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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류 Dec 18. 2023

영어 울렁증

얼마 전 봤던  영화 < 서울의 봄>에서,  심각하고 긴박했던 흐름에서 잠깐 실소를 했던 장면이 있었다.

국방부 장관이 미 대사관으로 피신 후, 대사관 직원들이 괜찮냐는 질문에

" 아임 파인 땡큐. 앤유 " ( I'm fine, thank you, and you? )로 자동적으로 치고 나오는 대사에서 실소가 터졌었다. 자동 응답기 버튼처럼, 우리 머릿속에는 "how are you?" 다음엔 항상 자연스럽게 되받아 치는 "I'm fine , thank you, and you? " 가 각인되어 있으니, 아마 함께 웃었던 관객들은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녔던 동년배들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요즘은 뱃속에서부터 영어 공부를 시킨다고도 할 정도로 영어 교육은 태어남과 동시에 이미 시작이 되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그전에 우리 세대엔, 정말 중학교 1학년 1학기 첫 수업에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했고,

대문자 소문자 필기체 쓰는 법도 배웠으며 ,  Hello, Good morning, Good afternoon, Good night 이런 인사법부터 , My name is John. 과 같은 자기소개 문장부터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요즘과 같이 한 건물에 수어개의 영어학원이 즐비했던 시절도 아니었고, 영어는 단지 "대학입학"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 필수 과목 중의 하나였으니, 말을 유창하게 하는 것보다 영어 문법, 단어를 외우고 문장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공부 집중적으로  해야만 했다.


나 또한  중학교 처음 입학했을 때 접했던 영어란 생소한 언어를 단지 '시험'을 치는 과목 중 하나로 생각하고 시험 기간만 되면 영어 교과서를 통째로 달달 외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 " 하우 아 유?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이런 영어 대화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 있는 거겠지. 외웠던 문장 이외에는 응용할 수 없는 단순 주입식 암기의 언어였던 것이었다. 그러니 학교를 다닐 때나 졸업 이후나 사회에 나가서, 가끔 길거리에서라도 마주치는 외국인들을 보면 눈도 못 마주치고 피하기 일쑤였고 행여 말이나 걸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멀뚱히 쳐다만 봐야 했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요즘 흔하게 있는 어학연수란 것을 그때 당시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 덕분인지 한때는 영어권 사람을 만나거나 여행을 할 때도 자신 있게 얘기를 했고. 어느 정도 소통이 된다고 나름 자부하며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점점 영어의 사용 빈도가 줄어들면서 자연히 세월에 묻혀 녹이 슬어 버리고 있는 듯했다.


영어 울렁증

얼마 전 회사 회식 자리에 외국 주재원 임원분이 초대되어 오셨었다. 그분은 터키에서 오셨는데 한국사람과 결혼을 얼마 전에 해서, 어느 정도 한국말 듣기는 가능했고 간단한 단어는 주고받는 건 가능했지만, 긴 대화를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영어를 써야 했던 분이었다.


그 초대 손님을 본 순간 나는 이미 일부러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고, 굳이 대화를 할 필요가 있을까, 인사정도만 주고받고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회식 자리이다 보니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자리도 바꿔가며 앉아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자연히 나 또한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 외국인 주재원 임원분 옆에 앉게 된 게 아닌가. 우선 인사부터 했다. 중학교 영어책을 달달 외웠던 정말 기본적이고 심플한 자기소개를 막힘 없이 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던 듯하다. 그 뒤로 하고 싶은 말들은 머릿속에만 그려져 튀어나오는 말은 아주 단순한 단어 한두 개 정도, 그리고 나머진 한국말, 콩글리쉬, 그리고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아 부끄럽고 민망한 대화...

이 순간을 어찌 모면을 하나...

왜 나는 여기 앉아서 꿀 먹은 벙어리 마냥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있어야 하나...

나름 한때는 영어도 잘한다고 자부하고 지냈던 그 시절 나는 어디 갔는가...


이런 멋쩍은 침묵의 시간 속에 다행히도 나의 맞은편에 그나마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는 분이 앉으셔서 나의 대화를 거들어 주셨다.


민망했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내 모습.

그래도 그 자리가 회식자리였으니 망정이지, 업무적으로나 만났다면 나는 아마 사시나무 떨듯 주저앉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영화의 장면이 바로 나였음을, 내가 비록 실소를 터트렸지만, 막상 나 또한 누군가의 실소를 터지게 했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언어란 것도 주기적으로 꾸준히 갈고닦아 줘야 함을,

녹이 슬기 전에, 기름칠을 꾸준히 해 줘야 함을, 새삼 깨달았던 저녁이었다.


아... 영어엔 기름칠 대신 버터칠을 해야겠구나.  

오늘부터라도 다시 영어 단어를 외워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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