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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흘러간다

나의 세상은 멈춰있을지라도

11월 받은 법무부 문자로 언니의 수용 소식을 듣고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는데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어느덧 꽃 봉오리가 보인다. 나의 충격도 너무 심해서 겨울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고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초봄의 날씨처럼 선선하니 노곤노곤 나도 많이 녹아든 것 같다.


아파트 단지는 봄을 맞이하기 위해 가지치기를 하고 주말 낮에는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공원에 나와 피크닉을 즐긴다. 이제 곧 벚꽃도 필 것이다.


나는 처음보다 많이 안정을 찾았다.

슬픔은 그대로지만 많이 차분해졌고 예민한 것도 아주 약간은 줄었다. 정신건강의학과의 약물 치료와 심리 상담의 도움으로 많은 것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묵묵히 옆에 있어준 남자친구와 항상 함께 움직여준 이모의 도움도 정말 컸다.


심리 상담을 받고 나서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던 30년이 넘은 옛날이야기부터 현재까지 모든 상황을 다 이야기하는 게 마음이 너무 힘들고 고생스러웠지만 모두 꺼내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정리를 해보니 아주 약간은 마음도 정리가 되는 것 같다. 태어났을 때부터 몇 살 때는 이런 일이 있었고 이런 마음이었지, 몇 살 때는 이런 일이 있었지, 그때 내 기분은 어땠지, 하나하나 정리를 하니 정리된 공간에 여유가 생겼다. 마음도 약간 차분해지면서 결론적으로는 편안해지는 것 같다.


벌써 5회 차 상담이 끝났고 나는 4~5회 차에 걸쳐서야 내 이야기를 마쳤다. 앞으로 어떤 솔루션을 주실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하여 조금은 알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상담사님께서 오늘 나의 장점을 물어보셨는데 나는 그냥 살아남았다는 것, 그게 장점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나의 장점을 물어보셨는데 나의 어떤 특징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이런 환경에서도 살아남았다는 것이 내 장점이다.라고 말한 것이 약간 맥락이 안 맞는 것 같았지만 그냥 그때는 그게 나의 가장 큰 장점이 맞는 것 같았다. '이랬는데도 살아남았네?' 뭐 이런 강인함을 어필했던 걸까? 잘 모르겠다.


상담 센터를 나와 집 돌아오는 길엔 바람이 선선하니 기분 좋게 불고 있었고 세상이 약간 다르게 느껴졌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내 삶의 모든 것을 다 토해냄으로써 내가 그 상황에서도 잘 버텨내 줬다는 사실과 그래도 그나마 잘 성장했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알아줬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을 느끼는 듯 나는 사뿐사뿐 걸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홀가분하다는 건 아니다. 여전히 나는 불안과 걱정이 많아서 갈 길이 멀다. 하나하나 천천히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많이 갖고 정리하고 노력하면 나는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마음의 여유공간을 더 찾을 것이다. 결국에는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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