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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희 Oct 10. 2020

가고시마 에피소드 3

여행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가고시마다. 사실은 몸이 지친 것도, 가고시마가 질려버린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가고시마 3부작의 순도 높은 완벽성을 위한, 치밀하고도 섬세한 계획하에 짜인 각본이었다(아무도 놀라지 않는군). 사실 이런 종잡을 수 없는 글을 쓴 뒤, 험상궂게 생긴 편집자님으로부터 "아니, 허접하기 짝이 없는 글솜씨로 독자를 농락하려 들다니요, 당신은 함량 미달인 작가인 동시에 염치없는 인간입니다"라고 한소리 듣고는 놀이터 모래밭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작문이란 무엇인가'라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라는 건 방금 막 지어낸 이야기다.

단지 최근 산책을 하면서 '색다른 방식으로 신선한 글을 써볼 순 없을까' 하고 궁리한 끝에 이어질 듯 말 듯 이상야릇한 세 꼭지의 글을 써보기로 작정한 것이다(절대 독자님들을 기만하려는 의도는 없었으니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 모든 책임은 에피소드 시리즈란 형식으로 전 세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간 스타워즈 감독 '조지 루카스'에게 있다고 말하고 싶다(정확하게는 '나탈리 포트만' 누나에게 있다).

사랑해요 누나

<가고시마 에피소드 3>를 집필하기에 앞서 전편에도 언급했지만 '가고시마 여행기를 써볼까' 하고 마음먹었을 때 좌뇌와 우뇌 사이를 번갯불처럼 갈라놓으며 떠오른 명소가 있었으니, 바로 '센간엔'이라는 정원이다.

센간엔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에도시대에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현 서반부)의 19대 영주 '시마즈 미쓰히사'가 1658년에 건축한 정원으로 그 용도는 시마즈 일가의 별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서론에서 쓸데없이 힘을 빼버리면 지칠 우려가 있으니 이쯤에서 본격적으로 <가고시마 에피소드 3>, 그 대단원의 막을 올려보기로 한다.


이자카야촌에서 두툼한 돼지 혓바닥과 진한 키스를 나눈 다음날 아침, 우리는 규동(소고기 덮밥)으로 배를 채우고 텐몬칸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아케이드형 상가가 밀집된 형태의 텐몬칸은 가고시마 시내의 최대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데, 평일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었다. 넓은 거리에 현지인들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나를 비롯하여 뚱뚱이와 홀쭉이, 달랑 셋뿐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한산했다(친구들이 그리 뚱뚱하지도 홀쭉하지도 않지만 편의상 나눠 부르기로 한다).

규동은 역시 요시노야

상점들은 간밤에 굳게 닫혀있던 셔터문을 하나둘씩 걷어 올렸다. 아침 햇살이 반짝이는 거리 위로 갖가지 상품들이 진열되기 시작했고 어디선가 이름 모를 잔잔한 팝송이 흘러들었다. 선선한 가을 아침에 어울릴 법한 음악의 진원지는 중고 레코드점이었다.

고양이가 생선을 지나칠 순 없지. 나는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친구들을 끌고 레코드점으로 들어갔다.

"아주 잠깐만 보고 가자, 잠깐이면 돼"


혹여나 건질만한 LP판이 있는지 스윽 둘러봤다. 마츠다 세이코 누나와 나카모리 아키나 누나의 요염한 눈빛에 홀려 판을 뒤적거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친구놈들은 이미 밖으로 나가 갈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특히나 뚱뚱이는 지금 당장 그 레코드점에서 나오지 않으면 너를 갈아 마셔버리겠다는 살벌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레코드점을 나와 편의점으로 향했다.


우리는 각각 한 손에 물병을 하나씩 들고 텐몬칸 거리를 유유자적 거닐었다. 인형 뽑기도 하고, 오락실 구경도 하고, 제법 근사한 도넛 가게 안쪽 테이블에 앉아 야끼 도넛을 게걸스럽게 먹기도 했다. 시간이 제법 흘렀을까. 텐몬칸 거리의 높고 기다란 아치형 천장으로부터 정오의 부드러운 햇살이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다음 일정을 확실히 하기 위해 친구들에게 물었다. 사실 심심하던 찰나 장난을 치고 싶었다.


"센간엔이라는 일본식 정원에 갈래, 아니면 고래상어가 헤엄치는 수족관에 갈래?"

"너는 어디 가고 싶은데?"

"나는 아무 데나 상관없어, 너네가 정해봐"

(사실 수족관은 1%도 갈 생각이 없었다)


친구들은 마치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이분법의 세계에서 고뇌하는 햄릿처럼 망설였다. 나는 그들 뒤에서 숨죽여 킥킥대고 있었다. 마침내 결론을 내린 듯 홀쭉이가 물었다. "수족관으로 갈까?"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 연기하며 "흠, 수족관보단 센간엔이 낫지 않겠어?"라고 답했다. 그러자 뚱뚱이가 "왜? 센간엔이 나은 게 뭔데?" 라며 내게 시선을 던졌고, 홀쭉이마저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양 입술을 떼었다.


"사실 수족관은 작년에 부모님이랑 갔다 왔거든, 한마디로 우리의 선택지는 센간엔뿐이다! 가자, 센간엔으로!"


광기에 사로 잡힌 친구들은 그럼 애초에 네가 정하지 그랬냐느니, 똘아이 새끼라느니, 양아치 새끼라느니,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들을 양어깨 너머로 퍼부었다. 장난 몇 번 더 쳤다가는 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어찌 됐든 뭘 해도 즐거운 순간순간이었다. 지저귀는 새들이 같이 놀자는 듯 우리 곁을 맴돌았고, 자유로이 유영하는 구름들이 시샘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여행의 기운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 마음을 부여잡고 우린 센간엔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시내를 크게 한 바퀴 도는가 싶더니, 어느새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차창 너머로 햇살을 타고 물결치는 청록의 나뭇잎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버스 내부로 산뜻한 숲의 향기가 스며들어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아음~ 기분 좋아, 얼마나 걸리려나"

버스의 노선도를 보니 시로야마 호텔을 순환하는 버스인 듯 싶었다. 시로야마 호텔은 해발 108M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가고시마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높은 곳에 있으니 사쿠라지마(앞서 말한 활화산)를 감상하기에도 최적의 장소이다. 여행객들의 말에 따르면, 시로야마 호텔의 시원하게 트인 노천탕에서 사쿠라지마를 감상하며 온천하는 기분이 그야말로 환상적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비싸다는 것이다(비싸다는 것은 항상 문제다). 물론 당일 온천도 가능하지만, 경치 좋고 물 좋은 곳일수록 여유롭게 신선놀음을 해줘야 제맛이라는 게 온천여행에 대한 나의 신념이다. 그런 이유로 언젠가 이 글이 책으로 출판된다면 그 인세를 긁어 모아 시로야마 호텔을 잡아볼까, 하는데..(평생 못 갈듯 싶다).

아따 경치 좋네 (출처: 시로야마 호텔 공식 홈페이지)

버스는 시로야마 호텔 정거장을 찍고는 다시 빙글빙글 내리막을 달리기 시작했다. 음탕한 친구놈이 SNS를 켜서는 가고시마를 여행 중인 예쁜 처자들의 사진을 뒤적거렸다. 나름 뚱뚱이의 취미생활이었다. 옆에 앉은 나는 "적당히 좀 해라, 이 변태 새끼야" 라며 경멸감을 드러냈지만, 본능적으로 족제비 같은 눈을 하고는 힐끗힐끗 뚱뚱이의 핸드폰을 흘겨봤다. 대부분이 9등신으로 비현실적인 얼굴에 비현실적인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어느새 뒷자리에 앉은 홀쭉이도 "뭐야, 뭐야"하고 우리의 양어깨 사이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우리는 환상 동화 속으로 굴러 떨어진 어린아이들 마냥 스마트폰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양심의 손을 얹고 맹세하건대, 두 놈의 주목적은 아리따운 처자였겠지만 적어도 나의 주목적은 가고시마의 아름다운 경치와 다양한 여행정보였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주목적).


여하튼 무엇을 봤든 간에 찌질한 남자 셋이 "오!, 오! 오!"라며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낼 법한 소리로 흥분하고 있는 사이, 버스의 모든 창문으로 새하얀 빛들이 쏟아져 들어와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가까스로 실눈을 떠 차창밖을 내다보니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해안선을 따라 오른편으로 짙푸른 바다가 출렁이기 시작하더니 먼 곳 한가운데 한 폭의 그림 같은 가고시마의 명물, 사쿠라지마가 위엄한 자태를 드러냈다. 숨이 멎을 듯한 절경에 "우왓! 사쿠라지마다" 라며 탄성을 내질렀다. 쩍 벌린 입을 다물 새도 없이 "센간엔 마에(앞)"라는 버스 안내양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센간엔이 이런 환상적인 장소에 있을 줄이야.

애석하게도 센간엔 앞에서 찍은 사진이 없다. 내부사진으로 대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새로운 세계에 처음 발을 내디딘 기분이었다. 하늘이고, 햇살이고, 바람이고, 모든 만물이 한데 어우러져 내 온몸의 세포를 자극했다. 이토록 훌륭한 날씨에 쓸데없는 미사여구 따윌 갖다 붙일 순 없지만 그래도 굳이 표현하자면, 영롱한 보름달에 미쳐서 "아우~" 하고 울부짖으며 변신하는 늑대인간처럼, 금방이라도 날갯죽지에서 하얀 두 날개가 솓아나 천상으로부터 일직선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한 계단씩 지르밟으며 승천하는 천사가 될 것만 같은 날씨라고 하고 싶다.


나는 두 팔을 벌려 제자리를 한 바퀴 빙 돌며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오른편에는 푸른 바다와 사쿠라지마가, 왼편에는 울창한 숲 아래로 센간엔의 입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뚱뚱이와 홀쭉이도 감탄사를 연발하며 넋이 나간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내가 한껏 들뜬 마음에

"난 이대로 버스를 타고 돌아간다고 해도 좋아, 이미 센간엔의 절정을 맛 본 기분이야"라고 말하자

"그래, 넌 그대로 버스를 타고 돌아가"라며 홀쭉이가 답했고

"그래, 제발 좀"하고 뚱뚱이가 덧붙였다.


사악한 것들.


센간엔 내부에는 특별하다고 할만한 건 없었다. 으레 일본식 정원들이 그러하듯, 깔끔하게 손질된 나무들과 푸른 잔디와 기와지붕을 얹은 목조 건물들과 각양각색의 잉어들이 노니는 크고 작은 연못들이 있었다. 다만 다른 정원들과의 차이점이라면 울타리 너머에 있는 사쿠라지마가, 마치 내 속눈썹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처럼 시야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 어느 곳을 바라보든 한 폭의 명화 같은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5,000 평이나 되는 넓은 부지 구석구석을 파헤치다 보니, 센간엔의 끝자락으로 보이는 낮은 언덕이 멀찌감치 보였다. 푸른 잔디에 나무 벤치가 두어 개쯤 놓여있는 휑한 장소였다.

"굳이 저곳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기왕 온 김에 다 돌아보자"

센간엔에서 경치가 가장 훌륭한 낮은 언덕

그곳은 센간엔에서 가장 훌륭한 경치를 자랑하는 장소였다. 센간엔의 눈이자 심장이었다. 마치 천상에서 다소 따분했던 대천사 가브리엘이 하늘 아래로 고개를 슬쩍 내밀고는 마법의 가루를 솔솔 뿌려 만들어낸 지상낙원 같았다. 우린 그 언덕에서 20분가량을 머무르며 몇십 장의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울타리 너머로 펼쳐진 무지갯빛 바다가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순수함을 간직한 눈동자처럼 맑은 푸른 하늘. 그 속에 새겨진 솜사탕 같은 흰 구름들. 나란 존재도 위대한 자연의 자그마한 한 조각일 뿐이었다.

미친 날씨


이쯤에서 길고 길었던 가고시마 여행기,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 한다.

센간엔을 다녀온 후로, 여행이란 날씨의 영향이 막대하다는 것을 느꼈다.

일본 곳곳에 수없이 널려 있는 정원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바다가, 흐린 날에 보면 음침하기 짝이 없을 우뚝 솟은 활화산이, 마치 동화 속 신비한 풍경처럼 나의 뇌리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완벽한 날씨 덕분이었다.

하지만 여행에 있어서 내게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은 함께하는 것이다. 좋은 날씨에, 좋은 사람과 함께.


날씨가 좋고, 함께하는 사람이 좋다면, 나의 여행은 완벽성을 띠게 된다. 그곳이 가고시마던 어디던.


그래도 기왕이면 가고싶은 가고시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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