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살아갈 삶의 터전과 가장 비슷했던 여행지를 동기화 해 보기
계획을 세우고 지켜 나가면서 삶을 통제하며 살아온 성격의 나로서는, 머릿속 계획이 틀어질 때 굉장히 당황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하지만 돌아보면 나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인생의 큰 순간들은 모두 머릿속 계획과는 상관없는 일들의 것이었다.
계획이 틀어져서 인생이 꼬였다(?)고 느낀 사건의 시작은 국어교육과에 갈 수 없어 재수생이 될 각오로 일어교육과를 지원했던 일이다. 노력과 능력의 한계로 지원했던 모든 대학교의 국어교육과로부터 불합격 통보를 받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중학교 때 다니던 공부방 선생님을 찾아갔었다. 그 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어교육과에 지원해 보라고 하셨고, 이미 10개 이상의 수시 원서 탈락으로 80만원에 육박하는 돈을 날려먹은 나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일어교육과에 지원했다. 2월 막바지 즈음 재수학원을 알아볼까 고민하던 차, 예비 합격 통보를 받고 2월 23일에 나는 정시 막차를 타고 대학생이 되었다.
꼬인 인생의 시작(?)으로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이라는 나라에 흥미가 생겨 2013년에는 북해도에 있는 한 대학교의 계절학기 수강생이 되었다. 학교 장학금과 부모님의 사랑이 담긴 돈 봉투를 들고 한 달간 북해도에 있었는데, 매일 새벽 6시에 제설차가 다니는 자그마한 시골 동네에서 굉장히 평온한 마음으로 한 달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매일 아침 제설차가 다니면서 사람이 다닐 길을 터주는 북해도 에베쓰 시의 눈 덮인 마을을 보면서 그 곳에 사는 친구에게 이 곳의 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야기했을 때, 일본인 친구는 해맑은 표정으로 '우리 지역에서는 눈을 하늘에서 내리는 쓰레기라 부른다'고 말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10년이 지난 지금 내가 와 있는 곳은 강원도 산골에 있는 면 단위의 시골 마을이다. 일본어 교육 전공이 내 삶의 예정에는 없었던 뜻밖의 선물이 된 것처럼, 전 남자친구이자 현 남편의 거주지인 이곳에 와서 적응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차를 주차하고 집으로 들어가기 전, 함박눈이 차를 뒤덮는 일상이 당연한 듯 와이퍼를 올려 두고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매우 신기한 나로서는 남편의 일상에 밴 행동 하나하나가 새롭고 특별한 이벤트이다.
엊저녁 내린 폭설로 매 시간 제설차가 도로에 쌓인 눈을 치우는 모습을 보니 10년 전에 있었던 에베쓰 시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여행의 기술>에서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외국에서 이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고향에서 갈망했으나 얻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라는 명구를 남겼다.
마을을 새하얗게 뒤덮은 하얀 눈이 아름다워서 남편 가게 앞에 쌓인 눈도 직접 치워 봤다. 제설 작업이 당연한 일과이자 과업인 이 곳의 작은 일상들이 나에게는 새롭고 신비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문득 인생을 여행처럼 살면 매일이 이국적인 경험이자 색다른 순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