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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일리아트 Jul 25. 2024

사진가

[사진가의 펜으로보는 세상]

'사진'이 내게로 왔고 나는 그것에 흠뻑 빠져 들었다
적단풍 나무의 기억 1

이름 앞에 사진가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세상을 살겠다고 결정한 지 이제 40년이 넘었다. 아쉽게도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에 어떤 드라마틱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운명인 듯 그 멋있던 세상이 나에게 접근해 왔고 나는 그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너무도 쉽게 그 세계에 물씬 빠져들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무엇을 알았을까?  사진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어떤 세상이 전개될지 알기나 했을까?


'사진 작가'라는 단어가 주는 불편함이 있었다. 화가나 조각가에게는 '작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데 왜 굳이 사진 작가라고 부르는 것일까? 혹시 이 '작가'라는 말에는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 내포된 것은 아닐까. 프랑스에서 19세기 중엽 사진이 처음 발명되고 진화하는 과정에서 예술 논쟁은 끊임없이 있어 왔다. 거기에 더해 내가 사는 이 영토에서의 사진가는 이상한 굴레가 하나 더 덧씌워져 있다.


우리나라의 영화에도 사진가는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하나같이 사진가의 이미지는 바람둥이, 머리에 든 것이 전혀 없는 부류로 묘사된다. 실제로도 겉멋에 폼 잡고 카메라만 둘러 메면 멋있어 보일 것이라는 부류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타 예술 분야에 비해 탐구하고 사물과 사실에 대해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이 미흡하다. 나는 이런 사실을  여전히 인지하고 있다.


그때는 비비안 마이어라는 사진가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아니 알 수가 없었다. 훗날 그의 작품이 한국에 소개되었지만 그 작가의 사진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사진을 본 것은  영화를 통해서였다. 그 이미지들은 감동 그 자체였다.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그녀의 삶과 예술을 함께 조명한 영화였다. 영화를 볼 때 사진이 말하는 진실과 아름다운 세상,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따스함,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 비비안 마이어는  세계적인 사진가가 되었지만 그녀의 삶에 사진가가 직업인 적은 없었다. 평생 보모를 직업으로 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특유의 감성으로 세상으로 나갔다. 십오만 컷의 사진이 현상되지 않은 채로 사후 발견되었다. 비비안 마이어는 1926년생이고 2009년도에 사망했으니, 내가 시카고에서 사진을 공부할 무렵 그녀도 시카고 어디에서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걸었을 것이다. 우연히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공통점 찾기를 하는 동물이 아닌가? 평생을 고독하게 아웃 사이더 인생을 산,  보모였으나 이제는 사진가로 불리는 그녀를 존경한다.


발터 벤야민은 사진이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혁명적 예술의 한 분야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당시 사진은 현실의 재현일 뿐 예술의 영역에 있지 않았다. 그 시대의 사진은 디테일을 표현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나는 얼굴을 거울에 비추는 행위를 이제 해야 하는 시간에 도달했다. 척박한 토양에서 사진은 충분이 이용 가치가 있는 도구이다. 사진이 스터디 없이 접근하기가 용이하다는 것도 한몫했다. 디지털 세상이 열리면서 접근은 더욱 쉬워졌고 수많은 사진가가 생겨났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모른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멋있는 것을 찍어야 한다는 것은 오해의 산물이다. 독특함을 강조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사진의 진실성은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내려지는 명령을 수행하는가의 여부다. 예술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진 작가들이여, 특이한 것을 찾아다니지 말라. 옛날 영화에 나오는 사진 작가가 되지 않으려거든 스스로에게 진실하라.


사진에 섣부른 철학의 때를 묻히지 말아야 한다. 포장지로서의 철학도 이제는 그 수명을 다했다. 적어도 사진의 분야에서는. 철학은 몸의 안쪽으로 배어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진으로 존재하게 하고 이면으로 철학의 향기를 은은하게 내보내면 된다. 그것을 옷처럼 입으려 하는 것은 무지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어려운 단어로 제목을 붙이고 이상한 단어를 늘어놓는 평론가들이 많다. 그들은 그러한 글을 쓰고 사진가도 사진과 동떨어진 언어를 구사한다. 부디 사진가로 서기를. 비하의 용어인 사진 작가가 아닌 사진가가 대지에 넘쳐나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하기를 오늘도 꿈꾼다.



https://www.d-ar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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