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선생이 명륜동 관어당에서 물고기를 바라보는 모습 사진 : 장욱진미술문화재단
장욱진(1917-1990)은 한국의 전통적인 미를 순수하고 단순하게 표현한 화가이다. 평생 그림만 생각하며 살았던 작가는 가족과 주변 풍경을 주로 그렸다. 자신의 주변 일상을 통하여 삶의 본질을 보여준다. 작고, 사랑스럽고, 동심 가득한 순수의 세계이다. 서양화를 기반으로 동양적 정신과 형태가 가미된 그의 그림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림 속 풍경의 주제이자 삶의 근거지였던 명륜동을 중심으로 작가 삶의 흔적을 따라가본다.
그는 명륜동 2가 22-2번지에 자신의 집을 마련한다.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로 근무하게 되면서 근처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1953년 명륜동에 정착한 이후 1986년 용인으로 이사하기까지 가족들의 생활공간이자 삶의 근거지였다. 심플한 삶을 추구한 그에게 집은 곧 자신의 세계였다. 화가는 번잡한 환경을 싫어했다. 주변이 번잡해지고 타성에 젖는다 싶으면 화실을 옮겨 다니며 작업하였다. 명륜동 삶은 단순했다. 그림 그리거나 아니면 집 근처 단골 술집에 들러 안주 없이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는 것이다. 휴식이 끝날 때까지 반복하곤 했다. 현재 명륜동 집터는 혜화 역 근처에 있어 번화한 상업지역이다. 그가 살았던 집은 3층짜리 상가건물로 변해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건물 앞에 장욱진이 살았던 집터라는 표지석 하나 없다. 상가건물 옆으로 오래된 한옥한채가 있어 작가가 거주할 당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명륜동에 정착한 후 부인 이순경 여사는 혜화동 로터리에 동양서림을 운영하며 1977년까지 가정생활을 책임진다. 부인 덕분에 작가는 생활에 대한 부담 없이 그림 작업에만 평생 전념할 수 있었다. 동양서림은 지금도 그 때 그 자리에 있다. 함께 일하던 관리인이 넘겨받아 현재 2대째 운영 중이다.
3층 상가 건물로 변한 장욱진 명륜동 집터
장욱진 부인 이순경여사가 1953-77년까지 운영한 동양서림
명륜동에 거주할 때 장욱진은 새벽마다 명륜동에서 성북동까지 산책을 즐겼다. 그의 산책길 따라 한국미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들과 교류한 발자취를 만날 수 있다. 장욱진은 해방 후 1945년부터 1947까지 국립박물관에 근무한다. 그는 개성고분, 경주호우총 등 발굴작업에 참여하였다. 이 시기 고분, 불상, 목가구, 고전회화 등을 접하며 전통미술품을 익히는 중요한 기회가 된다. 그의 작품 전반에는 전통적인 색상, 소재, 동양적인 정신 등이 담겨있다. 비록 2년이라는 짧은 기간 근무했지만 전통예술에 대한 안목을 높이고 사랑하게 되는 시간이었음이 짐작된다. 이때 최순우, 김원룡을 박물관 동료로 만나게 된다. 최순우는 장욱진과 박물관 근무시절 이후에도 계속 교류하며 1970년대에는 생활도자기의 유행과 함께 도화 작업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실제 분청자기 윤광조 작가를 소개하여 함께 작업한 도화 작품을 남겼다. 김원룡은 2.9 동인전에 출품된 <새와 나무>를 보고 한눈에 반하여 그 당시 한달 월급인 2만환을 주고 구매한다. 작품거래가 거의 되지 않는 시기 장욱진 작품을 알아본 안목 있는 미술사학자가 아니었나 싶다.
장욱진, 새와나무, 1961, 캔버스에 유채, 2.9동인전 출품작으로 미술사가 김원룡이 구입한 작품
현대화랑 전시(1979년)에서는 동료였던 두사람이 화집평을 썼다. 최순우는 “장욱진을 철학자도 시인도 아니지만(……) 간절하고도 맑은 시심과 예술에 대한 신념을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국립박물관 당시 동료였던 김원룡은 “언제 보나 순진무구하고 그림 이외에는 완전 무능해서 두손에서 붓만 빼앗으면 그 자리에 앉은 채 빳빳하게 굶어 죽을 사람 같다. 타고난 예술가라고 다시한번 감탄한다”는 평을 남겼다. 그림밖에 몰랐던 화가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성북동에는 1930년대 지어진 튼 ㅁ자 구조의 아름다운 한옥 최순우 옛집이 있다. 이 집은 최순우가 1976년 이사 와서 작고할 때까지 거주했던 공간이다. 그는 미술사학자이자 개성부립박물관장을 지낸 고유섭을 통해 한국미의 아름다움을 처음 배우게 된다. 한국의 미를 “구수한 큰 맛”, “무기교의 기교” 라 정의한 분이다. 고유섭은 경성제대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후 조선탑파연구, 규장각회화연구 등을 통해 한국미술사의 기틀을 잡는다. 최순우는 개성 박물관에 근무하며 고유섭을 통해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학습한다. 그리고 해방이후 서울에 있는 국립박물관으로 이동한다. 국립중앙박물관장까지 오른 그는 최순우 옛집 사랑채에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하였다.
해곡 최순우 선생의 생전 모습.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최순우 옛집에서 성북동 성곽 길 따라 좀더 올라가면 김용준이 살았던 노시산방이 있다. 김용준은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재직하며 동양주의, 동양정신에 대한 방향을 제시한 작가이자 미술사가이다. 이후 김환기, 장욱진으로 서울대 미대 교수직이 이어지며 동양주의 정신이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하게 된다. 장욱진은 향토적이고 전통적인 소재를 가지고 자신만의 동심 어린 화풍을 만들어간다. 초기엔 전통적 소재들을 단순화, 기호화하고 압축적으로 보여주는데 치중한다. 후기로 갈 수록 인간과 자연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통해 핵심 즉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성북동에는 김환기의 수향산방을 비롯 삼선교 부근에는 이쾌대가 운영한 성북동회화연구소도 있었다. 물방울 작가 김창렬을 비롯 권진규, 전뢰진, 조덕환 등이 그 때의 제자들이다. 성북동을 거쳐간 미술사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인물들 면면을 살펴보면 해방이후 성북동은 근현대미술의 길을 여는 새벽 같은 길이었다.
[길 위의 미술관 – 장욱진 ①] 장욱진의 새벽 산책길 명륜동에서 성북동을 걷다 < 답사 < 아트체험 < 기사본문 - 데일리아트 Daily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