최후가 된 신상 조던 운동화를 아직도 신발장에 넣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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