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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소 씨 Aug 31. 2022

여전히 쓸모있는 당신에게 (1)



 ‘덕장으로 다스리자.’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었다. ‘덕장으로 다스리자’라는 말을 하는 사람. 2020 경자년 1월 1일 오전 7시, 말간 새해가 떠오르던 순간 오봉춘(57세)은 카카오톡 프로필 메시지를 ‘덕장으로 다스리자’로 바꾸며, 팀원 여러분 경자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 한해도 열심히 달려 봅시다 저는 덕장으로 여러분을 다스리겠습니다, 를 시작으로 하는 이백 자 원고지 석 장 분량의 신년사를 팀원 단체대화방에 함부로 투척했다. 그 시각 렘수면 단계에서 사경을 헤매던 팀원들은 문자 소리를 들었으나 누군지 알 것 같았으므로 냅다 무시하고 이불을 끌어 올려 보지만, 하얀 쥐가 엉덩이를 요란하게 실룩이는 이모티콘과 떠오르는 해를 배경으로 오부장의 낡은 고추가 명랑하게 도드라진 사이클복 착장샷 따위가 서슴없이 전송되는 소리에 덜미를 잡혀 결국 전원 기상하기에 이르렀다. 부장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어 김과장도 올 한해 열심히 달려주길 바라 나는 덕장으로 다스릴게, 예? 아... 예, 부장님 안윤지 대리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네 안대리도 남편이랑 알콩달콩도 좋지만 올해는 꼭 아기를 갖길 바라요, 예? 아... 예, 와 같은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으로 새해 초하루마다 전국 각지의 직장인과 상인들이 마음에도 없는 안부를 생급스레 나누기 위해 이동통신사 서버의 트래픽을 낭비하는 강박적 풍습에 그들도 가세하며 떨떠름한 신년 인사를 주워섬긴다. 평소라면 그쯤에서 핸드폰을 던져두고 다시 이불 속에 파고들어 언제나 처절한 직장인의 수면욕을 얼러줄 테지만, 그날은 팀원들만 모여 있는 단체대화방에 이런저런 말이 올라오며 평년보다 부산했다.

 -조민지 사원(27세) : 선배님. ‘덕장으로 다스리자’가 무슨 뜻이에요?

 -김석오 과장(33세) : 글쎄. 또 어디서 뭘 보고하는 소릴까.

 -안윤아 대리(29세) : 그게 뭐든, 나 진짜 너무 싫어요. 저 딩크라고 그냥 말할까요? 키워줄 것도 아니면서 왜 만날 나만 보면 아기 타령이야.

 -김석오 과장 : 워워- 아기 안 가진다고 했다간 어디 구석진 회의실 끌려가서 대한제국 시절 이야기부터 2030 미래의 한국인 상까지 잔소리 듣다가 내상 입고 각혈하면서 나올걸. 그나저나 ‘덕장으로 다스리자’는 진짜 뭘까.

 -박주일 과장(34세) : 나 알 것 같음.

 -조민지 사원 : 오 역시 짬바이브. 뭔데요?

 -박주일 과장 : 자기계발서 하나 읽은 듯. 손자병법에 용장勇將, 지장智將, 덕장德將이 나오는데 그중에 제일은 덕이 많은 덕장이라 그랬거든. 그래서 나는 덕으로 다스리는 덕장이 되겠다, 뭐 그걸 ‘덕장으로 다스리자’라고 쓴 것 같은데.

 -조민지 사원 : 그럼 덕으로 다스리겠다든가, 덕장이 되겠다든가, 이게 맞지 않나요?

 -안윤아 대리 : 덕장이고 나발이고 저는 이만 자러 갑니다. 왜 매번 아침 7시일까요... 이제는 명절 아침 7시만 되면 자동으로 눈이 떠져요. 나 가스라이팅 당한 건가?     

*


 형님. 마을버스가 모퉁이를 지나 언덕을 우콰콰 내려가면 그다음 정거장입니다. 내려서 전화 주세요.     

 버스가 모퉁이를 지나 아침 햇살을 꺾으며 낯선 이름의 정류장을 향해 우콰콰 내달릴 즈음 오봉춘(58세)은 자신이 내릴 곳이 가까워졌음을 안다. 벨을 누르기 위해 일어서려던 찰나, 버스가 느닷없이 급정거하는 바람에 와락 고꾸라진 오봉춘은 쇠기둥에 얼굴을 그냥 갖다 박았고 아익 씨, 유리될 뻔한 정신줄을 간신히 붙들며 무어라 소리쳤으나 아무도 듣지 못한다. 거 운전 좀 똑바로 하쇼! 찔끔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오봉춘이 말한다. 아니 앞에 갑자기 리어카가 튀어나온 걸 어쩌란 말이오. 버스 기사의 말에 창밖을 내다보니 과연 백발 성성한 할머니가 폐지가 넘치도록 쌓인 리어카를 고샅길 한구석으로 느릿느릿 치우고 있다. 버스 기사는 익숙하다는 듯 운전을 포기한 채 핸들을 가슴에 끼고 아예 엎드려버리고, 기가 막힌 오봉춘은 크락숀이라도 좀 빵빵 눌러봐요! 다급함에 소리를 친다. 그 말을 들은 버스 승객들은 어머 노인이 힘든 일 하는데 좀 기다리지, 아저씨 마스크 똑바로 쓰세요, 라며 그를 있는 힘껏 힐난했고, 아니 빵 한 번 눌러달랬다고 뭐 이렇게까지... 오봉춘은 억울함에 복장이 터졌으나 여러분 사실 내가 오늘 긴급하고 박절한 사정이 어쩌고 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궁색하기 그지없어 모든 심란한 마음을 차치하고 그냥 여기서 내려달라며 문을 쾅쾅 두드린다. 그때 마법천자문을 읽고 있던 초등학생이 “쯧쯧. 삼강오륜 뒤지는 거 실화임?” 설타음을 섞어 말하자 오봉춘이 “뭐 인마?”하며 부풀어 오른 입술로 윽박질렀고 사람들은 그의 흉악을 확고히 하며 삼족이 멸해야 그칠듯한 시선으로 그를 부르댄다. “쾅쾅”이 “제발 좀 내려주세요”라는 곡진한 애원으로 빌붙을 즈음에서야 버스 기사는 관대한 문을 열어주었고 쫓기듯 버스에서 탈출한 오봉춘은 쩔쩔매고 있는 할머니와 그녀의 개를 흘겨보며, 젠장 늙었으면 집구석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못된 말을 지분거리더니 괜한 가래를 칵 톺아 탁 뱉어낸다. 그녀의 노쇠한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상대적으로 싱싱한 자신의 근육에 별 쓸모없는 자부를 느끼며 문득 팽팽한 긴장을 명령하고 펄떡 뛰기 시작했는데, 기세와 달리 스무 걸음도 못가 흐악 카악 심장을 토해낼 듯한 소리를 내며 한국유방건강재단이 주관하는 핑크런 하반기 마라톤 대회 출전의 꿈을 접는다. 아이 씨... 지각하게 생겼네. 그날은 오봉춘의 첫 출근일이었다. 그때 처남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형님, 어디쯤이신가요. J...마트가 보이네. 예? 거긴 한 정거장 전인데. 어, 미안해. 잘못 내렸어. 예, 빨리 오세요. 첫날부터 지각하시면 안 되죠. 어어, 다 왔어 빨리 갈게. 오봉춘은 퇴사 1년 만에 출근을 한다는 부푼 기대와 입술을 안고 쇠잔한 다리를 꾸짖으며 걸음을 재촉한다.      

*     

 오봉춘(57세)이 회사에서 잘리게 된 까닭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불운의 시작이었다기보다는 행운의 만료가 있었다, 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의 회사는 공장에서 쓰이는 설비를 제조하는 회사였는데, 처음엔 기계 가격을 아주 후려쳐 고객의 눈을 멀게 한 뒤 일단 설비를 꽂아 넣고 고장이 발생하면, 어유 이걸 어쩌나 하필 비싼 게 망가져 버렸네- 하며 덤터기를 씌워 폭리를 취한다거나, 미리 접근한 영업사원이 부품들을 나열하며 요건 1억이고요 저건... 한 3억쯤? 시세에 따라 달라요 다금바리처럼, 하는 식으로 겁박하며 고액의 설비 관리 서비스 계약을 강권하여 수익을 내는 구조였다. 원래는 작은 회사였는데 20년 전, 프론티어 정신이 투철했던 미국의 한 기업이 그의 회사를 적대적으로 인수하면서 외국계 대기업으로 급성장했다. 그런 연유로 회사의 초기 멤버와 대기업이 된 후 입사한 사람들과의 수준 차이가 상당했고 그간은 회사의 경영이 호시절이라 그럭저럭 반목을 버틸 수 있었으나, 2020년이 되면서 코로나를 비롯하여 신화통신에 따른바 시진핑이 트럼프의 트위터질에 삐쳐 앞으론 미국 물건을 안 사주겠다고 퉁바리를 놓는 등 본사의 분위기가 시뜻해진 상황에 더하여 기타 불경기적 요소가 한꺼번에 덮쳐들면서 30% 감봉이라든가 티오 동결 등의 위기가 발생했다. 감봉 때도 직원들의 동요가 심각했는데 티오가 동결된다는 공지가 나오던 날, 결국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퇴사자 보충도 안 해 주고, 도대체 어떻게 일을 하라는 겁니까? 얼마 전 모 부장이 고객과 협상을 하는 자리에 굳이 따라와 ‘여자가 그렇게 떽떽거리고 대가 세면 남자한테 사랑을 못 받아요’라고 말한 뒤 크게 웃는 바람에 그 영업 건은 물론이고 기존 계약까지 모두 해지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회사에 일 안 하는 부장들, 아니 가만히나 있으면 다행이지, 없는 인원으로 꾸역꾸역 만들어 가는 일에 코 빠뜨리는 억대 연봉 부장들, 한 명만 내보내면 신입사원 셋은 뽑습니다. 수년간 스펙 쌓고, 박봉 인턴질로 경험 쌓으며 이제나저제나 학수鶴首처럼 목을 빼고 취업문이 열리기를 고대하는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작정 과, 차장급들 허리 졸라 터뜨릴 생각만 하지 마시고 효율적인 사내 인력 재편성을 제안합니다.>


 누군가 투서를 넣었다. 그는 이를 영어로 단정하게 번역하여 본사의 위기관리센터에 곧장 찔러 넣었고, 본사는 한국으로부터 온 이 메시지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한국 지사장을 본사로 불러 가열한 쫑크를 먹인 뒤 돌려보냈다. 복귀한 지사장은 씩씩거리며 ‘모든 팀장은 본인이 수행 중인 과업 개선안을 본부장에게 PT 할 것. 자료조사부터 PT 작성까지 모두 직접 할 것. 부적격 시 사직 권고 예정. 회사의 사정이 정리해고를 인정할 만큼 긴박하다는 인정을 받았으니 이 점 참고 바람.’이라는 메일을 전 직원에게 살포했다.

 투서는 몹시 시의적절했는데 임원들은 비용 절감을 위한 수단으로 인원 감축이 가장 상수임을 알고 있었으나 명분이 없어 이면지 쓰기 운동 따위로 정신 재무장을 부르짖던 차였고, 감봉과 티오 동결로 흉흉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은 입방아를 찧으며 냉소하고 경멸할 대상이 필요했는데, 부모도 아닌 주제에 감히 부양받는 저부가가치 사내 고령자들은 거기에 딱 들어맞았다. 사람들은 이미 누가 누가 PT를 조지고 신세를 조질지에 대해, 갓 신내림을 받아 엔간한 작두쯤은 그냥 씹어먹는 새끼무당보다도 선연하게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이런 변고의 당사자들에 관한 이야기 패턴이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으레 반복되듯, 오봉춘 역시 자신 앞에 드리워진 불길한 그늘을 전연 감지하지 못하고 능력 없는 부장들을 쯧쯧 안타까워하며 천진난만한 태세로 소일했다. 어느 날 그는 김석오 과장을 불러 자신은 이런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며 사뭇 늘어놓았는데, 김석오 과장은 투서를 쓴 당사자였으며 얼마간은 오봉춘을 의도하여 벼린 칼날이었으므로 그는 후들대는 심장을 다스려가며 오봉춘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어때? 저 그게요, 도움을 드리면 안 된다고 해서... 아니, 도와달라는 게 아니라 내 아이디어가 기가 막히지 않냐고, 그냥 말해주는 거야. 다른 부장한테 가서 말하면 안 돼, 알지? 아... 예예. 그건 걱정 마십쇼.     

 며칠 뒤 신임 본부장 양선주 상무(48세)의 주관하에 부장들의 PT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경쟁사에서 ‘aka 말레피센트’로 통하며 화려하게 활동하던 중, 석 달 전 오봉춘의 회사에 본부장으로 모셔진 자다. 앞 순서 3명의 부장 중 한 명은 생존했고 두 명은 퇴출 대상이 되었는데, 아직 공식 발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회의실 밖으로 비어져 나오는 새된 호통 소리와 부장들의 깔쭉깔쭉한 얼굴을 경청한 사람들은 누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보편적인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오봉춘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그때까지도 호통을 들은 부장들을 쯧쯧 안타까워하며 상무고 나발이고 ‘경험’도 없는 ‘나이’ 어린 ‘여자’가 뭣도 모르고 본부장 자리를 꿰차고 앉아 헤매고 있을 터인데 이 회사의 유구한 역사를 모두 알고 있는 나, 덕장 오봉춘이 금번 PT를 통해 단단히 교육해주리라- 작심 충만하고 있었다.     

 -오부장님. 시작하시죠.

 오봉춘이 문답무용 PT를 띄웠다. 양선주 상무는 초록색 아이섀도를 덧발라 고추냉이처럼 맵싸한 눈길로 오봉춘의 PT를 응시하더니 문득 깔깔 웃다가 또 문득 웃음기를 싹 지우고 표변하여 말했다.

 -저기, 부장님.

 -예.

 -영어 페티시 있으세요?

 -예?     

 ‘Smart Financial Strategic Maintenance Service Insurance Program Based on Usage Base for Low-end System User for Increasing Service Revenue and Profit...(중략)’      

 오봉춘이 띄운 다섯 줄짜리 PT 제목이었다.

 -영리한 재무적 전략적 프로그램이... 매출과 이익 상승을... 해석도 안 되네요. 아니 다들 왜 이런지 몰라. 의미 좋은 영어 단어 몇 마디 이어 놓으면 무슨 없던 가치가 불쑥 생기는 것처럼. 오부장님 막상 본사 회의 때는 말 못 알아듣고 엉뚱한 소리로 회의 지연시킨다고 말들이 많던데요.

 -아뇨? 허. 누가 그럽디까?

 -뭘 아니에요. 본사에서 직접 저한테 말하던데.

 -그런 일 없어요. 대체 어떤 놈이 그런 소리를...

 -높은 놈이에요. 됐고요, 다음 페이지 볼게요.

 다음 페이지는 유황 오리집 벽면에 붙어 나부끼며 피부, 간, 심장, 항산화, 콜레스테롤 감소 등 인체의 모든 것에 유리하다는 구태의연한 과장 광고와 유사하게 만들어진 오봉춘의 입사 이래 성과 목록이었다. 다음 페이지도. 그다음 페이지도.

 -아이, 짜증 나. 여기 정말 업계 1위 맞나요? 연봉이... 한 일억쯤 되시죠? 성과급도 별도로 받으시고. 회사에 미안하지 않으세요? PT는 됐고, 그냥 말로 해 보시죠. 말로라도 부장님의 인사이트가 드러나면 제가 잘 보고 할게요.

 -인사이트가 뭔가요?

 -어머, 깔깔깔.

 ...

 -자, 보통 매출을 좇으면 수익성이 나빠지고, 수익을 좇으면 그 반대의 결과가 나오는데 부장님은 둘 다 올릴 수 있다고 아주 낭만적인 주장을 하셨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한 번 설명해 보세요.

 -아, 그거라면 제가 또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제가 지금 저희 팀을 덕장으로 다스리고 있고요, 그간 내실 있는 회의를 통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취합해서 혁신적인 성과를 내 왔는데요, 얼마 전 4차 산업 혁명에 대비하여...

 -그만요.     

 아! 고도성장기 세대들이여! 근면하기만 하면 다 보상받던 시절의 사람들이여! 아직도 국민교육헌장이 만사에 형통하다고 믿으며 21세기를 사는 20세기 소년들이여!

 오봉춘의 말을 멈추고 아이섀도우가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히 미간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겨있던 말레피센트 상무는 마침내 결심하고 오봉춘을 향해 소멸 마법 주문을 캐스팅했다.      

 -부장님,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떤 미국 기업의 적대적 M&A에 의한 반사적 광영으로 누려온 30년간의 기름진 직장생활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부장님. 어 박과장. 이거 남긴 물건들은 모두 버리시는 거죠. 어? 그건 내가 후배들에게 보라고 남겨준 자료들인데, 거기에 보면 말이야. 여보세요? 박과장 어디 가. 참 안대리, 우리 환송 회식 장소 말이야. 부장님 제가 그날 일이 있어서 참석이 어려울 것 같아요. 저도요. 저도요. 저도요. 저도요. 그래? 그럼 다음에 시간 맞춰서 한 번 보자구.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예예, 그러시죠. 민지 씨, 이따가 이거 나랑 같이 버리러 가자. 박과장, 그거 후배들을 위한 자료라니까? 아 예예. 민지 씨, 이따 점심 먹고 잠깐 시간 되지?

 사양 말고 받으세요, 자애로운 퇴직금과 더불어 더 이상의 출근은 사양합니다, 라는 친근한 통보를 받고 세상으로 방류된 고령의 부장은 총 열 명이었는데, 면접 과정에서 상호 중상모략하는 분투 끝에 입사한 신입사원은 어쩐지 세 명에 불과했다. 남는 예산으로 감봉조치 푼대. 청년 취업난이 어쩌고 하며 키보드를 나불대던 김석오 과장은 그 소식을 듣고 학수처럼 고개를 빼들고 취업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청년들에 대한 모든 상념은 깡그리 잊은 채 늘어난 월급을 어떻게 하면 아내 모르게 횡령할 수 있을지에 대해 궁리했다.     

*     

 그래, 30년이면 할 만큼 했지. 좀 쉬어. 오봉춘이 퇴직금에 더하여 회사에서 위로금 조로 챙겨준 돈을 싸 들고 왔을 때 그의 아내가 건넨 말이었다. 처음 몇 달은 칩거하며 죽은 줄로만 알았던 화초를 살려내거나 사이클 동호회 회원들과 바닷가로 청유를 떠나 짭짤한 해풍을 가르며 자전거를 십오 분쯤 타다가 헉헉, 그만 좀 쉽시다, 전망 좋은 횟집을 하나 골라 바닷속으로 젖어 드는 태양을 바라보며 소주를 적시고, 다가닥 제 몸을 두드려 만든 박자에 구슬픈 노래를 불러 적시고, 각자의 세월만큼 켜켜이 쌓아둔 자랑과 한탄을 과장되게 풀어 적시며 사교했다. 바다나 꽃을 배경으로 다소곳하게 단체로 고추가 불거진 사진도 많이 찍었다. 그와 같은 낙락한 휴가를 즐기던 어느 날, 오봉춘의 장녀가 그에게 말했다. 아버지, 영국에 보내주십시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현대 한국 사회는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되어있고, 봉사활동을 해도 아프리카에서 하지 않으면 쳐주질 않습니다. 아프리카에 가긴 좀 무서우니 영국 어학연수를 보내주십시오. 코로나로 흉흉한 데 지금 가야겠냐. 그리고 꼭 비싼 영국으로 가야 하는 거고? 예, 졸업 전에 다녀와야 합니다. 그리고 인사담당자들이 영국식 발음에 껌뻑 죽는다고 합니다. 우아-타(워터). 멋지지 않습니까. 오봉춘은 영어 페티시가 있느냐는 말을 들었던 모멸의 순간을 상기하며 딸의 어학연수를 허락했다. 누나가 어학연수를 떠나는 걸 본 차남은 어어, 우리 집에 돈 많나보다고 생각하며 즉각 들러붙었다. 아버지, 제가 나온 대학 학벌로 취업은 불가능합니다. 어학연수를 다녀와도 안 되는 것이냐? 예, 저는 완전히 틀렸습니다. 그럼 어쩌자는 것이냐. 카페를 차리고 싶습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시러베 장단에 랩하는 소리냐, 코로나로 잘 되던 가게도 문을 죄 닫는 판에. 제게 아주 알찬 사업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얼마 전 해병대를 전역한 차남은 그즈음 해병 문화에 심취해 있었는데, 군대에서 기괴한 필체의 글씨를 배워와서는 복학은 안 하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그 글씨를 연마하거나 해병 전우 모임에 나갔다가 술에 취해 돌아와 해병 승전가를 울부짖다 고꾸라지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다. 차남이 제시한 아이디어는 음료를 수통에 담아 제공하고 디저트로 뽀글이와 전투식량을 내어놓는 등 해병대 전우 모임 전문 카페를 차리겠다는 것이었다. 의리 끈끈하고 우애 돈독한 전우들이야 당연히 찾아 줄 것이고 해병들이 득시글거리면 그 남성적 매력에 취한 여성 고객들도 자연히 유치될 것이므로 자신의 아이디어는 타당하다는 조리였다. 오봉춘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집어치우라며 두들겨 쫓았으나, 어차피 취업도 못 할 거 자기는 노숙자가 되어버릴 것이라는 둥 새우잡이 배를 타겠다는 둥 차남의 겁박에 흔들린 그의 아내가 아무래도 저 아이는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기는 그른 것 같으니 제 원하는 대로 장사시켜줍시다, 해병대를 나왔으니 그쪽 일에는 성실하지 않겠습니까, 설득하는 바람에 또 몇천을 해줬다. 그렇게 숭덩숭덩 쓰고 나니 팍 줄어버린 퇴직금 잔액을 보고 마음이 흔들린 그의 아내는 초연했던 당초의 입장을 훌떡 뒤집으며, 우리는 어디 갭투자로 알박아 둔 부동산은 고사하고 비트코인 한 닢 쟁여둔 바 없고, 사금파리만한 유산 물려줄 부모도 없고, 국민연금 수급까지 거진 십 년은 남았는데 그동안 어찌 버틸 것이며, 만성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는 연금 재정이 십 년 뒤에 파탄 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어수선한 시절에 살고 있으니 우리는 이제 큰일 났다며, 나가서 식모살이라도 알아봐야겠다고 야단야단 몰아세우는 통에 오봉춘은 또다시 취업전선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런 변고의 당사자들에 관한 이야기 패턴이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으레 반복되듯, 오봉춘은 그까짓 취업 내가 마음만 먹으면- 호언하며 공인중개사 합격은 자신들에게 맡겨달라는 학원에 다액을 송금하고 공부를 시작했으나 과락으로 낙방하고 금세 포기했다. 경비원이라도 해 볼까 기웃거렸으나 쌍욕을 듣고 따귀를 맞고 결국 자살까지 했다는 뉴스기사를 보고 식겁하여 그쪽은 알아보지도 않았다. 경비원 갑질 금지법을 만들겠다는 여론이 들리기는 하는 것 같기는 한데 발의와 통과와 발효를 거쳐 정착까지- 그간 대한민국의 입법 행정 행보를 되짚어 가늠해 보았을 때 아직 몇 명쯤 더 죽어야 가능할 것 같았으므로 여론을 믿고 뛰어들 순 없었다. 퇴직한 지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환갑도 안되어 정처 없이 빈둥대는 그를 보다 못한 아내는 작은 회사를 경영하는 자신의 동생에게 일자리를 사정했고 그런 연유로 오봉춘은 처남의 회사에 출근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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