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본명 유일형)은 청일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평양에서 1895년 1월 15일에 태어났다. 평양은 특히 피해가 심했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이 그들은 조선을 삼키려고 했다. 아버지 유기연은 아내 김기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 유일한을 미국으로 보냈다. 1905년 8월 24일 유일한이 아홉 살 되던 해, 개화파 지식인 박장현을 따라 미국으로 떠났다. 제물포를 출발한 배는 상하이, 홍콩, 하와이를 지나서 1905년 9월27일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한다. 배 안에서의 소매치기로 아버지가 여비로 준 금붙이는 일찌감치 사라졌다. 망망대해를 지나 꿈의 나라 미국에 도착했지만, 또 다른 망망대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데리고 온 박장현의 조카가 독립운동가 박용만이다. 박용만은 미국에서 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을 같이 했고, 때로는 라이벌로 지냈다. 박용만을 따라 네브라스카주 커니라는 곳에서 터프트 자매의 집에 들어가 공부와 집안일을 병행했다.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해주고 방과 식사를 제공 맏는 스쿨보이(school boy)가 된 것이다. 그의 나이 9살 때였다.
미국에 온 지 5년이 지난 1909년, 나중에 초대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이 되었던 박용만의 권유로 ‘한인 소년병학교’에 입학 한다. 이 학교는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교포들의 자금으로 세워졌다. 한인소년병학교는 헤이팅스고등학교 캠퍼스로 옮겨졌고 유일한은 헤이팅스고등학교학생이 되었다. 그는 이 학교의 미식축구 선수 주장으로 이름을 날린다. 또한 학교의 토론반 대표로, 육상선수로, 공부도 잘하는 학교의 자랑거리였다. 그의 졸업 앨범에 기록된 친구들 평가를 보면, 그는 다른 친구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외국에서의 홀로서기가 그를 강인하게 만든 것이다. 1916년 스물한 살의 유일한은 미시간대학교에 입학해서 중국 여인 호미리를 만난다. 나중에 소아과 의사가 되어 유일한의 사업에 큰 도움을 준다. 1919년 조국에서 3.1운동이 가열 차게 열리자, 미국에 모여 살고 있는 한인들은 4월 14일 필라델피아에 모여 서재필의 주도로 ‘한인자유대회’를 연다. 그는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이라는 문건을 작성하고 결의문을 낭독한다.
1926년 귀국 당시 동아일보 기사
1971년 4월 9일 유일한의 타계후 기사
그의 소년에서 청년에 이르기까지 관통하는 하나의 주관된 의식은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독립 정신이었다. 독립 정신은 개인적으로도 그를 강인하게 했다. 외적으로는 교육과 사업으로 나라를 일으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으로 발전했다. 대학을 졸업한 유일한은 미시간 중앙철도회사와 제네럴 일렉트릭회사에 입사한다. 그때 그의 눈에 사업 아이템이 들어왔다. 그는 중국요리 찹수이(chop suey)를 요리를 좋아했다. 찹수이는 각종 야채와 고기를 한데 볶아, 밥이나 국수위에 올려 먹는 음식이다. 이 푸짐한 요리는 서양인의 입맛에도 잘 맞아, 미국 대도시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찹수이에 들어가는 음식재료가 ‘숙주’이다. 숙주는 중국 음식에 많이 들어가는데 문제는 숙주가 금방 마르거나 쉬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숙주나물을 유리병에 넣어 파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러나 유리병은 깨지기 쉬웠다. 다시 밤을 새워 연구하여 내린 것은 통조림이었다. 깡통에 숙주를 넣어 파는 방법으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친구 스미스를 설득해서 1922년 라초이(La Choy)식품회사를 설립해서 4년 만에 50만 달러를 벌어 들인다.
호미리와 결혼 후 라초이의 지분을 친구 스미스에게 넘기고 25만 달러를 받아 의약품을 사가지고 고국 땅을 밟는다. 조국의 현실은 참담했다, 병으로 고통당하는 동포를 살리는 것이 독립의 한 방편이라고 생각하고 1926년 12월10일 회사를 창립한다. 종로2가에 버들 류(柳)자에 한국을 뜻하는 한(韓)자를 넣아서 만든 유한양행이다. 귀국 전 친아버지처럼 따르는 서재필에게 인사를 드렸다. 서재필은 한국인임을 잊지 말라며 기념으로 그림 한 장을 주었다. 화가인 딸 뮤리엘 제이슨의 그림인데, 잎사귀와 가지가 무성한 버드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한 그루의 버드나무처럼 끈질기고 무성하게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다.
처음에는 미국에서 가져온 약과 농기구와 염료, 페인트 등 다양한 제품을 팔았다. 돗자리 화문석 같은 것들도 규모는 작지만 수출했다. 1932년에는 신문로 2층 사옥을 짓고 창업 5년 만에 이사했다. 회사는 성장했지만, 수입에 의존하는 상품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1933년쯤 아내 호미리의 도움을 얻어 안티푸라민(Antiphlamine)을 만들었다. 대박이었다. 반대라는 뜻의 안티(anti)에 염증을 일으 킨다의 뜻인 인플레임(inflame)을 합쳐 발음하기 좋게 바꾼 말이다. 말 그대로 항염증제이다. 사람들은 안티푸라민을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했다. 손발이 트는 데는 물론, 배가 아파도 배꼽 주위에 안티푸라민을 발랐다. 졸릴 때는 눈 밑에 바르기도 했다. 감기에 걸리면 코밑에 발랐다. 국민 상비약이 된 것이다.
유일한의 냅코프로젝트를 다룬 뮤지컬(주연 유준상)
1936년 8월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심곡리에 공장을 지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자본금 50만원으로 주식회사로 발전했다. 주식회사는 기업은 개인 것이 아니며 사회와 직원의 것이라는 바탕에서 출발했다. 그는 사적으로 회사의 차도 타지 않았다. 돈을 벌면 한 푼도 속임 없이 세금을 내는 정신은 그의 철저한 윤리관과 국가관에서 기인한다. 일본의 견제가 시작되었다. 친미 인사로 분류된 유일한을 고깝게 본 것이다. 유한양행에 과한 세무조사도 진행되었다. 1938년 유일한은 로스엔 젤레스에 출장소를 만들기 위해 떠났다. 그러나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귀국할 수 없어졌다. 무엇을 할 것인가? 1942년 2월 교포들이 돈 모아 세운 맹호군에 가입해 군인이 되었다. 그는 비밀리에 준비되고 있는 냅코작전(Napko Project)에도 참여한다. 일본을 공격하기 위한 특수요원 양성과정이다. 유일한은 평양 침투조 조장으로 활약했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로스엔젤레스 건너편 산타카탈리나 섬에서 낙하산 침투, 무기 사용과 폭파 등 고도의 특수 훈련을 받았다.1993년 공개된 미국구무성의 자료에 의하면 한국요원 19명을 알파벳으로 표기했는데, ‘암호명 A’가 특수공작원 유일한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광복군을 조직해서 ‘독수리작전’을 세웠다. 소수정예 병력을 잠수함이나 비행기에 실어 한반도에 잠입시켜 시설파괴, 요인암살 등 특수작전을 수행 할 계획이었다. 1945년 8월 13일 냅코작전과 독수리작전 명령이 떨어졌지만 원폭투하와 일본천황의 항복선언으로 이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 모든 작전은 미국 전략정보국 OSS(미국 CIA 전신)에서 주관했다.
OSS에서 그는 평생의 친구 펄 벅을 만난다. 펄 벅은 중국의 정보를 분석하는 일을 맡았다. 유일한도 이곳에서 한국의 정보를 분석하는 일을 담당 했다. 아내 호미리가 중국계 미국인이 여서 펄 벅과는 쉽게 친해졌다. 한국과 중국의 정보를 분석 가공하는 이들은 이미 전우였다. 일본이 패하고 해방이 되었다. 5년 후 한국에서는 전쟁이 일어났다. 남은 것은 파괴된 건물과 전쟁고아들. 펄 벅은 한국을 찾는다. 그녀는 고아가 된 어린이와 혼혈아를 위한 복지 활동에 팔을 걷었다. 한국에서는 이름도 박진주(朴眞珠)로 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 소설을 썼다. 대한제국부터 8.15 광복 직전까지의 이야기이다. ‘살아있는 갈대’. 소설에는 그는 한국을 ‘진주 같은 나라’, 한국인을 ‘숭고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갈대처럼 다시 일어나는 민족, 그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 ‘김 유일한’이다. 두 사람 우정의 깊이를 짐작케 한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이 소유한 소사구 공장 터 1만평을 무상으로 팔 벅에게 기증해서 전쟁 혼혈아동을 위한 ‘소사 희망원’을 짓도록 한다.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브랜드 앞에서 유일한
이승만 정권에서 정치자금의 상납을 요구 받았지만 끝내 거절하여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지만 오히려 털어도 먼지하나 나지 않는 기업으로 인정받아 성실납세자로 포상을 받은 회사 유한양행. 이 회사의 바닥에는 이런 나라에 대한 의식이 녹아있다. 그는 죽을 때도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일찍이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해서 영업사원이 회사 경영을 맡는다. 이런 회사가 우리나라에 있다니 놀랍다.
님 웨일즈는 우리에게 불멸의 혁명가 김산을 소개했다. 펄 벅은 유일한을 통해 우리민족에게 자부심을 일깨워 주었다. 김산과 유일한, 빛나는 그들의 삶 속에 금발의 두 여인이 있었다.
[브랜드의 문화사 ⑧] '아리랑'의 김산과 '유한양행'의 유일한, 그리고 님 웨일즈와 펄벅2 < 브랜드의 문화사 < 칼럼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