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소 씨 Aug 31. 2022

마블링 (2)



*          

-내는 니캉 친구 하고 싶은데. 이따 학교 마치고 교문 앞 팔팔문방구 앞에서 보제이. 이미주가 -     

 서랍에 쪽지가 들어있었다. 뭐지? 뭘까. 새로운 왕따질의 일종인가? 나는 이미주라는 여자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미주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쓰다가 어쩔 수 없이 눈을 마주쳤을 때, 순간적으로 상긋 웃더니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해사했던 미주의 웃음을 보고 나는 왕따질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 잠깐이었지만 미주가 나를 보고 웃었을 때 미주도 나도 얼굴이 조금 빨개진 것 같았다. 쪽지를 다시 펼쳐보았다. 펼칠 때마다 기분이 좋아서 접었다 펼쳤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쪽지에 쓰인 글씨가 예뻤다. 그렇게 예쁜 글씨는 처음 봤다. 예전의 학교에 있던 애들은 그야말로 고양이발이나 개발에 연필을 쥐어 쓴 것처럼 사뭇 기형적인 글씨를 부적처럼 그렸다. 노트를 펴서 미주의 쪽지를 공들여 따라 써 보았다. 잘되지 않다가 여러 번 연습하니 대략 비슷해져 갔다. 따라 쓸수록 미주의 마음이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낯선 고장에 와서 내내 따돌림을 당하며 지내다가 처음으로 내게 호감을 보이는 친구를 만났다는 사실에 가슴이 들먹거렸다. 내게도 친구가 생길지 모른다. 예쁜 글씨를 쓸 줄 아는 동갑내기 친구가.

 학교를 마치고 팔팔문방구 앞에서 미주를 기다렸다. 미주는 덩치 큰 여자애 무리가 없는지 두리번거리더니 종종거리며 문방구로 뛰어왔다. 우리는 쑥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땅바닥만 발로 직직 그으며 서 있었다. 흐르는 초조를 기다리다 못한 내가 인사를 건넸는데,

 “왔는가.”  “왔나.”

 말이 겹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미주가 풉- 하고 웃었다. 나도 미주를 따라 배시시 웃었다. 그때 미주가 문득 내 손을 잡았다. 미주의 손은 자그맣고 차가웠다.

 “니 손 따숩네.”

 미주가 말했다.

 “니는 손이 왜 이리 차대?”

 “차대? 가스나 그 뭔 말이고?”

 “아아니… 니 손이 왜 이리 차냐고….”

 “아아. 손이 차다꼬? 내 수족냉증인가 그건갑다.”

 수족냉증이 뭔지는 몰랐지만 하여간 차가운 미주의 손을 따뜻하게 해 주고 싶어 꼭 쥐고 놓지 않았다. 월드컵 쥐포를 하나 사서 문방구 아저씨에게 구워달라고 했다. 따깍. 따깍. 아저씨가 부루스타에 불을 올렸다. 불 위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며 거뭇하게 오그라드는 월드컵 쥐포를 고개를 죽 빼고 넋 없이 쳐다보다가 똑같이 그러고 있는 서로를 발견하고는 우리는 또 까르르 웃었다. 자, 맛있게들 무라. 우리는 받아든 쥐포를 오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근디 너 말여. 나랑 놀아도 괜찮은가?”

 “맞제.”

 “아아니, 나 왕따인디 니 나랑 놀아도 괜찮냐고. 그러다 니 나처럼 왕따 되분당께?”

 “맞제.”

 “아아니, 맞기는 뭐가 자꾸 맞대. 느그 경상도 애들은 자꾸 왜 그런대. 안 맞아야. 맞지 않다고. 답답해 뒤져불것네.”

 “뒤지지 마라. 고마 괜찮다. 이래 학교 끝나고 만나면 된다아이가.”

 미주가 내 손을 더욱 꼭 쥐었다. 쥐포를 다 먹을 때쯤, 미주와 헤어져야 하는 골목이 나왔다. 우리는 헤어지기 아쉬워 슈퍼마켓 평상에 앉았다. 나는 미주에게 왕따인 나랑, 촌스럽고 말도 빙시같이 하는 나랑 왜 친구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니, 저번에 수업 때 말이다. 그때 억수로 멋지대.”

 “응? 무슨 수업? 내가 뭐시를 했당가?”

 “과학 수업 때 말이다. 쌤이 포유류와 비포유류의 차이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그때 허스이 니가 대답했다아이가. 새끼를 낳느냐 알을 낳느냐. 그 차이지라, 라고. 그때 진짜 니 멋있었데이. 내 완전 반했다아이가. 그때부터 니캉 친구하고 싶었데이.”

 기억을 더듬었다. 한 달쯤 전이었던 것 같다. 미주의 말대로 나는 동물이라면 환장할 듯이 좋아해서 백과사전이라던가 만화책이라던가, 하여튼 동물과 관련된 책을 많이 갖고 있었고 읽기도 많이 읽었다.

 “에이. 그까짓게 뭐라고 반하기까지 한대. 그냥 동물을 좋아허니께, 동물에 대해서만 많이 아는 거지 나 공부를 별로 잘하는 것도 아니라니께. 나가 팔삭둥이로 약간 모자라게 태어나서 공부를 못 한당께…”

 “니 공부 못하는 건 내도 안다. 니 접때 영어 쪽지시험 그거 빵점 맞지 않았나. 내 다 봤다. 야, 니 그거 아나. 그날 빵점 맞은 거 니랑 박민주(덩치 큰 여자애의 이름이 박민주였다) 밖에 없다아이가. 빵점이 뭐고 빵점이. 내는 그래도 니가 동물에 대해 잘 알고 그러는 게 멋져 보인다 않카나. 내도 동물에 억수로 관심 많그든.”

 “아아. 그러냐. 어쩐지 그날 나 빵점 맞았다고 박민주가 뭐라고 안 하드만. 갸도 팔삭둥인가? 팔삭둥이치곤 좀 지나치게 튼실해 보이는디. 하여튼 반갑네 반가워.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라니께. 동물 책이 엄청 많어야.”

 그날은 미주가 엄마한테 미리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되었고, 다음 날부터 우린 매일같이 어울리며 동물에 관한 책을 돌려 읽거나 동네 개나, 고양이, 소, 돼지와 같은 가축들을 구경하러 다녔다. 동물들을 만날 때면 하나씩 이름도 붙여 주었다. 덤덤하게 생기면 덤덤이, 얄궂게 생기면 얄궂이. 어느 축사에서 새끼 낳을 때가 되었는지 줄줄 꿰고 다니며 새끼를 낳는 날이면 미주와 함께 구경하러 가곤 했다.

 어느 날은 농장주를 도와 직접 새끼를 받아보기도 했다. 땅바닥에 얼굴을 쓸려가며 버둥거리기만 하던 송아지가 마침내 일어섰을 때, 우리는 피범벅이 된 손도 잊은 채 서로를 부둥켜안고 뛸 듯이 기뻐했다. 우리는 녀석에게 실처럼 길게 길게 살라는 의미로 타래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소 주인이 별도의 이름을 붙이겠지만 우리에게 녀석은 그냥 타래였다. 타래의 몸에 붙은 끈적한 피와 양수와 검불 따위를 깨끗하게 씻어주고 우리는 거지꼴이 되어 돌아갔다. 그날 집에 가서 더러워진 옷 때문에 엄마한테 딱 뒤져불게 맞았다. 피범벅이 된 옷을 락스물로 세탁했다. 교복이 한 벌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날 밤 안으로 말려야만 했다. 드라이어로 말리고 나니 교복 군데군데가 버짐이 핀 것처럼 보기 싫게 바래 버린 것을 발견했다. 이런 옷을 입고 다니면 박민주 그 뚱땡이가 또 괴롭힐 텐데. 미주도 지금쯤 락스로 세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락스물로 세탁하면 피가 지워진다고 미주가 알려줬으니까. 미주에게 삐삐를 쳤다. 11010. 나와 미주만의 암호였다. 옆으로 보면 ‘흥’이다. 미주한테서 전화가 왔다. 미주야. 니 말대로 락스로 빨았다가 옷이 다 망가져 부렀는디. 미주가 대답 대신 파하거리며 웃었다. 바닥을 구르는지 한동안 대답은 없고 웃음소리만 들렸다. 야. 내도 옷 다 망가졌다. 엄마한테 억수로 처맞았다아이가. 나 역시 미주의 말에 한참을 낄낄 웃다가 야간근무를 마치고 주무시던 아버지가 잠에서 깨 거실 한쪽에 서서 노려보고 있는 걸 발견하고 황급히 통화를 마쳤다. 젖은 교복을 마저 말리는 동안 타래가 일어서던 순간이 자꾸 떠오르며 눈물이 솟아 곤란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 동물을 보살피는 일을 하고 싶다고. 꿈이 생겼다. 그날 밤, 장성한 타래가 개울가에 쪼그려 앉아 나와 미주의 교복을 빨래 방망이로 두드리며 조금만 기다리면 다 된다고 말하는 두서없는 내용의 꿈을 꾸었다.          

*          

 “야, 니 바보냐. 왜 그걸 못 허냐. 답답해 뒤져불겄네.”

 “뭐라카노, 가시나야. 스이. 허스이 맞잖아.”

 “아니, 스이가 아니라 선이라고 선. 전기선. 경계선. 허선. 자, 따라해 봐 선.”

 “선.”

 “아아니, 잘하면서 왜 자꾸 스이라고 한대. 자, 허 해봐.”

 “허”

 “그래.”

 “스이.”

 “아따 속 터져, 야 됐다. 말을 말자. 내가 말도 못 허는 병신하고 친구를 허고 자빠졌다.”

 “가시나야 말 몬하는 빙시는 니제. 그때 뭐라꼬? 참 내, 기억도 안 난다. 뭐어? 소라이 메치기? 그게 대체 무슨 말이고? 하, 난 아직도 그때 생각하면 와- 이미주 진짜 착하다. 말도 못 하는 빙시하고 친구도 해주고. 이래 생각한다 안 했나.”

 미주에게만큼은 허스이가 아니라 허선이 되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뭐, 미주가 선을 못하는 만큼 나도 스이를 못하니 마냥 내 고집만 부릴 순 없다. 그 당시 내겐 부모님이 쓰는 서울 말씨에 충청도와 전라도 사투리까지 그야말로 느자구없이 혼재되어 있었으므로 경상도 사투리까지 탑재하긴 무리였다. 무엇보다 충청, 전라 쪽 말과 경상도 말은 말을 할 때 꺼내 쓰는 영혼이랄까, 그게 몹시 달랐다.

 미주는 공부를 잘했다. 나랑 만날 놀러만 다니는 것 같은데 신통하게 숙제도 다 해오고 시험도 잘 보고 그랬다. 나는 동물에 관해 많이 아는 것 빼고는 다 못 했다. 아마 팔삭둥이라 그런 걸 테다. 미주는 공부로 주목을 받으면서 점점 인기가 높아졌다. 한때 인기가 많아진 미주가 나를 멀리할까 봐 마음고생을 했던 적도 있었는데, 다행히 미주는 변함없이 나와 어울려 주었다. 오히려 인기를 이용해 줄곧 나를 보호하곤 했다. 애들은 미주와 친한 내게 함부로 굴지 못했다. 미주는 선생님들의 예쁨을 담뿍 받는 일등이자 반장이었으니까. 애들이 나를 괴롭히면 미주가 금세 가서 일러바쳐 줬으니까. 나는 왕따에서 은따- 정도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우리는 2학년 때 다른 반이 되었다가 3학년이 되어 다시 만났다. 미주가 그때부터 내게 화를 자주 냈다. 같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은데 내 성적으로는 갈 수가 없다는 이유였다. 어느 날 미주는 선생님에게 사정을 하더니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부터 틈만 나면 나를 갈구며 공부를 가르쳤고 또 시켰다. 안타깝게도 나는 미주의 마음만큼 공부를 따라가진 못했다. 미주는 내가 초등학교를 깡시골에서 다녔기 때문에, 학교에서 책은 안 읽고 개구리나 메뚜기만 잡으러 다녔기 때문에 공부가 어려운 거라며 책에 익숙해지라고 한국문학 전집 같은 걸 읽게 시켰다. 초등학교 때 딱히 뭘 잡으러 다니진 않았는데. 하여튼 미주의 성화에 못 이겨 빌려준 책들을 집에 들고 와서 읽긴 읽었다. 어떤 건 재밌어서 두 번 읽은 것도 있었고, 어떤 건 요약문만 읽고 읽었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거짓말은 전반적으로 다 걸렸다. 그즈음 미주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았다.     

 미주와 함께 송백이네 집에 자주 놀러 갔다. 송백이는 얼마 전 송백나무 옆에서 태어난 김씨 아저씨네 송아지인데 태어났을 때 숨을 똑바로 쉬지 못했고 그대로 죽을 뻔했었다. 무슨 기운이 솟은 건지 나는 김씨 아저씨를 밀쳐내고 송백이의 주둥이를 잡은 뒤 숨을 마구 불어넣었는데, 그 덕인지 저 스스로 어떻게 숨을 쉰 건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살아났다. 미주는 그날 너무 울어서 코피까지 흘렸었다. 그래서 송백이는 우리에게 더 특별했다.

 그날도 우리는 학교를 마치고 미끌미끌한 논두렁길을 겅정겅정 뛰며 송백이네로 향했다. 가을이 오려는 지 태극잠자리 몇 쌍이 논 위를 날고 있었다. 동물은 좋아했지만 곤충은 아주 무서워했던 나는 태극잠자리가 귓가 언저리에서 붕- 소리를 내는 데 놀라 그만 논두렁 밑으로 자빠지고 말았다. 니 괘않나. 어. 괜찮어야. 옷 더러워져서 우야노. 미주야, 너나 나나 이미 교복이 의미가 없지 않것냐. 내가 진흙을 한 덩어리 떼더니 미주의 귓가에 발랐다. 니 구렛나루 직이네. 푸하하. 미주가 배를 잡고 웃었다. 미주도 지지 않고 내 얼굴에 진흙으로 눈썹을 그리며 깔깔 웃었다.

 “송백아 안녕?”

 송백이가 귓가를 팔랑거리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사실 송백이가 실제로 우리를 반겨 주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고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던 것 같다. 구둣솔로 송백이의 등을 쓸고 이마를 만져주었다. 목을 껴안고 한참을 서서 녀석의 온기를 느꼈다. 내가 송백이의 목을 끌어안을 때면, 송백이는 기꺼이 가만히 있어 주었다. 송백이에게서 정겹고 구린 냄새가 났다. 나는 한껏 들이켰다.

 “앗 따거!”

 “엥? 니 와그라노.”

 “아… 스읍. 송백이가 여기 핥았는데 피가 나고 있었네.”

 아까 넘어졌을 때 긁힌 모양이다. 팔꿈치 어디께에 피가 조금 나고 있었다. 잘 보이지 않는 곳이라 다친 걸 몰랐나 보다. 피 냄새를 맡은 송백이가 자꾸 거기를 핥으려 혀를 날름거렸다. 송백이의 혀는 무척 길고 유연해서 내가 돌볼 수 없는 상처까지도 다 알고 핥아 준다. 문득 고마웠다. 송백이의 포슬포슬한 콧등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근데 송백아 그만 핥아. 따갑단 말이야.

 우리는 김씨 아저씨한테 그러다 애 배 터진다며 혼이 날 때까지 송백이에게 여물을 먹이다 집으로 돌아왔다. 나와 미주의 몸에서 지푸라기 냄새가 나는지 송백이가 자꾸 교복을 물어뜯어 난감했다. 이럴 때 보면 송백이는 참 멍청한 것 같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빨래를 하고, 교복을 선풍기에 널어 말리면서 미주가 빌려준 책을 읽었다. 김동리의 역마. 소설에 자꾸 성기, 성기가 등장해서 괜히 엄마의 눈치가 보였다. 성기가 엿판을 들고 떠날 때는 삼 년마다 떠도는 우리 가족이 떠올라 괜히 콧날이 시큰했다. 선풍기에 널어둔 교복을 거뒀다. 보송해진 낡은 교복을 베고 책을 마저 읽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미주 덕분에 내 성적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수 있을 만큼 좋아졌지만 결국 미주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는 못했다. 다시 전학을 가야 했다. 이번엔 아버지가 다른 댐으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간의 노하우를 그러모아 댐 유지보수 회사를 만든다 어쩐다 부산했다. 업체니 사업이니, 내겐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으므로 나는 그냥 또 전근을 가나보다 했다.

 미주와 헤어지기 전날 우리는 송백이네서 만났다. 죽을 뻔한 송백이를 살려줬던 게 기특했는지 김씨 아저씨는 우리가 말도 없이 불쑥 축사에 들어가 송백이랑 놀아도 내버려 두었다. 아저씨는 가끔 밥도 해줬다. 그날 송백이네 집에 갔을 땐 아저씨가 반으로 가른 드럼통에 숯을 피우며 고기를 구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와 미주는 송백이와 인사를 하고 화로 근처에 가서 아저씨가 구워주는 고기를 날름날름 받아먹으며 까르르 웃고 놀았다. 아저씨가 구워주는 고기는 소고기였다. 그때의 우리는 아직 많이 어렸으므로, 우리가 먹고 있는 고기와 송백이를 연결 지어 생각하진 못했다.

 “허스이.”

 “왜.”

 “니 이거 하나 무라.”

 미주가 쌈을 크게 하나 싸서 내 입에 욱여넣었다.

 “으악! 야, 니 청량고추 넣었냐. 아따 내가 매운 거 못 먹는다고 몇 번을 말하냐. 스읍. 하-”

 미주가 낄낄대며 웃었다.

 “야, 니도 이거 하나 먹어야. 아따, 나는 너처럼 이상한 거 안 넣었다니께. 믿고 먹어. 자, 아아 해라.”

 “으악! 야, 니 당근 넣었제! 이기 처돌았나.”
  “푸하하. 야, 나만 당해서 쓰것냐. 그라니께, 우리 각자 조용히 먹자잉? 믿는다잉?”

 아저씨가 페트병 같은 걸 하나 들고 와서 건네주고 돌아갔다. 식혜였다. 그래서 들고 오면서 그렇게 흔들었던 거구나. 페트병 속 밥알이 해파리처럼 희미한 빛을 내며 부유하고 있었다. 거꾸로 들자 화들짝 놀란 것처럼 밥알이 소용돌이치다가 다시 천천히, 몽롱한 속도로 가라앉았다. 느닷없는 아버지의 발령장에 따라 화들짝 이사를 가서는 몽롱한 속도로 가라앉으며, 새로운 동네에 적응하는 일을 반복해왔던 우리 가족이 떠올랐다.

 “뭘 그리 쳐다보노?”

 미주가 페트병을 뺏어 들더니 종이컵에 따랐다. 살짝 얼려둔 식혜였는지 흘러나오는 모양이 울럭울럭했다. 얼음이 동동 띄워진 식혜를 보자 입안에 침이 고였다. 미주와 건배를 하고 러브샷을 했다. 너무 차가웠던 식혜는 한 번에 다 마실 수가 없어서 나는 조금 마시고 팔을 빼려고 했는데 미주가 “니 원샷 모리나. 원샷 안 하면 남은 거 대가리에 확 부삔데이.” 하는 바람에 전부 들이켰다.

 “으윽. 야야, 머리가 깨질 것 같어야.”

 “으윽. 내도 그렇다.”

 우리는 또 깔깔 웃었다. 평상에 나란히 드러누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만날 보는 시골 밤하늘인데도 볼 때마다 아름답다. 고즈넉한 가운데 장작 타닥거리는 소리가 그윽한 정경에 운율을 더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그날 그곳의 부드러운 정적을 외우기 위해 애를 썼다. 아- 이사 가기 싫다. 엄마 나는 나중에 따라가면 안된다요?

 “허스이.”

 “왜.”

 “니 공부 열심히 해라.”

 “아이 또 왜에. 나 공부 싫어하는 거 알잖애. 아따, 이제야 니 잔소리에서 해방되나 싶었구먼.”

 “약속해라. 공부 열심히 한다고. 아, 약속하라고- 쫌-”

목소리가 떨리길래 미주를 보았더니, 미주의 눈가와 두 뺨이 물큰하게 젖어있었다.

 “아아니 왜 울고 그래. 알았어. 알았당께. 열심히 헐게. 아, 헌다니께?”

 “니, 내랑 같은 대학교 가자. 우리 수의사 되자.”

 “수의사? 그거 공부 엄청 잘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야, 내가 열심히는 헐 건데 거기까진 자신이 없는디….”

 “니도 동물들 보살피는 일 하고 싶다매. 니도 할 수 있다. 공부해라. 공부해라고… 꼭 같은 대학교 가자고… 흑.”

 “아따, 기지배 툭하면 울어야. 알았다, 알았어. 그럼 너가 거시기 뭐냐, 족집게 노트 같은 거 만들어서 보내줘야 한다잉. 내가 허는데 꺼정 해볼팅게.”
  나는 미주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닦아 주었다. 미주의 손이 차가웠다. 나 없으면 누가 이년 손을 잡아주지. 언젠가 내가 나이가 들어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을 겪게 된다면, 이년과의 추억 덕분에 한 번쯤은 살아볼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수의대는… 나쁜 년. 다 자기처럼 책을 툭 펼쳐서 읽으면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줄 아나. 수의사라. 되어보고 싶긴 하다. 그때 송백이가 푸르르 소리를 내며 포근한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나는 달려가 송백이를 끌어안고 조금 울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블링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