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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소 씨 Aug 31. 2022

낙원에서 (2)



 그렇게 우리는 무작정 홍대에 있다는 지하클럽을 찾아가게 되었어요. 친구 녀석과 처음 가본 홍대는... 서울에 그런 곳이 있었다니.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케 하는 파격적이고 무질서한 분위기에 우린 잔뜩 움츠러들어 눈알만 굴리고 있는데 어떤 누나들이 말을 걸더라고요. 너네 혹시 공연 보러왔니? 예? 어떻게 아셨어요? 교복 입고 인중에 솜털 거뭇한 애들이 홍대에서 두리번거리면 뻔하지, 우리도 가는 길이니까 같이 가자. 홍대는 의외로 친절한 곳이었어요. 저와 친구는 누나들을 따라갔어요. 그렸다기보다는 갈겨놓은 듯한 그래피티가 그려진 골목길을 지나 젊은 취객들과 토사물 자국을 피해 클럽에 도착했는데 아... 진짜 소돔과 고모라는 거기였어요.


 일단 입구에서 삼천 원을 내라길래 냈더니 맥주병을 쥐여주더라고요. 그때는 미성년자에게 술 파는 가게들이 꽤 있던 시절이긴 하지만 그래도 교복을 입었는데... 입구를 지나니 수십 명이 동시에 피워대는 담배 연기가 지옥불 유황 연기처럼 자욱하게 퍼져나가고 중세 유럽의 지하 감옥으로 가는 길처럼 생긴 원형 계단에는 북아메리카 체로키족을 연상케하는 양 갈래머리에 인디언 머리띠를 들쓴 누나들이 맥주병을 들고 나른한 표정으로 음악 소리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어요. 누나들을 거쳐 들어가니 쿵탕쿵탕 숨넘어갈 듯 빠른 비트에 폭음에 가까운 기타 소리가 울부짖고 있었고 머리카락을 노랑, 핑크 등 형광계열로 염색하고 닭벼슬처럼 삐죽하게 세운 형들이 모이 쪼는 닭처럼 머리를 주억이고 있었어요. 한쪽에선 싸움이 난 것 같았어요. 막 서로 밀치더라고요. 알고 봤더니 그건 싸움이 아니라 슬램이라고 해서 서로의 어깨를 부딪치며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이랬어요. 아, 목덜미부터 손목까지 문신을 길게 그린 사람도 봤는데 그건 진짜 무서웠어요. 저는 문신한 사람을 그때 처음 본 거였거든요. 지금이야 한 몸에 성모마리아, 관음보살, 벨제붑 같은 악마를 동시에 새기기도 하며 종교 대통합을 넘어 천계와 마계의 화합까지 희구하는 평화의 상징으로 타투가 전혀 이질적인 게 아닌 시대지만, 그때는 문신을 한다는 게 육백 년 넘게 이어져 온 신체발부 수지부모의 사상을 가장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로 인식되던 시대였으니까 저는 처음 본 문신이 정말 놀랍고 무서웠단 말이죠. 그러면서도 제가 그간 살아왔던 세계,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지루한 세계에서 탈출해 새로운 세계에 도달한 것 같은 희열이 느껴지는 거예요.


 펑크가 유행하던 시절이었어요. 아무래도 한국인의 정서에는 미국식 로큰롤은, 좀 느끼하죠. IMF로 흉흉한 세간과 밀레니엄이 다가오고 있다는 세기말적 분위기도 펑크가 유행하는 데 한몫했던 것 같아요. 3코드 진행에 단순한 멜로디, 거기에 세태를 비판하는 가사를 시처럼 붙여 노래와 울부짖음의 경계가 모호한 음악을 만들던 인디 밴드들이 ‘조선 펑크’라고 불리며 인기를 끌었어요. 그날 봤던 밴드요? 무려... 우는 불알, ‘크라잉넛’이었어요. 알죠? 대한민국에 크라잉넛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문제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펑크 밴드 하면 크라잉넛을 위시한 서너 개 밴드밖에 떠오르지 않는다는 거지만.., 아무튼, 그때의 크라잉넛은 아주 앳된 소년에 가까운 청년들이었어요. 거의 박박 밀다시피한 스포츠머리에 노랗게 염색을 하고 땀을 흘리며,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연주하고 노래하는데, 저와 친구는 그들의 에너지에 완전히 녹아들어 형님 누님들의 무서운 복색도 잊고 소돔과 고모라적 정취도 다 잊고 어느새 무리에 섞여 노래를 부르고 슬램을 하고 있더라고요. ‘다 죽자’라는 노래 아시나요? ‘여기, 지금, 우리, 모두, 다 죽자!’ 하는 노래인데 그걸 크라잉넛의 연주에 맞춰 힘껏 외치면요, 되려 살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아나요. 이게 음악이구나. 이게 예술이 가진 힘이구나. 그때 저는 생각했어요. 나, 이런 세계에서 살고 싶다.

 공연이 끝난 뒤, 저와 친구는 집에 가지 않고 클럽 앞에 쪼그려 앉아 기다렸어요. 어차피 막차도 끊겼고, 저는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을 배워야 했으니까요. 새벽을 지나 박명이 슬며시 들었을 즈음, 밴드맨들이 허리에 묶은 체인을 철렁이며 약간 취한 걸음으로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어요. 저는 냉큼 달려가서 그중 한 명을 붙들고 말했죠. 저기... 혀... 형님! 혹시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을 칠 줄 아시나요! 어 그럼 알지. 뭐, 드럼? 기타? 기... 기타요! 그러자 다른 형이 말했어요. 아, 그 곡은 간단해. 여기 여기를 짚어. 그리고 갈겨. 그다음엔 여기 여기... 갈겨. 그렇지! 역시 외모만 무서워 보이지 알고 보면 다들 친절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어요. 제 인생이 저를 갖은 모양의 고초로 저를 갈기기 시작한 게.

 

*


 악기를 연주하는 건 노래를 듣는 것과 또 다른 희열이 있었어요. 저는 손가락밖에 움직인 게 없는데, 제 몸의 모든 부분을 통해 소리가 흘러나오는 느낌.


*

  

 줄 없는 기타를 들고 주말에 미군 부대를 간 적이 있어요. 거기 휴게실에 앰프와 드럼이 있는데 주말에는 아무나 와서 연주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주뼛거리며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미군들이 연주를 하고 있었어요. 하필이면...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을! 연주하는 걸 구경하며 구석에서 기타를 퉁기고 있는데 그들이 말을 걸어오더라고요. 물론 저는 하와요 도잉... 과 스...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그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더랬죠.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우뚝 다가서서는 갑자기 거대한 손바닥으로, 저는 멋대로 들어와서 한 대 얻어맞는 줄 알았는데, 제 머리통을 쓰다듬었어요. 그리고 무어라 말을 했는데 아마도 같이하자는 말 같았어요. 저는 아임 노 잉글리시... 아임 노 기타... 라고 말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줄이 온전한 여분의 기타를 쥐여주며 저를 일으켜 세웠고 느닷없이 드럼을 쳤어요. 타둥둥 타둥둥 타둥두 탓! 예, 맞아요.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의 인트로. 깜짝 놀라서 기타를 갈겼고, 그렇게 시작한 첫 합주는 독주와는 또 다른 희열이 있었어요. 각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두둥실 떠올라 공중에서 섞이며 거대해지는 느낌. 공간을 가득 채우는 실재적 부피감.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원, 투, 쓰리, 쾅! 박자와 음정이 딱 맞는 순간마다 느껴지는 짜릿한 쾌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마구 솟아서 아주 곤란했던 기억이에요.

 역시 미군들이라 그런지 체력이 장난 아니더라고요. 손에 피가 나는 줄도 모른 채 몇 시간의 연주를 끝내고 다리를 후들거리며 집으로 돌아갔죠. 저는 그 뒤로 매주 미군 부대에 가게 되었죠. 그렇게 이 년쯤 지나 스무 살이 되던 해의 어느 날, 홍대에 가서 밴드 오디션을 봤어요. 실력은 없지만 의욕만큼은 충천했던 어떤 펑크 밴드의 기타 포지션에 합격을 했고, 그들과 어울리며 저는 뮤지션의 길을 걷겠다는 진로를 확정하고 집을 나왔어요. 아버지도 그즈음 사라지셨고요.


*

 

 얼마 전에 커트 코베인이 무대에서 박살 낸 기타를 보관하고 있던 딸이 경매에 올렸는데 6천만 원에 팔렸대요. 파괴를 통한 창조경제라는 게 이런 건가요? 제가 경제 이런 걸 잘 몰라서요.


*

 

 그때부터 낙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곡을 쓰거나 합주를 하거나. 이미 뮤지션인 거 아니냐고요? 아뇨 아뇨, 제가 바란 건 ‘프로’ 뮤지션이었고,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그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느냐 아니냐 라는 아주 거대하고 선명한 경계가 있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다른 일을 해야만 했던 저는 꿈을 이룬 상태가 아니었던 거죠. 그냥 꿈을 가진 상태였던 거지. 그래도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낙원 생활도 즐거웠어요. 아까도 말했듯이 그때는 거기가 아주 활기 넘쳤으니까. 가끔 바람을 쐬러 건물 옥상에 올라가곤 했는데, 광대버섯 군락처럼 알록달록한 파라솔들이 빼곡히 피어 있고 그 아래로 새로 산 악기를 들고 신이 난 사람들과 돼지국밥과 함께 들이켠 막걸리에 취해 광대처럼 웃는 사람들을 보는 게 좋았어요. 밤낮으로 일하고 연습하는 동안 제가 했던 노력들이 차곡차곡 적립되고 언젠간 만기가 되어 인출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예감에 힘든 줄도 몰랐다니까요.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적립 가능한 노력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것을.

 그렇게 몇 년을 지냈어요. 몇 개의 밴드를 거쳤고, 중간에 군 복무도 무사히 마쳤고, 몇십 개의 자작곡이 생겼고... 저는 ‘프로’ 뮤지션이라는 꿈에 조금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특히 마지막에 결성한 밴드가 잘됐어요. 몇천 명씩 모이는 록 페스티벌에서 공연한 적도 여러 번 있고요, 연습실과 숙식을 제공해 준다는 기획사도 생겼죠. 한 방에 다섯 명이 칼잠을 자야 했지만 나름 의리 끈끈해져서 좋았고 또... 홍대 거리를 걷다 보면 우리를 알아보며 꺅 소리를 수줍게 내는 여자애들도 가끔 있었고 티브이에도 두어 번 나왔었고 또... 뭐 밴드만으로 먹고살 만큼은 아니었지만 괜찮았었는데...


 아, 밴드 이름이요? ‘육만이’요. 아뇨 아뇨, 고기 ‘육’자가 아니고, 숫자 ‘육’이에요. 그게 그렇게 들리나? ‘오직 고기만이’처럼? 예전에도 동물보호단체에서 과도한 육류소비와 그 수요를 받치기 위한 공장식 사육 시스템을 조장하는 밴드라며 저희 밴드 홈페이지에 악플을 달고 항의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뜻 아니고요, 소리가 일 초에 삼백삼십 미터를 간다잖아요. 우리가 곡을 연주하는 3분 동안, 우리가 쏘아낸 소리가 초속 삼백삼십 미터로 앰프를 박차고 뛰쳐나와 곡이 끝날 때까지 육만 미터를 달리며 사람들의 귀를 때리고 가슴을 울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지었어요. 육만이 밴드 모르시는구나. 그럼 혹시 ‘충치 앓는 백수 총각’이라는 노래 알아요? ‘엄마- 내 양말은 어딨죠- 엄마는 뭐든지 다 알잖아요- 알바하러 가는 건 아니고 치과에 가려해요- 아빠 내 담배가 어딨죠- 아빤 담배를 끊었다는데 왜 자꾸 내 담배가 없어지나요- 나는 담배살 돈이 없어요- 그건 돗대였단 말이죠-’ 하는 노래인데. 어어, 맞아요. 알죠? 들어본 적 있죠? 그거 우리 노래에요. 이야, 아직 우리 노래 아는 사람이 있구나. 치과에 간다고 거짓말하고 아르바이트를 가는 백수 청년의 심경을 노래로 만든 거였어요. 반응이 꽤 좋아서 어떤 대기업의 ‘무스펙 블라인드 채용’ 홍보 CM 송으로도 쓰였었죠. 그럼요, 엄청 보람 있었죠. 우리의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데 어떤 역할을 하긴 하나보다, 그렇게 생각했었죠. 나중에 어떤 정치인의 자녀 몇몇이 그 기업에 서류도 내지 않고 면접도 보지 않았는데 입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아무튼. 역시 방송을 탄 노래는 지금도 가끔 알아보는 분이 계시네요. 그때 우리가 조금만... 조금만 더 활동할 수 있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망했냐고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됐어요. 어느 순간부터 공연도 행사도 다 끊기고 가끔씩 라디오를 통해 퍼지던 우리 노래가 전혀 나오지 않게 되었어요. 우리는 몰랐는데 우리가 어떤 높으신 분의 심기를 건드렸대요. 저는 그걸 최근에 알았어요. 우리는 우리가 실력이 없어서 망한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는 걸요. 우리 밴드가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었대요. 네 맞아요. 그거.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

  

 그런데 선생님은 좌파세요 우파세요? 아뇨 아뇨, 싸우자는 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


 우리가 가장 잘나가던 즈음, 우리는 어떤 개그맨이 하는 토크 콘서트에 오프닝 공연을 서달라는 섭외를 받았어요. 아주 유명한 분이셔서 당연히 수락했죠. 당시 밴드들에게 그분의 콘서트에 오프닝을 서는 건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었어요. 뭐랄까, 요즘 좀 잘나간다는 밴드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무대였다고 할까요. 페이도 셌고... 안 할 이유가 없었죠.

 그 개그맨의 무대에 몇 번 선 뒤로, 우리 육만이 밴드는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었고 라디오라든가 방송, 큰 무대 섭외가 딱 끊겼어요. 우리뿐만이 아니라 정부 비판적인 노래를 만들었거나, 관련된 무대에 섰던 인디 밴드들 대부분이 방송 같은 대형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알릴 기회가 사라지고 말았죠. 우리는 그 개그맨이 정부 비판적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좌파니 우파니 그게 무슨 뜻인지도 최근에 알았다고요. 그리고 정부 비판 좀 하면 어때요. 예술이 하는 역할이 그런 거 아닌가요. 무엇이 되었든 뭔가 일단 좀 비뚤게 보고 시작하는 거. 거기에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더. 알고 계시죠? 예 맞아요, 그 사건. 생방송 중에. 예 예. 그야말로 난리가 났었죠. 그 뒤로 록 밴드들에 대한 인식이 더욱 안 좋아지고 외면당하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밴드를 해체해야 했어요. 때를 맞추어 잔잔하고 감미로운 사운드 위주의 어쿠스틱 밴드와 힙합 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아시는 바와 같아요. 그래서 아직도 대한민국 록 음악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은 거의 데뷔 30년 차가 다 되어가는, 이제는 무대에서 잠깐이라도 흥을 냈다간 발목이나 허리 부상부터 걱정해야 하는 나이가 되신 그분들밖에 없게 된 거랍니다.


 CM송 저작권료요? 물론 있었죠. 그것도 꽤 많이. 공연 수입도 상당했었고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한 푼도 오지 않더라고요. 하도 돈을 안 주길래 어느 날 용기를 내서 정산을 해 달라고 했더니 갑자기 저희 어머니 욕을 하면서 계약서를 집어 던지더라고요. 거기엔 연습실과 녹음실 사용료로 말도 안 되는 금액이 책정되어 있었고, 월세, 식비, 전기세, 심지어 정화조 청소비까지 별도로 책정해서 그 비용을 공제 후 지급한다- 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러면서 별지로 보여 준 시트에 우리가 사용한 기획사 시설비가 엔간한 오성 호텔급으로 누적 계산되어 있는데, 허허, 일억이래요. 그때 우리 공연 페이가 삼백만 원쯤 했는데 일억을 다 공제하고 추가로 누적되는 시설 사용료를 넘어 정산을 받으려면 하루에 세 시간도 못 자고 공연만 해야겠더라고요. 그만큼 섭외가 들어오지도 않겠지만. 거 왜 연예인 노예계약서라고 한동안 떠들썩했었잖아요. 그거예요. 그때는 그런 계약서가 표준이었거든요. 많이들 당했을 거예요. ‘충치 앓는 백수 총각’ 저작권료는 지금도 그 기획사로 들어가고 있다고 들었어요. 이런 환경에서도 케이팝이라는 게 피어나다니 참 대단해요. 티브이나 유튜브에서 그런 영상을 볼 때면 그래도 제가 ‘거름’ 정도는 되었던 건가 싶어서 가끔 뭉클할 때가 있어요. 아마 지금도 전국 어딘가에 ‘케이팝의 거름’이 되어가고 있는 친구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자신이 ‘거름’인지 알지 못한 채 말이죠. 예술이라는 게, 한 번 그것과 사랑에 빠지고 나면 짓밟고 쥐어 짜여도 계속하고 싶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니까- 어쩔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버텨낼 수 있는 거기도 하고요. 여하튼, 우리 육만이 밴드는 그런 사연으로 해체했고요, 지금은 열심히 잊혀져 가는 중이죠.

 다른 장르의 음악이라... 당연히 그것도 시도해 봤죠. 이미 자라면서 듣고 느낀 음악이 너무 다른 건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힙합을 해 보려고 했는데, 제가 외우는 랩 가사라고는 ‘그치 맞지 엔알지’ 정도인데 켄드릭 라마나 드레이크를 들으며 자란 친구들하고 경쟁이 되겠어요? 잘 안됐죠. 점점 나이가 차니까 밴드들 하려 해도 받아 주지 않고 레슨생들도 나이 많은 강사 부담스럽다며 떨어져 나가고. 룸살롱이나 성인 나이트클럽에서 취객들 대상으로 오부리 반주로 먹고살다가 그마저도 월급 제때 안 주는 조폭 흉내 내는 파렴치들 때문에 때려치우고 결국, 친하게 지내던 사장님께 부탁해서 낙원상가에서 다시 일하게 된 거예요. 그리하여 지난 20여 년간 제가 살아본 이 세상의 이치를 말하자면요, 예술을 향한 노력은 적립이 안 될 수도 있고, 어설픈 재능은 저주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는 거예요.


*

  

 사실 지금까지 한 말들은 다 핑계예요. 아뇨 아뇨, 괜히 자조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아도 제가 재능있는 사람이었으면, 하다못해 죽도록 노력하는 재능이라도 있었다면 어떻게든 성공했겠죠. 저는 스스로를 너무 높게 쳐줬던 것 같아요. 분수에 맞게 살았어야 했는데... 무슨 록스타가 되겠다고...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보겠다고... 근데 진짜 좆 같은 게 뭔지 알아요? 부딪혀 보지 않으면 내가 주인공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나는 엑스트라다- 라고 생각하고 꿈도 절망도 없이 흐리멍덩하게 살든지, 힘껏 부딪혀 보고 산산이 부서지든지.


*

  

 여기는 어떻게 오게 되었냐고요? 왜긴요, 돈이 급해서 왔죠. 아버지가 아프대요. 예 맞아요, 어릴 때 집 나간 아버지. 청량리역 인근에서 노숙자로 생활하다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 왔다는데 스텐트 시술인가 그거 받아야 된대요. 보험 없고, 모아둔 돈 없고, 이거밖에 방법이 없었어요. 집 나간 아버지를 위해 뭐하러 이렇게까지 하냐고요? 그러게요... 단 하나의 좋았던 기억. 아버지가 기타를 구해와서 가르쳐 주시던. 그런 사소한 기억 하나만으로도 부모 자식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건가 봐요. 하여간 이렇게라도 돈을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도시괴담에나 나오는 이야긴 줄 알았는데 아직도 장기밀매가 있었다니. 돈은 바로 어머니 계좌로 입금되는 거 맞죠? 아니 아니 제가 혹시 잘못되면 돈 찾는 데 오래 걸릴까 봐. 어머니께는 말해 두었거든요, 곧 돈 들어올  거라고. 아, 이제 시작하나요? 약 투여 한다고요. 음... 조금... 몽롱한 게... 마치 낙원에라도 온 기분이네요. 선생님 근데 이 수술 몇 번 해 보셨어요? 저는 신장하고 간의 삼분에 일 맞죠? 삼분에 일을 남기는 게 아니라 삼분에 일을 적출하는 게 맞죠? 다른 장기 함부로 떼 내시면 안...


*

  


 어! 저 방금 그거 봤어요. 주마등. 그거 알아요? 죽기 전에 보이는 주마등은 좋은 기억을 회상하기 위한 게 아니라, 죽음의 위기를 느끼고 자기가 살아온 장면 중에 생존 가능성이 높은 장면을 찾기 위해 떠오르는 거래요. 그런데 제 인생을 쭉 살펴봤지만 딱히 생존율을 높여주는 장면 같은 건 없었던 것 같네요. 근데 저 왜 주마등을 봤죠? 선생님, 제 목소리 들리나요? 제가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건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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