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방구석에서 세상구석으로 episode1
어릴 적, 엄마는 바빴다.
아빠는 더 바빠서 아예 집에 없었다.
형제가 없는 외동딸인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페르시안 고양이 같은 성격의 외할머니와 보냈다. 할머니와 함께 있는 동안 tv는 할머니의 차지이기 때문에 나는 책을 보았다.
엄마가 강매당해 쌓아 둔 다양한 전집들이 나의 친구였다. 프뢰벨 동화책도 있었고 계몽사의 세계문학 전집도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막내 고모는 국민 서관에서 일을 했다. 그래서 나를 만날 때마다 신간 책들을 한 아름 안겨주었다. 전집과는 다른 즐거움이 있어서 고모를 만나는 날이 좋았다. 나는 그냥 읽었다. 상황에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는 성격은 지금이나 그 때나 마찬가지여서, 모두가 바빠도 나는 조용히 책을 볼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내 책들을 다 읽었을 때, 엄마와 아빠의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내용을 이해 못 하면 그냥 글자를 읽었다.
초등학교 4학년쯤의 어느 여름날, 동네 골목길에 놀러 나갔는데 너무 더워서인지 친구들이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이 없이 조용한 골목길이 어쩐지 너무 현실감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낯선 두려움이 몰려왔다.
‘내가 책의 한 페이지 속에 들어온 건 아닐까? 혹시 내가 그 책의 주인공일까?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있다면, 주인공인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이 장면을 재미있게 읽을까? ‘
혼자 남겨진 고요 속에서 그날 느낀 두려움과 호기심이 나를 ‘보는 이’를 의식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게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가 되었다. 그날부터 나는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십 대 후반에 들어서며 이런 생각했다.
‘언젠가 나는 작가가 될 테니 유명해진 후 구설수를 없애려면 연애의 끝이 깔끔해야 해.’
문어발처럼 연애를 열심히 하면서도, 헤어질 때는 최대한 깔끔하려고 애썼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며, 글보다는 카메라로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시아 영화에 대한 연작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동안, 카메라로 써 내려가는 세상이 너무 멋져서 한참 동안 글쓰기는 잊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