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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희 Oct 26. 2020

개방형 오타쿠의 시대

오타쿠 오덕후 덕후


엘피판 수집을 취미생활로 삼은 지 어느덧 4년 차다. 4년 전만 해도 엘피는 단순한 유행에 불과했다. 복고 열풍이 불어올 때면 아날로그 감성이니, 뭐니 해서 이목을 끌다가 결국엔 별똥별처럼 반짝하고 사라지는 매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이 매력적인 아날로그 매체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듯 그 열기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엘피의 판매량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엘피 생산을 중단 한지 13년 만에 생산 공장을 재가동하기에 이르렀다. 인기 있는 아티스트들의 엘피가 단시간에 동나버려 품절사태를 일으키는 현상은 일상다반사. 초를 다투는 경쟁에서 승리한 자만이 원하는 엘피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사양산업이었던 엘피가 이처럼 갑작스레 부상하게 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이제부터 그 이유를 필자의 면도날 같은 예리한 직감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우선적으로 오타쿠가 상당수 증가했다. 이들은 현재 오덕후 혹은 덕후라고도 불리는데 예전에는 흡사 닌자처럼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고 다녔기에 쉽사리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자신의 주변을 쓰윽 둘러보거나 인터넷을 잠깐만 쓰윽 훑어봐도 오타쿠들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다. 어림잡아 다섯 명 중 한 명은 오타쿠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통계청 따르면 2020년 대한민국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당신은 오타쿠입니까?"라는 질문에 "매우 그렇다"라고 대답한 성인남녀의 비율이 지난 5년간 가파른 상승세를 보여온 끝에 현재는 무려 전 국민의 70%에 육박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라는 건 지금 막 지어낸 이야기지만,

대형 피규어숍의 등장, 코스프레팀 창설, 연예인 지하철 전광판 광고 등만 보더라도 오타쿠들은 확연히 증가했고 계속해서 늘어가는 추세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폐쇄적이었던 이전의 오타쿠들과는 달리 지금은 '개방형 오타쿠'의 시대. 더 이상 오타쿠란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과감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진보적인 시대가 도래했다. '시대가 도래했다'라는 표현보다는 '오타쿠가 진화했다'라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국의 은둔형 오타쿠들은 어찌하여 개방형 오타쿠로 진화할 수 있었을까. 이제부터 오타쿠의 진화 과정을 필자의 고양이 발톱 같은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꿰뚫어 보고자 한다.


북극곰을 예로 들어보자. 북반구 대륙에 살고 있던 다양한 종류의 곰들이 먹이를 찾아 북극으로 이동 > 빙하로 가득한 북극에서 보호색으로 인해 하얀 곰들이 발군의 사냥 능력을 표출하기 시작함 > 하얀 곰 생존율 상승 > 북극곰으로 진화.


다음은 한국의 오타쿠를 예로 들어보자. 방구석에 은둔해 있던 다양한 오타쿠들이 인터넷상으로 이동 > 빌보드를 장악한 BTS로 인해 용기를 얻은 오타쿠들이 당당히 자신을 표출하기 시작함 > 오타쿠 생존율 상승 > 개방형 오타쿠로 진화(웃자고 해본 이야기입니다. 하하하...죄송).


어두운 음지에서 쓸쓸히 칩거 중이던 한국의 오타쿠들을 양지바른 곳으로 이끌어낸 원동력은 단연코 한국 문화의 발전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세련되고 감각적인 KPOP이 있다. KPOP으로부터 양산된 오타쿠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소수 특정 분야의 오타쿠들도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이제는 락밴드를, 재즈를, 인디음악을, 아이돌을, 애니메이션을, 영화를, 독서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타쿠라는 대명사 아래 집결하여 "분야나 장르 따위가 중요한가? 오타쿠는 다 같은 오타쿠지, 허허"라며 상대방을 존중해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이 트로트를 좋아한다고 신기하게 쳐다보지도 않고, 중년의 아줌마나 아저씨가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해서 조롱을 당하거나 멸시받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시대에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인간은 거듭해서 진화하고 있고 인류의 문명도 그에 맞춰 발전하고 있다. 다양한 인간들이 늘어남에 따라 즐길 거리 역시 다양해지고 있다. 무언가를 '즐긴다'라는 의미를 단순한 놀이로 치부해선 곤란하다. 어쩌면 그것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인 행복에 가까워지는 일. 고된 삶의 여정을 웃으며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한줄기의 빛일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개성적이길 원하고 자유롭길 원하고 행복하길 원한다면 오타쿠들을 주목하자.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다가오는 인류의 미래를 주도적으로 이끄어나갈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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