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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정 Nov 01. 2020

Massive transfusion

'이런 상황이 진짜 중환자실이구나'라고 처음 느낀 날

"흰색 운동화 깔끔하니 잘 어울린다. 근데 언제까지 흰색 운동화를 신는지 볼게"


얼마 전 중환자실 동료 간호사가 웃으며 내게 던진 농담이다. 자신도 처음엔 병원 정책에 따라 흰색 운동화를 신었는데 Hepatic encephalopathy 환자가 (간성뇌증; 심한 간경화 등으로 암모니아와 같은 독소가 혈류를 타고 뇌로 이동한 상태) esophageal varices bleeding으로 (간문맥 압력의 증가로 정맥벽이 얇아지고 특히 식도정맥류 발생으로 인한 출혈의 위험성이 증가한다. 출혈로 인한 치사율이 30-50% 달하는 응급상황이다) 흰색 운동화가 피로 범벅이 된 후 바로 바꾸었단다. 나한테 일어날 일은 예상하지 못한 채 나도 그때는 같이 웃었다.

 



심장 관상동맥 수술 수차례, 고혈압, 당뇨, 주 3회 혈액 투석 등등 수많은 기저질환을 가진 나의 환자는 양쪽 폐에 물이 차서 호흡이 쉽지 않은 상태였다. Creatinine이 높고(신장이 적절히 노폐물을 배출하지 못하는 상태. 투석 환자의 경우 대부분 높은 편이나 나의 환자는 더 높아지고 있었다) 항응고제 복용 등으로 혈액 응고에 관여하는 혈소판 수치가 낮은 상태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흔히 사용되는 이뇨제 투여가 쉽지 않았고 결국 의사는 Thoracentesis를 시행했다.(흉강천자, 직접 바늘을 꽂아 폐의 물을 뽑는 시술)


그 시술이 성공적으로 되면 환자의 호흡은 훨씬 편안해진다. 하지만 나의 환자는 그 시술 후 급격히 혈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환자의 의식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병실에서 초음파를 시행한 의사는 출혈을 의심하며 다시 흉관을 꽂았다. 피검사 시행 후 승압제 투여가 시작되고 곧 기도 삽관이 이루어졌다. 그 흉관을 통해 선혈이 순식간에 1L 이상 쏟아졌다. 다량의 수혈을 위해 중심정맥관(신체의 중심에 위치한 큰 정맥에 삽입하는 카테터) 삽입이 이루어지고 그 후로 엄청난 양의 적혈구, 신선동결혈장, 혈소판 수혈이 시작되었다. 출혈을 잡기 위한 소작술을 하느냐 (주로 대퇴부에 카테터를 꽂아 출혈 부위를 찾은 후 소위 지지는 형태로 출혈을 멈추게 하는 시술) 아니면 바로 수술실로 가느냐를 판단하기 위해 외과팀이 투입되었다. 다행히 환자는 의식을 잃지 않았고 수혈 후 점점 혈압과 호흡이 안정되었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병원은 소작술과 같은 시술을 시행할 수 없어 구급차를 불러 더 큰 대학병원으로 환자가 이송되었다. 이송 도중에도 수혈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 응급 상황 동안 다른 환자들을 간호하는 한 명의 간호사를 제외하고 모든 간호사들이 뛰어들었다. 나는 다른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최대한 빠르게 하려고 노력했다.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조차 모르겠다. '아! 이런 곳이 정말 중환자실이구나'라고 느꼈다. 다행히 환자는 살았다.


환자의 의식뿐만 아니라 소위 나의 '멘탈'을 부여잡으려고 노력한 하루였다. 중환자실 간호사로 일을 시작한 후 바쁜 날은 많았지만 이렇듯 진정한 응급 상황은 처음이었다. 어안이 벙벙했으나 마음을 다잡으며 또 다른 나의 환자를 간호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동료들은 웃으며 "Welcome to real ICU" 하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중환자실에서 자신의 환자가 처음 이러한 상황에 놓이면 어찌할 줄 몰라 아예 손을 놓거나 울거나 하는 간호사도 많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상황을 보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잘했다고 나를 격려해주었다. 아직 중환자실 신출내기 간호사인 내가 뭘 그렇게 잘 대처했겠는가? 그럼에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동료들이 고마웠다.


퇴근길 버스 안에서 마치 바둑의 복기를 하듯 내가 놓친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았다. 그 이성적인 시간 후에 창 밖을 내다보는데 문득 더 배우기 위해 중환자실이라는 새로운 도전으로 나를 던진 그 선택을 잠시나마 후회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배우는 것에 있어 누구나 처음은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환자가 살아주었으니 그 처음의 경험이 최악은 아니라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피로 더럽혀진 나의 흰색 운동화를 빨기 시작했다. 아직은 다른 색 운동화를 사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저 처음이라 느낄 수밖에 없었던 두려움을 씻어내듯, 이 경험을 통해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다는 의지를 다지듯, 짐짓 중요한 의식을 행하는 것 마냥 나는 그렇게 나의 흰색 운동화를 정성껏 빨았다. 그리고 내 마음을 위로하듯 새하얀 운동화가 따스한 햇살에 뽀송뽀송하게 잘 마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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