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라면 나가야죠 저희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한국의 3차 대형병원에서 환자의 DNR(Do Not Resuscitate: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는다)이 결정되면 가족들은 서운한 심경을 그렇게 내게 표현하곤 했었다. 3차 대형병원의 특성상 약간의 과장을 덧붙인다면 DNR 환자는 다음날 당장 집이나 거주지 인근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보호자 입장에서는 큰 병원에서 쾌유를 바랐던 기대가 무너진 것도 모자라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느낌일 것이다. 그런데 쫓겨나가는 듯한 느낌마저 더해지니 탐탁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일 테다.
간호사였으나 캐나다에 오기 전까지는 큰 병원의 특성상 실제로 환자의 죽음을 직면할 일이 많지 않았다. 앞선 예와 같이 DNR 환자들은 급하게 타 병원으로 전원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소위 '가망이 있는' 환자들은 상태가 악화될 경우 중환자실로 보내지기 때문에 내가 환자의 죽음을 직접 보는 일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하지만 몬트리올에서 간호사를 한 후 약 일 년 간 열 분이 넘는 환자들의 임종을 보아야 했다. 물론 한국과 이곳의 병원 규모의 차이로 인해 그 경험치가 올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환자의 임종 간호를 하게 되면서 한국과 캐나다의 '연명치료'의 차이에 관해 자주 생각해 보게 된다.
한국에서 환자의 임종 간호를 많이 해 보지 못했다. 그 부분에서 생긴 오해나 실수가 있다면 댓글로 남겨 주시기를 바란다. 나의 경험을 통한 개인적 의견이며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쁨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무엇보다 캐나다의 경우 한국에 비해 '연명치료'란 단어를 거론하는 것이 가볍고 더 세분화되어 있는 듯하다. 아래 첨부된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Level of Care (치료의 정도)는 환자 상태에 따라 재평가되어야만 한다.
Level of Care Foam
Level 1 : CPR(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 심폐소생술)과 ICU(Intensice Care Unit: 중환자실) 치료를 모두 시행하는 단계
Level 2 : 심폐소생술 시행에 있어 제한사항들을 환자와 가족들이 의사와 상담 후 결정할 수 있는 단계.
Chest compression (심폐소생술에서 심장마사지)
Intubation/Mechanical ventilation (기도 삽관과 인공호흡기)
Defibrillation / Cardioversion (제세동과 심장율동 전환)
Vasopressors (혈압을 높이기 위한 승압제 투여)
BIPAP only (간헐적 양압기도 유지기) : 기도의 양압을 유지하는 비침습적 인공호흡기 정도로 설명하겠다
Other restrictions, specify : 추가적인 제한 사항이 있는 경우 구체화할 수 있음
Level 3 : 제공 가능한 모든 처치를 수행하되 Level 2의 모든 심폐소생술과 중환자실 치료는 하지 않는 단계
Level 4 : '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로 환자의 편안함을 중점으로 하는 단계. 하지만 5단계인 임박한 임종 단계는 아니므로 튜브를 통한 경관 영양, 수액치료, 피검사 또는 X-ray검사 시행 여부, 항생제 투여, 수혈 또는 침습적인 처치에 관해 제한사항을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결정할 수 있는 단계
Level 5: 임박한 임종 단계, 환자의 편안함과 통증의 완화가 주요 목적
개인적으로 이곳의 Level 2 단계가 경험할수록 괜찮은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경우 심폐소생술에 심장마사지, 기도삽관, 제세동과 승압제 사용이 모두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심폐소생술을 하다가 죽거나 살거나 둘 중 하나가 되는 경우가 많다. 심폐소생술 후 환자가 다시 좋아진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하지만 심폐 소생술 중에 환자가 돌아가시는 경우, 환자의 고통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환자와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처치실 문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허망하게 환자의 마지막을 통보받기도 한다. 의사의 잘못도 가족의 잘못도 아니지만 특히 대형병원에서의 죽음은 이런 경우가 많다.
앞선 보호자들의 모습이 유독 나의 뇌리에 남아있는 이유가 있다. 나는 간호사이기 이전에 젊어서부터 환자였던 엄마의 주 보호자이다.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협심증을 진단받았고 이런저런 고비를 넘기며 환갑을 넘기셨다. 지난해 폐와 근육을 침범하는 자가 면역질환을 진단받고 평소 다니시던 대형병원의 방문이 더 잦아지셨다.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요즘 시대에 산술적으로 아직 젊은 연세인 것 같다. 그래서 아직은 감히 엄마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연명치료'에 대해 물어볼 자신이 없다. '연명치료'라는 한국어 단어는 왜 이리도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는지... 좀 더 가벼운 단어는 없는 것일까? 지난해 죽을 고비를 한번 넘기시고도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는데 그걸 묻고 싶은 것은 아마도 나의 이기심 때문일 것이다. 그 처치실 문 밖에서 울고 있는 보호자가 내가 될까 봐 나는 늘 두렵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 그래서 더 묻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의료적 상황도 거짓 없이 엄마에게 설명해 왔던 내가 '연명치료'에 대해서만은 물어볼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 질문을 함으로써 엄마의 '희망'을 꺾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 속의 한 내용이 떠오른다. 크리스마스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그 희망이 꺾여버린 수용자들은 이듬해 평소보다 더 많이 사망했다고 한다. 아무리 엄마의 신체 수명이 다른 동일 연세의 건강하신 분들에 비해 높다 하더라도 '희망'이 가지는 힘을 안다. 힘드실 텐데 매일 가벼운 산책을 거르지 않으시고 입맛이 없으셔도 건강한 식단으로 챙겨 드시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에 감사한다. 그 '희망'이 없다면 우울이 엄마를 덮쳐 버릴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늘 나의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엄마가 돌아가실까 두렵다. 그래서 이 곳 캐나다에서처럼 의사가 Level of Care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악화의 가능성이 있을 때마다 마치 불도저처럼 치료를 밀어붙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도 가족도 죽음에 대해 준비할 시간을 주는 Level 2 단계가 한국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환자와 가족 모두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눈을 맞춰가며 전할 수 있는 시간 말이다.
이곳은 대학병원의 경우에도 Level 1에서 Level 2로 바뀌었다고 해서 당장 병원을 옮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환자의 상태가 빨리 악화되는 경우 병동에서 마지막까지 입원해 계시는 경우도 있고, 같은 병원이나 타 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으로 보내기도 한다. 다행히 Level 2 또는 Level 3 정도에서 생사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호전이 되는 경우 물리치료사, 사회복지사, 의사, 간호사 모두가 의논하여 적절한 재활병원이나 양로원으로 연계해서 보낸다. 이러한 행정적인 절차가 빠르지 않아 캐나다는 입원이나 수술 대기 기간이 길다. 한국 대형병원의 그 빠른 병실 회전율이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그 어느 나라보다 빨리 받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됨을 잘 안다. 그러나 돈은 안되지만 한국의 대형병원도 호스피스 병동 하나쯤은 가지면 안 되는 것일까? 어제까지 '살릴 수 있는 환자'에서 오늘 갑자기 '가망이 없는 환자'가 되어버린 환자와 가족들이 내쳐지듯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시간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