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의 믿음과 정은 점점 사라지고, 타인과 공동체를 배려하는 마음도 약해지고 있다. 평화와 번영에 대한 낙관 대신 체념과 비관이 점차 자리 잡고 있다. 전쟁과 같은 현실 속에서, 우리는 암울한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45년 간 여성에 천착해 온 대표적 여성주의 미술가 윤석남의 근래 작품을 통해 그 희망을 찾아보자.
그의 작품 <1,025: 사람과 사람 없이>(2008)는 작업에 5년이나 걸린 장기 프로젝트였다. 작가는 2004년 이애신 할머니가 유기견 1,025마리를 보살피고 있다는 일간지 기사를 읽고 인간에 대한 실망과 존경심이 동시에 들었다. 현장을 찾아가서 할머니와 유기견들을 만난 후 작업을 시작했다. 5년 동안 외부 활동을 접고 1,025마리의 나무 개를 조각했다. 처음에는 동물이 형상화가 잘 안 되어 개를 그렸는데 토끼 같기도 할 정도로 어려웠다. 그래서 2년 동안 개에 대한 책을 보고 드로잉을 하면서 형태를 익힌 다음, 3년 동안 나무 작업을 했다. 작업을 하면서 양가적(兩價的) 감정(인간에 대한 혐오감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동시에 들었는데 사랑에 더 힘을 싣는 마음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한 마리도 같은 형태가 없이 서로 다른 개 무리가 주는 인상은 강력하다. 1,025마리의 유기견들은 자신을 버린 사람들(관람자)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응시의 대상이 개가 아닌 사람으로 바뀌는 전시 공간에 서면 비윤리적 인간성에 절망을 느끼게 되지만, 그 강아지들을 보살피는 할머니의 존재에서 희망을 찾는다. 작가는 동물을 모티프로 했으나 여전히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버린 것도 사람이고 그것을 품는 것도 사람임은 ‘사람과(with people)’, ‘사람 없이(without people)’라는 제목에서 잘 드러난다. 인간의 폭력을 아프게 형상화한 작품이면서, 동시에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생명을 돌보는 인간애를 보여준다.
남성 중심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여성은 역사 속에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도 않고 남성들처럼 초상화로도 남겨지지 못했다. 윤석남은 역사 속 여성들의 초상화, 설치 작품, 드로잉 등을 통해 허난설헌, 이매창, 김만덕,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 등의 여성사를 복원함으로써 작가가 만드는 느슨한 연대가 현대의 여성에게로 이어져 더 견고해지기를 바랐다.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2015)는 한국 최초의 여성 상인인 김만덕(1739-1812)이 주제이다. 제주도에 대기근이 닥쳐 굶어 죽어 가던 제주도민들을 위해 재산을 팔아 구휼미를 제공했던 조선의 거상 김만덕을 기리는 작품은 거대한 핑크빛 심장 형상이다. 김만덕의 커다란 심장은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리는 핑크빛 인간애로 가득 차 있다.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린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2021)에는 여성 독립운동가 14인(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옥련, 남자현,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안경신, 이화림, 정정화, 정칠성)의 대형 채색 초상화가 전시되었다. 윤석남은 소설가 김이경과의 협업을 통해 초상화를 제작했다. 일제 강점기 구국을 위한 항일운동에 투신한 여성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억도 자취도 없이 잊혔고, 독립운동사에도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윤석남은 초상화에서 여성 독립운동가 14인의 얼굴과 독립운동 방식을 알려주는 상황 묘사, 단서를 통해 각자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최초의 여성 비행사였던 권기옥(1901-1988)은 비행기를 배경으로 파일럿 복장을 하고 서 있고,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리며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던 김명시 장군(1907-1949)의 초상은 말을 탄 독립군 형상이 함께하고 있다. 눈을 통해 내면의 기운을 전달하는 윤석남은 형형하고 강렬한 눈 묘사로 강인했던 그들의 삶과 정신을 표현한다. 망국의 시기에 구국운동에 헌신하면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복원된 여성사의 한 자락으로 과거에서 돌아와 현재로 당당히 이어진다.
작가 한강은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스웨덴 한림원 강연에서 자신이 여덟 살 때 쓴 시로 강연을 시작하고 마쳤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윤석남 미술의 힘은 무엇인가.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돌보는 모성, 느슨하지만 견고한 연대 의식은 윤석남의 작품에서 비록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으나, 그 본질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담은 휴머니즘이다. 그는 인간성에 대한 믿음을 작품에 담아 관람자에게 전달하고 이것은 작가와 관람자를 연결하는 ‘금실’이 되어 생명의 빛을 파종한다. 그리하여 인간애로 이어지는 세상은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다.
[저항하는 예술 ⑩] 인간애와 연대 의식 – 윤석남의 페미니즘 미술 < 미술일반 < 미술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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