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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로플 Jan 27. 2024

어바웃 평창 (2) 삶의 터전 옮기기

짐 정리부터 전입신고까지, 삶의 터전을 분갈이하다.

  살면서 처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서울의 집에 남아있던 모든 짐 정리를 끝낸 후 기차에 몸을 실었을 때, 연애할 때부터 주말 부부로 지내는 동안 숱하게 탔던 그 열차가 낯설게 느껴졌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이었던 서울이 '떠나는 곳'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서울은 진정한 의미에서 내가 그리워할 고향이 되었다.


  평창에 와서 짐정리를 하고 새 출발을 응원하러 함께 와준 엄마와 어머님, 아버님과 저녁 식사를 했다.

새로 사귄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바쁜 일주일을 보냈다. 겨울 바람만큼 고요한 집 뒷산의 설경을 보면서 집을 가꾸고, 책을 읽고, 가족과 함께 먹을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은 잔잔한 만큼 즐거웠다. 하지만 가슴 한편에는 알 수 없는 막막함과 불안함이 자리하고 있었고, 불안함은 매 순간 내 곁에 있었다.


  전입신고를 하고 나서 사흘 정도는 아무도 모르게 많이 울었다. 집안일을 하다가 울컥하기도 하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눈물이 나기도 했다. 나에겐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바뀌어 있는데 이곳은 너무나도 그대로여서 그랬던 듯하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쳤던 서울의 음식점, 소품샵, 가게들이 생각났다. 답답하면 걸어서 10분 만에 갈 수 있던 예쁜 카페가 이곳에서는 택시로 10분, 걸어서는 1시간 30분이었고, 택시비는 강릉 가는 KTX 편도 값보다 비쌌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낯설게 느껴져 움츠러들고 있었다.


  이사 온 지 넷째 날에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강릉으로 갔다. 가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교보문고에 가고 싶었다. 서울로 가고 싶었으나 서울행 티켓을 끊으면 도피하는 것 같아 강릉행을 택했다. 집에서 역까지는 차로 5분, 도보로는 25분이었다. 서울의 도보 25분보다 시골의 도보 25분은 생각보다 훨씬 길었다. 짝꿍이 추천해 준 독립서점에 들러 책에 둘러싸이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근처에 마음 붙일 수 있는 서점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진부역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문득 예전에 열심히 키우던 로즈마리 생각이 났다. 로즈마리는 겉보기에는 키우기 쉬워 보이지만 생각보다 까다로운 품종으로, 분갈이를 잘못하면 쉽게 죽는다. 꽃집에서 2천 원을 주고 담아 온 그 아이에게 정이 잔뜩 들어 열심히 키웠었는데, 잘 크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어서 직접 뒷산에 가서 흙도 담아 오고, 온도도 맞춰가며 섬세하게 분갈이를 했다.


  정성이 들어간 만큼 나의 로즈마리는 무려 세 번의 분갈이를 견디고 무럭무럭 자랐다. 그런데 네 번째 분갈이부터는 슬슬 귀찮았다. 분갈이를 세 번이나 잘 견뎠으니 네 번째 화분에도 잘 적응하겠지 하는 안심과 안일함의 그 중간 지점에서, 더 넓은 화분에 좋은 흙을 깔고 삶의 터전을 새로 만들어 주었지만, 로즈마리는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시들었다. 뿌리가 썩었던 것을 보니 아마도 통풍이 안 되었던 것 같다.


  삶의 터전을 분갈이(?)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전학을 오는 아이들을 더 따뜻하게 대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리운 것은 그리운 기억으로 두고, 새로운 화분에서 통풍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들이되 뿌리는 스스로 내려야 한다는 것도.


  이사를 오고 나니 갓난아이가 된 기분이다. 사소한 일들에도 굉장히 움츠러들고 있다.

  아가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숨 쉬고 밥 먹고 응가하는 일들이 모두 매우 큰 용기를 내는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내가 이곳의 모든 것이 새롭듯, 아가들에게는 매일매일이 새롭겠구나 하는 생각도.



이삿짐을 다 부치고 탑승한 KTX 기차 안. 매번 오던 곳이었지만 이날은 특히나 어색했다.


양떼목장 가는 길에 발견한 황태 덕장. 송어축제 현장에서 열심히 송어를 잡는 관광객들. KTX 타러 역까지 걸어가면 볼 수 있는 오대천의 정경.


본의 아니게 도로의 민폐가 되고 있다. 남편이 고생이 많다. 언젠가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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