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경 Jul 12. 2020

겁쟁이 엄마의 '날카로운 첫 출산의 추억'

"알지? 힘들면 수술해도 된다는 거"


출산을 앞두고 병원으로 향하는 길.

남편은 긴장 반 설렘 반,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자기 딴은 나를 편안하게 이끌어주려 한 말이건만

아기를 낳기도 전에 수술 얘기부터 하는 것이

나는 영 마뜩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자연 분만해야지..."




나는 처음 해보는 일을 접할 때

대부분 치밀하게 계획하기보다는 겪어보면서 알아가는 스타일이다.

그전까지는 일단 판단하지 않고

왠지 잘될 것 같은 설렘만을 가슴 가득 담아놓곤 한다.


7년 전, 첫 출산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4년 만의 반가운 임신이었지만

출산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준비는 머릿속 상상에 맡기고

나는 그저 즐겁고 행복한 임신기간을 보내기 위한

'먹고 놀기'에 골몰했다.

아이가 지낼 방은

우리 집이 아닌, 시댁에 따로 꾸며놓은 상태였고

어머니가 아이를 봐주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걸 믿고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나보다 먼저 엄마가 된 주변인들이 

출산의 고통에 대한 자신들경험담을 전할 때면,


"우리 집안 여자들이 골반은 좁은데,

 보는 거랑 다르게 애들을 그렇게 잘 낳거든요.

엄마는 큰 언니랑 를 집에서 낳았고,

큰언니는 조카 낳을 때 형부가 잠깐 화장실 간 사이 순식간에 낳았어요.

저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라며 성공적 출산에 대한 호언장담을 늘어놓곤 했다.




무엇보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임신한 기간이 꽤나 행복했다.

초기 입덧을 제외하고는 내내 입맛이 좋았고, 

'아기가 먹고 싶어서'라는 든든한 핑곗거리가 있어 마음 놓고 즐겼다.



툭 튀어나온 뱃살이 음식 때문인지 임신 때문인지 알 길이 없으니

일부러 배에 힘을 주지 않아도 돼서 편했고

피부마저 더 촉촉해진 느낌이었다.

물론 잘 때마다 똑바로 누울 수 없는 것,

일어날 때 기지개를 켜면 어김없이 다리에 쥐가 나서

발끝을 하늘로 치켜세우고 기지개를 켜야 하는 등의 불편도 겪었지만 뭐 그래도 괜찮았다.

몸도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고, 아파서 병원에 갈 일도 없었다.


'아마도 나는 임신 체질인가 보다'라는 생각에

출산 예정일 당일에는 사는 곳에서 2시간가량 떨어진

속초에 놀러 가

설악산 비룡폭포길에 오르기까지 했다.

"아기 잘 낳으려면 많이 걸어야 돼"라면서.

비록 무릎이 아파 반절까지만 올라갔다 내려왔지만 말이다.

그러다 혹시 그 시간에 아이가 나오기라도 하어쩌려고 그랬냐고?

그땐 가까운 병원에 가서 낳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다행히 느긋한 우리 아이는 예정일보다 일주일, 정확히는 8일이 지난 새벽이 돼서야

이제는 바깥세상을 만나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뱃속에서 '~' 소리가 나며

마치 물풍선이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이게 말로만 듣던 양수가 터지는 느낌이구나!'


낮에 속이 안 좋아 병원에 들렀을 때만 해도,

의사가 내진을 한 후, 아직 한참 남은 것 같다고 말했는데 양수가 먼저 터져버린 거다.

아마 자궁문이 열리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뱃속에서는 무언가 출산을 위한 작업이 바삐 진행되고 있었나 보다.




병원에 가면서 말은 안 했지만, 남편 역시 긴장한 느낌이 역력했다.

본인도 별다른 준비 없이 아빠가 될 상황에 놓였으니 말이다.

우리는 그 흔한 라마즈 호흡법 한 번 연습한 적 없이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래선지 남편은 언제든 힘들면 수술을 하라고 강조했다.


병원에 도착한 후, 조금씩 불안함이 밀려왔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무지의 늪 속에 있던 나는, 나름대로 견딜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새벽이 지나 아침이 찾아올 무렵, 나의 불안함은 조금씩 가중됐고

남편은 나를 위해 음악을 틀어준 후 좌불안석,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시간이 더 흘러 진통의 강도가 높아질 때쯤,

남편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스스로에 무력감을 느끼며

결국, 장모님을 부르자고 제안했다.

나는 엄마 앞에서 아플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남편의 계속되는 간곡한 설득에 '정말 괜찮을까' 반신반의하며 동의하고 말았다.

엄마는 곧장 병원에 달려왔고 내 모습을 걱정스레 지켜봤다.


엄마가 있다는 걸 의식하자

나는 보여주기 싫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강한 힘이 내 몸을 움켜쥐듯 하는 고통이 밀려왔다.

나는 생전 처음 겪는 아픔에 어쩔 줄을 몰랐다. 너무 당황스럽고, 무섭고 불안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이제 나에게 누워있으라고 했다.

조금이라도 덜 아픈 자세로 견디고 싶은데

아픈 배를 움켜쥐고 똑바로 누워있어야 한다는 건

나에게 또 다른 불안과 공포를 가져왔다.




내진 후 의사는 자궁문이 열리는 속도가 더디고 아이 머리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극도의 불안 상태였고, 엄마와 남편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같은 시각 그곳에 있던 의료진들은

놀랄 만큼 평온해 보였다.

당시에 나는 한 공간 안의 감정의 온도차까지는

미처 느끼지 못했다.

그들보다는 나와 아기에 더 집중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생생히 기억나는 감정은 있다. 바로 수치심이었다.

밑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환자복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배출되는 내 몸의 배설물들,

이따금의 내진은 나에게 굴욕적 감정을 일깨우기 충분했다.


그동안 TV에서 보여줬던 출산의 과정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절제하고 생략했던가.


불안해하는 나를 보며 3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의사는

"엄마가 강해야지. 왜 그래?"라고 무안을 줬다.

그 말을 듣고 더 버텨보려는 순간, 내 귀를 의심할만한 천사의 소리가 들렸다.

백의의 천사, 간호사의 환상적인 속삭임이었다.

그건 바로 자궁문이 3~4센티미터가량 열리면

무통주사라는 걸 맞고 통증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들은 친정 엄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혹시나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이 있을 수 있으니 좀 더 견뎌보자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달 전 태어난 작은 언니의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MRI를 찍고 병원 신세를 지

엄마가 가장 가까이에서 아프게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겐 너무 절박하던 그때,

나는 듣고 싶은 얘기에 귀를 더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무통 맞아야죠. 애보다 내 마누라가 더 중요해!"

라는 남편의 한마디에

나는 등에 주삿바늘을 꽂고 무통 천국에 입성했다. 할렐루야.




고통은 급격히 줄었지만

무통주사를 맞자, 출산 진행은 더욱 더뎌졌다.

자궁 문도 더 이상 열리지 않았고 여전히 아이의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백의의 천사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느 정도 지나면 무통주사는 빼고 아이를 낳아야 합니다"

"네? 이 상태에서 낳을 순 없는 건가요?"

"네, 좀 있다 주사 뺄 거고요. 아까 겪은 진통보다 훨씬, 몇 배는 아파야지 애가 나와요"


아니, 지금 이 천국에서 곧장 지옥행을 하라니.

거꾸로 가라면 몰라도 이미 천국 맛을 봤는데,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랴.

나의 아픔에는 조금도 공감하지 않고,

그리도 쉽게만 얘기하는 간호사가 야속하기만 했다.




누가 세상의 모든 엄마는 강하다고 했던가.

겁쟁이 엄마는 진정 나뿐이란 말인가.

나는 어느새 의사를 붙잡고 내 머리와 가슴이 시키는 대로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서, 선생님..... 수술시켜 주세요"

새벽 2시경 병원에 왔는데, 어느덧 시간은 오후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엄마가 강해야 한다며 자연분만의 의지를 불태우던 의사도,

나의 두려움에 전염이 되었는지 아니면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건지

아직도 아이의 정수리가 보이지 않는다며 결국은 나와 남편의 요구를 들어줬다.


"수술합시다"


'휴.... 살았다'


정말이지,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산부인과 인턴 떼가 몰려와 동물원 원숭이를 보는 것 마냥 나를 둘러싸고 출산 과정을 지켜봐도.

10월 말의 수술실이 추워 온 몸이 덜덜 떨려도.

뱃속에서 아이를 꺼낸 후 태반을 제거하던 간호사들이 깔깔 거리며 즐겁게 수다를 떨어도.


난 그저, 이제는 살았다 싶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완전히 사로잡혀

아이의 세상 밖 첫 모험의 기회를 박탈시킨 나.

사람들에겐 그간 호언장담했던 자연분만에 실패한 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둘러댔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겁이 나서 더 버티지 못했다는 걸 이제야 고백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강한 엄마들 틈바구니에서

"다 이루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나는

그때까진 정말 몰랐다.


내 뱃가죽에 남은 지렁이만한 영광의 흉터를 가르고

또다시 두 명의 아이가 더, 자궁 밖으로 행군하게 될지는.


아.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선택이 됐든, 확실한 건

지금처럼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할 거란 사실이다.




사진출처: https://m.blog.naver.com/soorimi76/221038725763, https://m.blog.naver.com/ardeur00/220232202032, https://youaremom.co.kr/babies/discover-the-pain-of-childbirth-for-mothers/


작가의 이전글 가진 건 없어도 자존감은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