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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소 씨 Aug 31. 2022

마블링 (1)


 누군가 나에게 고향을 물으면, 나는 어디서 태어났는지가 모호한 사람이에요- 라고 답하곤 했다. 나는 그 말을 웃자고 하는 것이었고 그 말을 하면 실제로 사람들이 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할 때마다, 그런 말을 자꾸 하다 보면 왠지 내가 모호한 삶을 살다가 모호한 곳에서 죽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시시로 있어 말을 해놓고는 사람들이 웃을 때쯤에야 후회를 하곤 했다. 심각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수자원 공사에서 근무했다. 댐 근처에 살면서 댐을 관리하고 보수하는 게 아버지의 일이었다. 그날은 엄마가 나를 가진지 여덟 달이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고 아버지가 다른 지역에 있는 댐으로 발령을 받아 이사를 떠나던 길이었다. 그간 병원에서 조산기가 있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므로 이삿길에 오른 것인데 트럭 짐칸에 앉아있던 엄마가 갑작스레 악, 하는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버렸다. 트럭은 즉각 경로를 바꿔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 어디께에 있는 작은 병원의 응급실로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태어났다.

 엄마는 무아몽중 의식도 없이 괴이한 신음만 식식거리고, 양수는 벌써 터져서 줄줄 흐르는데 자궁이 열리지 않아 의사가 너를 구출-이라고 했다-하느라 어찌나 애를 먹었는지 아느냐며 아버지는 엄살궂은 얼굴로 말을 하곤 했다. 아버지가 낳은 것도 아니면서. 내가 태어난, 아니 구출된 작은 병원의 이름은 두 분 모두 기억하지 못한다.

 엄마는 거기서 이틀 정도 몸을 풀었다. 방금 해산한 여인이라면 응당 이틀보다는 훨씬 더 풍족한 안정을 취하며 오로가 그치길 기다리는 것이 아무리 여권이 박했다는 그 시절의 풍속으로도, 부인과 의학상으로도 조리에 닿으나 엄마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가 태어난, 아니 구출된 날에 비가 많이 왔는데, 병원에 대강 세워둔 이삿짐 트럭이 이틀 내내 비를 왕창 맞는 바람에 엄마는 미처 몸을 풀기도 전에 다시 트럭에 올라야 했다. 트럭 앞 좌석에는 출발할 때부터 채워둔 짐이 이미 꽉 들어차 있었다. 돈을 아낀다고 아버지가 작은 트럭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엄마라도 좌석에 앉혀보겠다며 짐을 빼 들고 트럭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봤지만 건드리면 무너질 듯 젠가처럼 아슬하게 적재된 터라 여지가 없었다. 화물기사가 더 이상 지체하면 짐을 내려버리고 그냥 돌아가겠다며 성화를 부렸고, 결국 엄마와 (나와) 아버지는 처음 출발할 때처럼 화물칸에 박스를 몇 겹 깔고 거기에 앉아 가야 했다. 도착한 곳은 ‘영천시 자양면’이었다는데, 아버지는 엄마에게 이사 갈 곳이 경기도 어디라고 고약한 거짓말을 했던 모양이다. 그때, 자양면인지 자장면인지 전설의 고향 같은 그 동네에 딱 도착했을 때, 엄마는 정말이지 허덜시리 울었었어. 당시를 회상하면 언제든 다시 울 수 있다는 결의 투철한 얼굴로 엄마는 출처 모를 사투리를 섞어가며 말을 했다. 태어난 지 만 이틀 된 팔삭둥이 딸을 품에 안은 채 녹슨 트럭 바닥에 불그무레하게 고인 쇳물에 방금 해산한 몸이 닿을까 요리조리 피해가며, 두툴두툴한 비포장도로를 달릴 땐 허술히 묶인 장롱이나 고무 다라이 같은 세간살이들이 언제든 쏟아질 것 같아 가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릴 만치 눈을 홉뜨고 가야 했던 그 날에 대해 엄마는 세세히 기억 묘사를 하며 도리질을 쳤다. 그러할 때 나는, 그래서 내 고향은 어딘데 경기도야 충청도야 영천시 자양면이야, 그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사내정치를 잘 못 하는 편이었는지 툭하면 순환 근무 대상에 편입되었다. 남들은 8년째, 10년째 한 지역에서 잘만 있는다던데 우리는 3년마다 전국의 댐으로, 보로 이사를 다녀야 했다. 처음엔 안 그랬다는데 내가 태어난 이후부터는 미지의 깡시골로만 배치를 받았다며 엄마는 불퉁하게 말을 하곤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어쩐지 나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것 같아 나는 좀 마뜩잖은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은 대체로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보냈다. 이사를 갈 때마다 친구들이 바뀌어 번번이 아쉽고 또 서운했지만, 그래도 어디를 가던 산이 있고, 강이 있고, 댐이 있고, 풀어 키우는 개가 있고, 송아지가 있고, 코를 많이 흘리는 애들이 있고. 풍치는 비슷하였으므로 적응이 어렵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때 기억이 잘 나지 않아 가끔 좀 아쉬울 때가 있다. 워낙 많은 동네를 돌아다녔기 때문일 테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드문드문 사진처럼 기억나는 장면 몇 가지가 있긴 하다. 등하교를 함께하던 언니가 진돗개를 항상 데리고 다녔는데, 아주 영특하고 똘똘한 녀석이었다. 학교 가는 길목의 풀숲에 숨어 있는 뱀을 잡아주기도 했고 나를 비롯한 어린 애들이 방아깨비를 잡는다며 중간에 새버리면 왕왕 짖어 언니가 우리를 돌아볼 수 있게 해줬다. 어느 날엔가 그 녀석에 내 앞에 다가와 몸을 뒤치며 배를 훌떡 드러낸 적이 있었다. 아무도 알려준 적 없었지만 나는 녀석이 무얼 바라는지 알 수 있었다. 녀석의 무방비함이 고마워 눈물을 조금 흘렸었다. 수업이 끝나면 댐 근처 수변 길에서 애들이랑 놀다 들어가곤 했는데, 어떤 애가 쪽 빨아먹으면 꿀맛이 나는 꽃밭이 있다고 해서 갔다. 사루비아 꽃밭 이었다. 우리는 거기서 자주 놀았다. 끝 모르게 펼쳐진 야생 사루비아 꽃밭 옆으로 시원하게 뻗은 물줄기와 바람이 불 때마다 수런거리는 갈대 가득한 방죽과 뒹구는 개와 저물녘 노을빛이 어우러질 때면, 그 천연스러운 정경이 아주 근사했다는 것과 거기서 나오는 사루비아 꿀이 감미로웠다는 것과 다만 감미에 현혹되어 지나치게 빨아대면 꽃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는 것 정도는 지금도 기억할 수 있다. 이 정도면 많이 기억하는 건가. 아무튼.          

*          

 초등학교를 마칠 때쯤 아버지가 밀양으로 발령을 받아 우리 가족은 거기로 이사를 갔다. 밀양은 큰 도시였다. 그때까지 내가 본 중에서는 가장 컸다. 중학교 또한 전모를 파악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바람에 엄마의 손에 붙들려 처음 학교에 갔던 날 나는 몹시 복잡한 심경이었다. 밀양의 중학교는 한 반에 오십 명이 넘었고 그런 반이 열 개도 더 있었다. 중학생만으로, 거기서 여자만 발라냈는데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다니. 학교의 모양도, 애들이 상하좌우 동일한 간격으로 정렬하여 운동장에 서 있는 모양도, 같은 색 치마와 같은 색 자켓과 같은 색 구두까지도, 모든 것의 질서가 과격하게 정연하여 나는 그만 질려버리고 말았다. 큰 도시의 선생님들은 굳고 무서워 보였다. 초등학교 때 만났던 선생님들은 비가 오는 날이면 수업을 접고 내 다리 내놓으라며 달려든다는 귀신 이야기도 들려주고 집에 돼지가 새끼를 낳는 날인데 구경하러 가고 싶다는 애들은 그냥 집에 보내주기도 하고 그랬었는데, 밀양의 선생님들에게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단지 험상스럽게 생긴 몽둥이를 들고 다녔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고, 딱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말을 꺼내서는 절대로 안 될 것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입학을 하고 한동안은 조용하게 다녔다. 원래 수줍음을 타는 편이기도 했지만, 애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이기도 했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말투였다. 다마라 뛰라? 이건 뭐, 대충 빨리 뛰라는 말로 이해는 하였으나 ‘따꿍도’ 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해 눈만 껌벅거렸더랬다. ‘따꿍도’ 라고 말한 여자애는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벌컥 다가와서는 아, 빠가가 라고 중얼거리며 눈을 흘긴 뒤, 뚜껑을 들고 사라져버렸다. ‘빠가’는 알아들을 수 있었고 ‘빠가’라는 말을 들은 뒤로는 겁을 먹고 완전히 침묵했다. 하지만, 이윽고 사고가 나고 말았다. 하늘-땅이라는 구령에서.

 “쌤이 오늘은 발야구 하란다. 편 묵자.”

 반장이 배구공을 하나 들고 오며 말했다. 그동안 애들 말을 못 알아들어 체육 시간에도 슬금슬금 피하기만 했던 나는 발야구라는 말을 듣자 화색이 돌았다. 발야구를 좋아했다. 발야구라면 좀 한다, 소리를 들었었다. 이거라면 애들과 어울리는 데 문제없지. 문제는 전교생이 이십 명에 불과했던, 가장 가까운 또래가 두세 살 어린 애들로 다섯 명쯤 있었던 전 학교에서 그 이야기에 취해 발야구에 나섰다는 것이었다.

 “소라이메치기 못 돼보기 없-기-”

 편가르기를 하자는 말에 나는 신이 나서 힘껏 소리를 쳤는데 나의 외침을 듣고 우리 반, 아니 운동장 구석에서 줄넘기를 하던 다른 반 애들까지 하던 것들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대략 이백 개쯤의 눈알이 내게 쏠렸다.

 “뭐라카노 이기. 처돌았나.”

 덩치 큰 어떤 여자애가 소리치자 아이들이 낄낄 웃었다.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는 몰랐지만 비웃음이 분명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창피함을 떠나 ‘처돌았나’라는 처음 들어보는 맹렬한 표현에 나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돌았나’도 아니고 ‘처돌았나’라니. 덩치 큰 여자애의 말이 이어졌다. 가시나 말하는 꼬라지 봐라. 니는 하늘-땅도 모리나. 소라를 메쳐? 푸하하. 니 이름이 뭐고. 허스이? 느그 앞으로 허스이랑 놀면 말투 빙시된다 알았나. 애들이 또다시 크게 웃었다. 그리고 발야구에 대해 말하자면, 역시 나는 발야구를 잘하는 게 아니었다. 막상 해 보니 찼다 하면 똥볼에 병살이었다. 동갑내기 여중생들은 내가 예전의 학교들에서 같이 어울렸던, 나보다 두세 살 어린 애들보다 운동을 월등히 잘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에겐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까지 또래를 만나 본 적이 없었으니까. 허스이 완전 개발이다. 카하하. 애들이 또 크게 웃었다.

 덩치 큰 여자애의 선언에 의해 나는 그날부터 왕따가 되었다. 바로 다음 날부터 애들의 왕따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없는 사이 체육복에 매직으로 겨드랑이털과 유방 그림을 그려놓았고, 내 머리 위에서 칠판지우개를 털고 지나갔다. 내가 왕따라는 사실을 모르고 나와 대화를 하거나 밥을 먹는 애가 있으면 덩치 큰 여자애나 덩치 큰 여자애의 주변을 맴도는 애들이 니도 저래 말투 빙시되고 싶나, 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전라도 사투리로 말을 하면 따라 하며 비웃었고 가끔 연필이나 지우개 따위가 없어지기도 했다. 지금 전부 말을 하기 뭣해서 그렇지 언급한 것보다 상황은 자못 심각했다. 반응을 하면 더 심해질 것 같아 묵묵히 참고만 있었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 빙시 허스이라고 불리는 게 싫었다. 애들은 못되고 웃긴 발음으로 삥시 허쓰이라고 놀려댔는데 특히 그 덩치 큰 여자애가 아주 옹졸하게 들리는 못된 발음을 잘했다. 걔가 내 이름을 부르며 조롱할 때면 애들이 기다렸다가 마구 웃곤 했다. 자기들도 서울말은 못 하는 주제에 내 사투리를 갖고 놀려대는 애들이 원망스럽고 억울했지만, 거기는 서울이 아니라 밀양이었고 경상도 49명 대對 전라도 1명이라는 수치의 압도를 전복할 자신도 없었으므로 나는 가만히 있었다. 어찌 보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사상에 근간을 둔 처사로 일견 민주적인 애들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으나 공리주의가 만사에 옳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어찌 되었든 따돌림을 당한다는 건 꽤나 견디기 서러운 일이어서 애들이 웃는 만큼 나는 침울해졌다. 나는 ‘빙시도, 허스이도 아니다. 허선이다’ 이렇게 똑바로 말을 하고 싶었지만, 혼자 있을 때 소리 내어 말해보면 자꾸만 ‘나가 빙시도, 허스이도 아니랑께’ 라고 나오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라 물고요. 병아리 떼 쫑쫑쫑. 봄나들이 갑니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라 물고요… 왜 개나리 동요가 생각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개나리를 이렇게 못갖춘마디로 부르면 무한히 반복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후로 외면하고 싶은 상황이 생길 때마다 나는 개나리를 부르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그와 같은 일들로 하염없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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