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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소 씨 Aug 31. 2022

마블링 (3)


*           

 우리 가족은 대전으로 갔다. 아버지는 대전 외곽 어디께에 회사를 차리고 몇 군데의 댐을 관리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마트가 있고, 영화관이 있다며, 나도 드디어 광역시에서 살아보게 되었다며 엄마가 무척 좋아했다. 이제는 이사를 안 다녀도 된다는 사실에도 좋아했다. 엄마는 정말로 좋아 보였다.

 아버지는 사업이 잘 되어가는지 대전에 온 뒤로는 언제나 싱글벙글이었다. 대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차를 바꿨다. 아카시아랬나 아카디아랬나. 아무튼 자동차를 전혀 모르는 내가 봐도 뭔가 고상하고 지적인 모습이었다. 거기서 내리면 사람들이 다 쳐다봤다. 애니콜 가로본능, 소니 시디플레이어, 나이키 코르테즈… 그 시절 여고생들이 선망하던 물건들은 웬만한 건 다 갖추고 다녔다. 용돈도 많이 올랐다.

 전학 간 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늦은 사춘기가 온 건지, 남자애들을 처음 봐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선머슴 같던 나도 그 무렵부터는 조금 변했다. 키가 쑥 커졌고 몸매나 얼굴도 어쩐지 조금 상큼해졌다. 더 상큼해지고 싶어서 화장품을 사들였고 교복도 엄마 몰래 줄였다. 사투리도 고쳤다. 몇 년을 노력해도 안 고쳐지더니 남자애들 앞에서 사투리를 쓰는 게 창피했는지 금세 서울말 비스름하게 흉내를 낼 수 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미주와 함께 거의 넝마라고 해도 좋을 법한 교복을 헐렁헐렁 입고 밀양 시내를 발발거리며 돌아다녔는데 이제 그렇게 다니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학교에선 짧은 치마 경쟁이 붙었다. 누가 안 걸리고 가장 짧은 치마를 가장 오래 유지하는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대전의 새 친구들은 마음 씀씀이가 되었든 대화의 주제가 되었든 어쩐지 미주와는 결이 달라서 한껏 가까워지기는 어려웠다. 미주가 그리워 통화를 자주 했다. 미주와 통화를 할 때면, 내가 대화를 주도해보려고 용을 썼으나 결국 공부 좀 하라는 미주의 채근으로 대부분의 통화는 끝이 났다. “미주야, 너네도 교복 줄여 입냐?”고 물으니 미주가 파하하 웃으며 “당연하지 니 설마 아직도 그 얼룩덜룩 중학교 때 같은 교복 입고 다니는 거 아니제?” 라고 말한 뒤, 패션은 패션이고 공부 단단히 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 말투가 어쩐지 좀 재수 없어졌다고도 했다. 늘 그렇듯 미주다운 보드라운 핀잔이었다. 대체로 평온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           

 “야. 야이 개씨발놈아! 돈 내놔! 내 돈 어딨냐고! 내 도온!”

 “아악! 그러지 마세요!”

 고2 겨울방학이었다. 집에 사람들이 쳐들어와서는 세간을 부수고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얼굴에 침을 뱉고 육시랄 놈이라며 저주했다. 누군가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제발 돈을 갚아달라며 빌었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을 뜯어말리다 따귀를 맞고 쓰러졌는데도 아버지는 가만히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빚쟁이들이 찾아오는 게 벌써 한 달째였다. 처음엔 아버지가 조만간 수금이 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돌려보냈으나 나중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가만히 서서 사람들에게 얻어 맞았다. 빚쟁이들이 찾아오면 나는 거실 구석, 커튼 뒤에 숨어 앉아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노래를 불렀다.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라 물고요. 병아리 떼 쫑쫑쫑 봄나들이 갑니나리 나리 개나리… 사람들이 티브이, 냉장고, 소파, 패물, 나중엔 아버지가 모으던 수석과 내 서랍을 뒤져 소니 시디플레이어까지 충실하게 훑어갔다. 수석을 가져갔던 사람은 며칠 뒤 다시 찾아와 수석을 돌려주고 갔는데, 돌려줄 때 이건 아무래도 돈이 안 될 것 같다면서 마구 화를 냈다. 미친놈. 수석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걸 포함하여 집은 삽시간에 폐가나 다름없게 되었다.

 아메프(IMF)가 터졌다고 했다. 그것은 아무런 기척이나 기색 없이, 우리 가족을 급습했다. 나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아메프가 무슨 송유관 같은 것이며 그게 갑작스레 경쾌한 소리를 내며 터져나가 비싼 석유가 줄줄 새는 모양을 상상했었다. 티브이는 이미 빚쟁이들에게 강탈당했고, 있었다 해도 티브이 따위를 틀어 놓고 시시덕거릴 분위기가 아니었으므로 그냥 엄마, 아버지의 말을 듣고 대충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어디서 뭐가 터졌든 안 터졌든 우리 가족은 빚쟁이들에게 무시로 쥐어 터졌다. 사람들의 말과 표정이 흉흉했고 나 또한 어렴풋한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나라에 큰일이 벌어진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아메프가 터지기 전 아버지가 하는 사업은 거의 공공사업에 가까웠기 때문에 안전할 거라고, 엄마가 걱정하며 물을 때마다 아버지는 대답했지만 아메프로 인한 파열은 우리 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예외가 아니어서 조금 억울하다. 모든 이가 통속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으니 누구의 고통도 진부하여 사연이 되지 못했고, 사연이 되지 못한 고통이라고 해서 쉽게 견뎌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메프. 그땐 나도 정말 힘들었지. 아, 당신도 힘드셨군요- 그러고 넘어가기엔 아메프는 너무나도 실재적인 고난이었다.

 중간업자가 망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받아야 할 어음 십억 원어치가 부도처리 되었고 아버지가 갚아야 할 자재 대금은 오억이 넘었다. 살던 아파트와 아카시아 자동차를 내놨지만 사람들은 헐값 밖에 쳐 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당신에게 신세를 졌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렸지만 닿는 사람은 없었다. 이따금 부모님 간의 대화에서 조 씨, 자살했대, 이런 말이 들렸다.

 아버지는 결국 1년 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갔다. 십억 원의 빚 중 삼억을 갚지 못한 대가였다. 죄목은 사기였다. 울 아버지가 사기를 친 건 아닌데. 돈을 못 받아서 못 갚은 게 왜 사기가 되는지 나는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팔삭둥이라 이해를 못 하는 건가. 그런데 그걸 아는 게 뭐가 중요할까. 아버지는 이미 감옥에 갔는걸. 아버지의 감옥 체험은 이미 아버지의 몸에, 기억 갈피갈피에 깊이 새겨져 돌이킬 수 없는걸.     

 나는 대전에 남았고 엄마는 돈을 벌러 서울로 떠났다. 대전에서 지낼 집을 알아보려 엄마와 고시원에 갔다가 곧바로 돌아섰다. 분명 남자 층, 여자 층이 분리되어 있다고 했는데 여자 층 세탁실에 허름한 행색의 남자들이 기웃거리는 걸 보았다. 방에 들어갔을 땐, 몹시 좁은 공간일 것이라는 점은 이미 예상했고 딱히 상관도 없었지만, 옆방의 사람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그려볼 수 있는 구체적인 소음, 이를테면 통화하는 소리는 기본이고 변기 뚜껑을 올리는 소리부터 그녀의 용무가 대인지 소인지, 휴지를 많이 쓰는 타입인지 적게 쓰는 타입인지까지 도무지 시치미를 뗄 수 없는 사사로운 기척들이 함부로 들려 포기했다.

 결국 비슷한 가격의 반지하 방을 골라 살게 되었다. 벽면 상단에 야트막하게 낸 기다란 창문이 볕이 들어오는 유일한 포털이었으나 완벽히 가려야 했다.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는 미친놈들이 종종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로 그렇게 했다. 좌우로 길게 빨랫줄을 걸고 빨래를 널어 가렸다. 거기서 살며 고등학교를 다니다 반년쯤 뒤엔가 빨래를 널어두었던 벽 쪽 면이 새카맣게 곰팡이 서식 군락이 되어버린 것을 발견하고는 기함을 하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것도 아메프처럼 사전 예고나 기척이 없었다. 서둘러 습기제거제니 곰팡이 제거 약이니 하는 것들을 사다가 흠뻑 뿌려 보았지만 무용했다. 그때부턴 창가에 마른 옷가지만 널어두고 빨래를 거의 하지 않았다. 속옷만 세탁을 하고 겉옷은 쉰내가 나건 뭐가 묻건 그냥 입고 다녔다. 그렇게 습기를 조절해봐도 한번 형성된 곰팡이 왕국은 번성만을 거듭했다. 왕국이 아니라 전국에 가까웠다. 세계지도와 어딘가 닮은 곰팡이 전국 지도는 이쪽은 미국, 이쪽은 중국, 이쪽은 소비에트 연방, 하는 식으로 구분을 할 수 있을 만큼 광대했다. 각 국가별로 유독 농도 짙은 검은색을 띠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가 왕국의 수도로 추정되었다. 나무젓가락으로 수도를 후벼팠더니 벽면은 세계대전을 갓 끝낸 전국처럼 흉측해졌다.

 그 지하 방에 서식하고 있던 것은 비단 나와 곰팡이만이 아니었다. 곰팡이가 서식하기 좋은 환경은 벌레들도 좋아했다.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꼬리인지 알 수 없는 벌레들이 시시로 기어 들어왔다. 창문 틈을 완전히 테이프로 봉하고 하수구와 싱크대까지 다 막아 두었는데도 벌레들은 자주만 눈에 뜨이며 나를 환장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어디서 솟아나는 걸까. 나는 각다귀라는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걸 그 방에 살면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모기와 비슷하면서도 모기의 50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 비행체를 섬뻑 대면했던 그 날, 나는 정말로 지구에 무슨 일이 생긴 줄로 알았다. 과장이 아니다. 으갹갹이었는지 아락락이었는지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잡을 생각도 못 한 채 한참을 떨었다. 그러다 소변이 엄청 급해졌는데 이불 밖을 나올 수가 없어서 버티고 버티다 조금 지리기까지 했다. 어린 시절을 내내 시골에서 보냈는데도 그따위로 흉악하게 생긴 벌레는 처음 보았다. 각다귀라든가 곱등이라든가 바퀴벌레나 쥐며느리와 같은, 이름마저 천격스러운 벌레들을 만날 때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양손에 살충제를 들고 뿌리며 자지러졌다. 그러다 보면 살충제가 금세 동이 났다. 살충제를 사느라 돈이 솔찬히 들었는데 그 때문에 밥을 못 먹게 되더라도 나는 살충제를 샀다. 앞서 말했듯 나는 곤충을 몹시 싫어하고 외골격을 가진 생명체는 모두 비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왜 뼈가 몸 바깥에 있냐고. 고시원 값으로 구할 수 있는 널찍한 방에는 하여간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방을 뺄 때 집 주인이 새카만 벽을 보더니 도배를 다시 해놓지 않으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겠다며 법석을 떠는 바람에 도배장이에게 물어봤더니 두 달 치 식비를 불렀다. 결국, 새카만 곰팡이를 손톱으로 긁어가며 직접 도배를 해야 했는데 사방에 날리는 곰팡이 포자를 종일 들이마시며 일하다 보니 곰팡이의 맛과 향이 뇌리에 새겨져 언제든 떠올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음, 이쪽, 이쪽, 그리고 저쪽에 곰팡이가 있습니다. 언제든 짚어줄 수 있다. 때마침 날 보겠다며 놀러 온 미주가 도와줘서 그래도 간간이 웃으며 도배를 마칠 수 있었다. 먼 데서 놀러 온 미주에게 도배를 시켜 미안해서 딱 죽을 맛이었는데 미주는 그것도 모자라 내게 소고기를 사 먹이고 예쁜 옷도 몇 벌 주고 갔다. 미주는 사이즈가 안 맞는 것 같아서 몇 번 입고 안 입게 된 옷을 들고 온 것이라고 했지만, 미주와 나는 지능을 제외한 키, 몸무게와 가슴 크기 같은 모든 신체적 수치가 일란성쌍둥이처럼 같았으므로 미주에게 안 맞으면 내게도 맞지 않을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꼭 들어맞아 불가사의했다. 그리고 옷마다 죄 상표 태그가 달려 있었는데 상표 태그를 떼지 않고 입는 유행은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헬기를 타고 떠나가던 날 끝이 났을 터이며 미주는 나름 유행에 민감한 편이어서 이 또한 불가사의였다.

 엄마는 서울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대전에 올 때마다 점점 수척해졌다. 묻지는 못했고 그냥 피골상접한 얼굴로 대략 유추해 볼 따름이었다. 엄마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엄마가 가끔 자취방에 올 때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담담한 얼굴로 엄마를 맞았다. 그즈음부터 나는 공부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는데, 뭐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거창한 의지의 발현이 있었던 것까지는 아니고.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절대 알바 같은 건 할 생각하지 말고 공부만 하라는 아버지의 옥중서신이 있기도 했고, 내가 돈이 없다는 걸 알게 된 대전 친구들은 박정하게도 금세 떨어져 나가버렸는데 그 바람에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으며, 미주가 날이면 날마다 전화를 걸어 이런 때일수록 공부를 해야 한다며 노래를 부르기도-미주는 정말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해서 어쩔 수 없이 시작했다. 미주는 매일 같이 내게 전화를 걸어 수학 문제를 받아 적으라고 하고는 끊지 않고 기다릴 테니 풀어내라고 했는데, 내가 웃으며 아이 왜 그래, 수다나 떨자, 라고 하면 갑자기 막 발광을 했다. 그때는 미주의 정서에 조금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하며 약간 섬뜩한 기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미주의 마음이 고마워 꾸역꾸역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리하여 미주처럼 공부를 잘하게 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성적은 조금씩 올라서 고무적이었다. 성적이 오르면서 잊고 지냈던 꿈도 다시금 떠올랐다. 그래. 나는 동물을 보살피는 일을 하기로 다짐했었지. 어릴 적 김씨 아저씨네에 이따금 들러 송백이도 살펴보고 돼지들 마릿수도 세어보고 했던 아저씨들이 있었는데 축산학과 출신이라고 했었다. 미주가 말한 수의학과는 어림도 없었지만 알아보니 축산학과라면 갈 수 있어 보였다. 그때 나는 기생이었다. 기초생활수급자. 성적이 조금 아슬했지만, 기생에게는 입학 가산점도 있을 거고 장학금도 얼마간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축산학과를 나와 농장을 돌면서 소와 돼지와 닭들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직업을 가진다면, 그럭저럭 목가적으로 괜찮은 삶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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