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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성 Apr 17. 2022

가끔은 이민이 가고 싶은 이유

직진과 우회 사이의 고민.


    이따금 해외에 눌러앉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다만 해외여행도 제대로 가본 적도 없는 인물이라, 단순한 외국에 대한 동경이 그 이유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가 미국일지, 일본일지, 유럽일지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나마 영어는 조금 할 줄 아니까 영어권 국가가 나으려나, 정도로 살짝 씹어보고 뱉은 정도. 마냥 막연한 떠올림이지만 그것이 언젠가 심각한 고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도 겹친다. 어떤 계기가 나타난다면 언제든 주저 않고 떠날 채비를 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어릴 때는 나만의 캐릭터를 열심히 키우는 컴퓨터 게임을 즐겨했다. 캐릭터를 키우다 보면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았다. 외모도 꾸며야 하고, 힘도 세야 하고, 명성도 있어야 하고. 그렇게 캐릭터에게 물심양면 힘을 쓰다가 어느 순간 열심히 키우던 캐릭터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레벨을 높이고 보니 생각보다 맘에 안 든다던지, 능력치를 잘못 배분해 힘이 약하게 되었다던지. 그러면 정든 마음을 꾹 누르고 '캐릭터 삭제' 버튼을 눌러 다른 캐릭터를 생성하곤 했다.


초등학생의 어린 나이였지만 캐릭터를 지우고 다시 만들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삶도 이렇게 쉽게 없애고, 만들고, 뚝딱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깊게 들어버린 정이 아깝지만, 여태까지 들인 노력이 아깝지만, 그래도 어쩌겠어. 없애고 기어이 다시 만드는 것이 낫다면야. '리셋' 하는 것이 낫다면야. 물론 게임 캐릭터는 무거운 의미를 가지지 않으니 '계속하는 것'과 '다시 하는 것' 각각의 가치를 계산하고 저울질하는 것이 쉬웠겠지만, 가끔은 실제 삶도 그 계산이 쉬울 때가 있다. '이 정도면 다시 태어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도 이 정도면 살만 하네.'


나에게 이민이란 그런 의미를 가진다. 리셋.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나의 가치를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나에게 가진 선입견이 없는 상태에서. 그리고 제일 좋은 것은 나의 가치가 색다른 외부 환경에 의해 새롭게 매겨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 언어의 벽만 어떻게 허물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나 능력들을 인정해줄 어딘가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곳에서는 이미 정해진 학력이, 이미 정해진 외모가, 이미 정해진 수저의 색이 모두 나를 묶는 쇠사슬이 되었다. 그것들이 조이고 있는 나의 발목이 이미 검붉게 달아오르며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아쉬운 것이 많은 생이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계산하며, 저울질하며 살고 있다. 나의 미래 가능성을 믿는 게 나을까, 현재를 도피하고 새로운 현실을 맞이하는 것이 나을까. 내가 꿈꾸는 이상향이 있다면 그곳으로 직진만 해서 다다를 수 있을지, 다른 길로 돌아가야 할지.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길은 당장 나를 가로막고 있는 오르막길 덕에 그 너머가 보이지 않는다. 오르막길 다음에 내리막길이 있을지, 아니면 아예 지나갈 수 없게끔 하는 커다란 벽이 있을지, 나를 포기하게 할 정도의 허들이 있을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거쳐온 길을 뒤돌아보자니 대략 알겠다. 적어도 직진하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는 않을 것이란 걸.


요즘 같이 고민과 걱정이 더욱 부각되는 시기에는 그 생각에 담기는 진지함이 커지곤 한다. 오늘은 낮잠도 자고 커피도 많이 마셨으니, 침대에서 밤잠 설치며 고민하겠지. '아, 이민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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