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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정 Oct 25. 2020

광합성 하는 날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오랜만에 쉬는 날 볕이 참 좋다. 12시간 나이트 근무 후 몇 시간밖에 눈을 붙이지 못했지만 산책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햇살 좋은 날 발길 닿는 대로 혼자 혹은 누군가와 걷는 나만의 '소확행'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얼굴에 닿는 차가운 바람이 따스한 햇살과 어울려 기분 좋게 청량하다. 낙엽을 밟을 때 서걱거리는 소리가 왠지 경쾌하게 들린다. 평소에 무심히 지나쳤던 길가의 나무들이 오늘 보니 가을의 다양한 색으로 물들었다. 그 색색의 나무들이 각자의 매력을 가진 친구들을 닮았다. 그래서인지 문득 한국의 친구들이 그립다. 내 곁을 지나치는 사이클리스트들의 페달링이 부드럽고도 힘차다.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그들의 근육질 뒷모습에 잠시간 감탄하기도 한다.



몽헤알 언덕으로 향하는 중간에 규모가 상당한 공원 묘역을 지나치게 되었다. 묘역들을 보아서인지 어젯밤 일이 문득 다시 떠오른다. 지난밤 근무 중 1분여 짧은 정전 사태가 있었다.


여러 질환의 합병증으로 결국 어제 왼쪽 엄지발가락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은 나의 첫 번째 환자, 밤부터 갑작스러운 심방세동(혈전이 생길 위험성이 큰 부정맥)을 보여 꽤나 바빴었다. 나의 두 번째 환자는 심한 알코올 중독으로 거의 뇌사에 이른 상태이다. 가슴은 아프지만 이 환자분에게 솔직히 해 드릴 것은 많지 않았다. 당연히 나의 우선순위는 심방세동을 보인 환자에게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그 우선순위는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인공호흡기를 가진 나의 두 번째 환자는 정전이 되면 스스로는 거의 숨을 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Ambu bagging을 하며 호흡기 치료사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정전이 되면 인공호흡기가 가장 우선적으로 배터리 모드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가 낙후된 병원 시설의 문제인지, 재정의 문제인지 어젯밤엔 물어볼 정신조차 없었다.


어젯밤 일을 회상하며 공원 묘역을 지나치자니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죽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일상의 일들을 우선순위에 따라 하고 있는 건가?' 각기 다른 삶을 살았겠지만 죽음 후의 모습은 거의 비슷해 보였다.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가볍게 살아가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호수의 수면이 햇살에 더욱 눈부시게 반짝이는 듯 보였다. 잔디밭 언덕 위에서 아래로 뒹굴며 끊임없이 웃어대는 아이들의 소리가 정겹다. 다양한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의 소리도 배경 음악처럼 느껴진다. 잔디 위에 누워 따스한 햇살을 받고 있으니 나른하게 졸음이 밀려왔다. '소소하게 행복이 되는 일을 많이 하며 살아야지' 생각하며 떠오르는 것들을 메모해 본다. 내 마음속에도 몽글몽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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