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미정 Aug 26. 2020

‘탈세계화’가 아닌 ‘핵심 가치의 세계화’ 바람이 분다

포스트 코로나 19 시대

전 세계로 코로나가 확산되면서 각국이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무역 조치를 취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는 ‘탈세계화’ 추세에 관한 기사를 자주 접한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나는 ‘개인보호장비’ 보급을 통해 그 일면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의료용 마스크 보급의 대부분을 중국에 의존하던 캐나다는 올해 3월경 극심한 부족에 허덕였다. 의류 제조 공장을 마스크 생산 공정으로 전환하는 동안 캐나다 국민 스포츠의 하나인 아이스하키 덕분에 그래도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선수용 헬멧에서 고안한 facial shield (얼굴 가림막)를 의료진에게 다량 공급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탈세계화’의 흐름은 경제적인 부분에 국한된 것은 아닐까?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이익’과 같은 핵심 가치를 공유하는 면에서 본다면, 코로나로 인해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세계화’의 급류를 타고 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한 일반인의 눈으로 코로나 이후의 캐나다와 한국의 변화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개인의 자유'를 목숨만큼 중요시하는 캐나다의 경우 ‘국경 봉쇄’를 선택했고, ‘공동체의 이익’에 무게를 두는 한국은 ‘자유 이동 보장’을 택했다. 국경 봉쇄를 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경제적 이익은 차치하고 그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캐나다의 경우, 초반에 마스크 부족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마스크 착용 의무화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조치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처럼 이전에 다른 바이러스를 아프게 겪은 경험이 적어서였을까? 의료진조차도 ‘캐나다는 괜찮을 거야’라고 단순히 생각하고 예방적으로 마스크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한국인이자 간호사로서 메르스를 겪어 본 나의 시선에 그들은 너무나도 조심성이 없고 무사 태평한 사람들로 여겨졌다. 물론 이러한 성향을 가지게 된 것에는 한국에 비해 안정적인 역사적 배경도 무시할 수 없겠다. 하지만 그 부분 또한 이 정도로만 언급하고자 한다.


캐나다는 결국 자유의 상반된 극단인 국경 봉쇄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엄청난 가치관의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7월 중순이 되어서야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다. 많은 노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와중에도 캐나다 곳곳에서 선택의 자유를 주장하는 ‘반 마스크 시위’가 일어났다.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지 강제가 아니라고 했다. 당시 나는 코로나 확진자를 간호하기 위해 장기요양 시설에 파견을 다녀왔었다.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부모님일 환자분들이 가족들과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못한 채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니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를 부르짖는 그들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서 쓰라는 것인데 그들의 눈에는 왜 자신만 보이는 것일까? 그 가치의 다름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평소보다 더욱더 ‘이방인’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시위에 대한 비판 여론은 캐나다인들 사이에서도 꽤나 거셌다. 한 설문조사 따르면 캐나다인의 70% 정도가 마스크 착용 의무화에 지지를 한 것은 물론이요, 평소 어떠한 시위에도 관대한 편인 캐나다인들의 성향상 꽤나 큰 변화로 느껴졌다.


그 무렵 ‘K-방역’의 우수성이 캐나다에도 자주 보도되었고, 나는 동료들로부터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본인의 동선이 추적되는 것에 대해 한국인들은 큰 거부감이 없는 거야?’, ‘그 시스템이 효과를 보려면 거의 모든 국민이 동의를 해야만 하는 거잖아’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위기 상황에서는 더욱더 공동체의 이익이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시된다는 나의 대답에 그들도 나처럼 꽤나 이해가 안 되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의 대답을 통해 그간 나의 행동 또한 이해되는 계기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평소 나는 그들에 비해 휴식 시간을 짧게 쓰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누 권리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간호사 일이라는 것이 휴식시간이 되었다고 해서 그 순간 손을 바로 놓기 힘든 부분이 많고, 바쁜 와중에도 나의 전체 휴식시간을 챙기면 결국 밀리고 밀려 누군가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된다. 이런 나를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여겼을지 모르겠으나 그들도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이 보였다.


‘민폐’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한국인의 문화에서 마스크 착용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어려운 시기에 헌신적으로 희생하는 문화 속에서 한국 국민들은 규율을 지키고 자제력을 발휘했다. 선진국이라 여겨왔던 서구 국가들의 대응을 보며 스스로 놀라고 긍지를 가졌을 것이다. 해외에 살고 있는 나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자유 이동 보장’에 있어서는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국경 봉쇄’를 했다면 초기에 중국으로부터 바이러스의 유입 자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많았다. 또한 현재도 해외에서 유입되는 사람들에 대한 논란은 어느 정도 계속되고 있다고 본다. 한국인들 또한 서구 사회가 중요시 여기는 ‘개인의 자유’라는 핵심 가치를 이번 계기를 통해 깊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싫어도 참여할 수밖에 없는 ‘회식 문화’의 변화, ‘구내식당의 칸막이’를 통해 얻은 일면의 ‘자유 혹은 편안함’ 등을 들 수 있겠다. 서구 문화의 장점 임을 알면서도 공동체가 우선시되는 분위기로 인해 쉽게 변화시키지 못했던 부분은 아니었을까?


코로나 19로 인해 당분간 해외여행을 꿈꾸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많은 일반인들이 그간 해외여행을 통해 문화와 사고의 다양성을 보고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 차이를 즐기는 마음으로 가볍게 바라보았던 것에서, 코로나 19라는 큰 홍역을 앓으며 다른 사회의 중요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본다. 우리의 실질적인 발이 묶였다고 해서 그 관심조차 매어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견고해서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가치가 흔들리는 경험을 하면서 표면적인 세계화가 아니라 진정한 ‘공존’과 ‘얽힘’을 배워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코로나 19의 끝은 언제일지, 과연 그 끝이 있기는 한 것인지 아직은 의문스럽다. 하지만 그 끝에 해외여행이 다시 활발해지는 그 날이 오면, 그때는 아마도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새로운 것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커버 이미지 출처

https://if-blog.tistory.com/5606

매거진의 이전글 Broken Heart Syndrom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