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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희 Jan 09. 2021

책 제목의 중요성

나의 책들은 팔리지 않았다. 내 방 한편에 케케묵은 먼지를 입에 문 채 겹겹이 쌓여있다. 아직도 독자의 손길을 애원하는 듯한 안쓰러운 눈빛의 녀석들. 주기적으로 책 표지에 쌓인 먼지를 털어낼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내 책은 왜 팔리지 않은 걸까. 하지만 매번 생각해도 도무지 해답을 찾을 수 없어 분노하고 좌절하고 신음하다 끝내는 절망의 늪 속으로 침잠해버렸다, 는 것은 거짓말이고, 당연하다는 듯이 실패의 원인들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래, 당연한 결과였어. 내 책이 잘 팔렸다면 세계 7대 불가사의 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을 테지.

나는 실패의 원인들을 하나둘씩 처내며 그중에서도 개선 가능한 단 한 가지 이유만을 꼽아보기로 했다. 내 책의 문제는 무엇일까. 판매량을 높일 수 있는 최선책은 무엇일까. 단순했다. 그건 책의 제목이었다. 나는 다짐했다. 언젠가 또다시 책을 출간하게 된다면(출판 업계의 질을 다시 한번 더럽히게 될까 봐 송구스럽지만), 독자의 동공에 태풍을 불러일으킬만한 제목을 지으리라!!!


이름은 중요하다. 책의 제목에서부터 시작하여 노래의 제목, 반려 동물의 이름, 심지어 베란다 한편에 키우는 화분에 이르기 까지. 이름은 그 사물의 본질을 가늠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로 작동하고, 모든 사물들은 어떤 이름을 부여받는가에 따라 각기 다른 생명력을 얻기도 한다. 책과 같은 경우엔 제목이 곧 판매량과 직결된다. 물론 다양한 변수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독자들이 가장 먼저 인식하게 되는 것은 책의 제목일 수밖에 없다.

다소 엉뚱한 비유일지도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 헤르만 헤세의 고전 명작 중 하나인 '데미안'이란 제목이 '김춘삼'이었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지금과 같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 어쩌면 한국에서 가장 팔리지 않는 고전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간혹 외국인 두어 명쯤이 '오우, 춘삼킴! 멋진 이름이예열'하며 개명을 하는 바람에 매스컴을 타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고전 '김춘삼'은 주목받기 힘들 것으로 사료된다. 물론, 나야 구입해서 읽을 것이다. 뜬금없지만 차인표 형님 팬이다(어렸을 때 드라마 '왕초'를 워낙 재밌게 봐서).

이름이 중요한 예시를 들자면 '시가렛 애프터 섹스'라는 미국 밴드를 빼놓을 수가 없다. 내 스타일로 번역하자면 '섹스 후 담배 한 모금'정도 되는 이 그룹은 현재 우리나라 팬들에게 '섹후땡'으로 불리고 있다(작명 센스에 감탄을 금치 못함). 나는 언젠가 엘피판 구입을 위해 웹서핑을 하던 중 우연히 이 밴드의 이름을 발견하곤 일순 당황하여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허허, 이런 발칙하고도 센스 있는 이름 좀 보소'

물론 노골적인 이름을 가진 밴드가 없었던 건 아니다. 가장 유명하다고 볼 수 있는 펑크록의 대부 '섹스 피스톨즈'가 있었고 그들을 동경하여 만든 '섹스 머신 건즈'라는 일본 밴드도 있었다. 하지만 '시가렛 애프터 섹스'라는 이름은 실로 이마를 탁 치게 만드는 안드로메다급 작명 센스가 아닌가. 위트 있고 담대하면서도 한편으론 퇴폐의 궁극을 보여주려는 듯한 자극적인 이름. 그들의 밴드명은 마치 "우리가 어떤 음악을 들려줄지 궁금해 미치겠지? 지금 당장 들어보지 않고는 못 배길걸"하며 나와 같이 순진무구한 청년(믿어 주세요)을 조롱하는 듯한 이름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발견한 즉시 그들의 음악을 찾아들었다. 그리곤 끝내 섹후땡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역시나 이름을 잘 지어야 한다.


이름이 중요한 걸 알면서도 나는 여태껏 내가 쓴 책의 제목을 대충 지어 왔다. 세탁기 속에 빨랫감 던져 넣듯 휘리릭 지어버린 후 글의 마무리 작업에 집중하곤 했는데,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제목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글의 내용이야!'


좋은 제목을 짓는다 한들 글의 퀄리티가 제목을 뛰어넘지 못하면 결국은 독자를 기만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 왔다. 다른 독자들처럼 나 또한 제목과 유명세에 낚여 피땀 같은 돈과 시간을 날린 경험이 허다했다. 그럴 땐 분노가 극에 달하여 책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후 인터넷에 접속하여 악성 댓글을 당연히 남기진 않고(같은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으로서 좀 못된 짓 같으니), 친한 친구를 불러내 "자, 선물이야, 나랑은 잘 안 맞는 책 같아서"라며 인심 쓰듯 건네준다.

여하튼, 나는 제목으로 골 머리를 썩히며 시간을 낭비할 바에 나의 부족한 글들을 조금이라도 더 다듬고 보완하고 싶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음악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오로지 글로 평가받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다 생각했고, 그 신념은 여전히 변함없다.


앞서 얘기했던 예시들을 역으로 생각해보자. 만약 데미안이란 제목이 김춘삼이었다면, 정말 읽히지 않는 고전이 되었을까. 밴드명이 시가렛 애프터 섹스가 아닌 시가렛 애프터 밀(meal) 혹은 푸드(food)였다면 그들의 음악은 외면당했을까.

이름이 암만 중요하다 해도 본질을 앞서 갈 수는 없다. 데미안이 사랑받는 고전 명작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은 글 속에 녹아있는 철학적인 성찰에 기인한 것이고, 다소 자극적인 '시가렛 애프터 섹스'라는 이름이 '거참, 이름 잘 지었군' 하며 감탄하게 되는 것은 감각적인 가사와 신비스럽고 몽환적인 그들의 음악성에 기인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데미안이라는 책은 역사 속으로 조용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을 게다. 또한 시가렛 애프터 섹스는 지금 쯤 텍사스 변두리 한 구석에서 사람들의 비웃음과 경멸의 눈초리를 받으며 해체를 눈 앞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름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름이 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실존은 본질에 앞서고(사르트르), 본질은 이름에 앞선다(한관희). 그런 이유로 언제 또 책을 출간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나는 제목에 연연하지 않을 예정이다. 중요한 건 역시나 책 속에 담길 글이니까.


이 글을 브런치에 올릴 예정인데, 문제는... 왠지 모르게 이런 댓글이 달릴 것만 같다.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작가님, 이 정도 작문 실력이면 제목이라도 잘 지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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