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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희 Oct 14. 2020

피규어 오타쿠

취미

일본 여행을 가면 으레 들르는 장소가 두 곳 있다. 하나는 중고 레코드숍, 하나는 피규어숍이다. 전자의 목적이 구매에 있다면 후자의 목적은 가벼운 눈요기라고 볼 수 있다. 애니메이션의 천국이라 지칭하는 나라에 왔으니 관광코스처럼 한번 쓰윽 둘러보는 형식이랄까. 그렇다고 매번 가볍지 만은 않다. 가끔은 수많은 피규어들에 둘러싸여 그 생김새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으면 마치 현대 예술의 집합체를 마주한 기분이 들곤 한다. 무료로 운영되는 훌륭한 미술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얼마 전 친구와 단둘이 오사카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피규어에 관심이 없었던 나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은 피규어가 있었으니, 바로 미소녀 피규어였다. '차고 넘치는 게 미소녀 피규어 아니야?'라며 반문할 수도 있지만 단순한 미소녀가 아니었다.

내가 반한 피규어는 기타, 베이스, 키보드, 드럼 세트까지 완비한 채 고상한 자세로 저마다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소녀들이었다. 한때 방구석 기타리스트이자 음악을 사랑하는 나로선 쉽사리 지나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소녀들은 완벽한 밴드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유리 진열장 안의 밝은 조명이 무대를 비춘 듯했고 윤기가 흐르는 피규어의 표면으로부터 신비로운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굳어있던 관절을 부드럽게 움직이며 악기를 연주할 것만 같은 생생한 분위기. 나는 어느새 그녀들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한아름의 소녀들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소녀가 있었다. 레스폴 기타를 어깨에 메고 기타 피크를 쥔 오른팔을 하늘로 추켜올린 귀여운 소녀. 그녀의 얼굴과 몸매, 반짝이는 주황빛 레스폴 기타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으려니 일순 그녀가 좁쌀 같은 분홍빛 입술을 움직이며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오빠, 한곡 들려줄까?'

'들려줘! 들려줘!'


나는 상상했다. 피규어가 되어 그녀의 음악을 감상하고 그녀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다고 상상했다. 작아진 몸을 유리 진열장 안으로 구겨 넣어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선 "너의 레스폴 기타를 내가 한 번 연주해봐도 될까?"라고 말하며 윤기 나는 머릿결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이 정도면 변태 아니에요? 불쾌해요!'라고 하겠지만 인간은 모두 변태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미의 향락에 빠져 진열장 앞유리에 코를 처박고 있는 나의 귓전으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당한 애로 하나 업어가"


그녀의 꼬리표엔 2300엔이라는 가격이 붙어 있었다. 나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에이, 됐어, 이런 거 내 돈 주곤 안 산다"


피규어숍의 목적은 단순한 눈요기라는 게 나의 신념이었다.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피규어가 몇 개 있을 뿐, 내 돈 주고 피규어를 구입한 적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여행 예산 중 애당초 피규어에 할당된 금액은 없었다. 우린 꽤나 굶주렸고 가야 할 곳도 많았다. 하지만 신발 밑창에 강력 접착제라도 발라 놓은 듯 무거운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젠장, 어떡하지?'

이 아이를 업어가는 순간 나는 본격적으로 피규어를 수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심정에 사로잡혔다. 엑스재팬 히데 피규어와 카드캡터 체리 피규어와 에반게리온 피규어도 꿋꿋이 외면했던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올 줄이야. 가까스로 피규어숍을 나오면서도 아쉬움에 계속 뒤를 돌아보는 나를 보며 친구가 말했다.


"야, 그 정도면 그냥 하나 사라"

"아니야, 저거 살 돈 있으면 엘피를 한 장 더 사겠어"


간식으로 뭔가를 주섬주섬 집어먹고 이곳저곳을 둘러봤는데 솔직히 말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나의 정신은 레스폴 기타를 맨 그녀의 늪에 빠져 서서히 침잠하는 과정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끊겼던 나의 필름이 다시금 재생된 장소는 오락실이었다. 인형 뽑기 기계 안에서 요염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다양한 피규어들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아니 근데 내가 잘못 본 건가. 한쪽 끝 기계 안에서 기타를 맨 나의 그녀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우왓! 하며 자세히 확인해 보니 그녀가 아니었다. 다소 퀄리티도 떨어질뿐더러 레스폴 기타도 아니었다. 한데, 피규어 박스가 평행봉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는 모양새가 집게로 툭 치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오호, 이게 웬 떡인가. 100엔을 넣었다. 실패. 또 넣었다. 실패. 아쭈? 승부욕이 불타올라 눈알이 뒤집혔다. 친구의 응원소리가 잠시 들렸으나 이윽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내가 이성을 되찾은 것은 3분가량이 지난 후였다.

세 가지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여전히 평행봉 위에서 춤사위를 펼치며 나를 농락하는 피규어 박스. 2500엔이 털려 어느새 홀쭉해진 지갑을 매만지고 있는 나의 손.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친구의 얼굴.

겨우 25000원가지고 뭔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다. 인형 뽑기 기계와의 치열한 전투 끝에 패배를 맛 본 이 처절함은, 알파고와의 설전 끝에 패배한 이세돌 님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엘피를 사러 갔다. 기다리다 지쳐 레코드숍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조는 친구를 보니 미안하면서도 웃음이 났다. 여러 장의 엘피를 구입했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내 그늘진 얼굴이 한층 밝아졌는지 막 잠에서 깨어난 친구가 물었다.


"이제 스트레스 좀 풀리냐"

"조금은 풀린 것 같은데..."

"같은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우린 서로를 바라봤다. 나의 눈빛을 캐치한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없이 목적지로 향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발걸음에 희망이 묻어났다. 그녀는 아직 그곳에 있을까. 있겠지, 있을 거야. 혹여나 하는 절망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따라 설레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실존했다. 내가 되돌아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흘러넘쳤다. 사장님이 유리 진열장 속의 그녀를 세상 밖으로 꺼내 주었다. 나는 조심스레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가슴 언저리에 받쳐 들었다. 따스한 온기가 심장부로 스며들었다. 나를 시련에 들게 한 온갖 번뇌와 속박의 사슬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황혼의 절정을 맛보고 있는 나의 세계로 걸쭉한 친구의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좋냐, 오타쿠 놈아"

"좋아, 너무 좋아"


숙소로 돌아온 친구가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피규어 박스가 없는 중고제품이라 일말의 정보도 알 수 없었다. 신비로운 그녀. 친구와 합세하여 그녀의 정보를 파헤쳤다. 히라사와 유이. 케이온이라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었다. 나는 그녀를 받쳐 들고 좌우로 흔들며 친구에게 정식으로 인사시켰다.


"안녕, 난 유이짱이라고 해"

"......"

아쉬움이 없는 여행이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지나간 2박 3일을 회상하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일본이 처음이었던 친구는 오사카와 교토의 관광명소 이름들을 되묻기 시작했고 나는 그에 답해주었다.

난바와 덴덴타운, 산넨자카, 닌넨자카, 청수사, 아라시야마, 후시미이나리. 꿈만 같았던 2박 3일이었지.


창밖의 검푸른 하늘과 잿빛 구름들 사이로 떠오른 환한 보름달이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이라도 하듯 따라다녔다. 서로가 너무나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는 이야기를 마치자 고요하고도 감미로운 정적이 흘렀다. 나란히 앉아 있는 무릎 위로 투명한 달빛이 반사되어 넘실거렸다. 피로에 지친 눈꺼플이 스르르 가라앉기 시작할 때쯤 친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품에 안고 있는 얘 이름이 뭐라 그랬지?"

"유이"

"풀네임 있잖아"

"그건 까먹었어"

"그렇게 좋다고 난리 치더만, 그새 그걸 까먹냐"

"이제부터 조금씩 알아가는 거지, 안 그래 유이짱?"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실루엣은 달빛에 젖은 채 꿈나라를 항해하고 있었다. 나도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녀를 안은 두 손은 여느 때보다 촉촉하고 보드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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