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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어렵다. (2/5)

(2) 영어 사대주의와 power language

지난 글에서 영어가 어려운 - 까다롭고 곤란하고 힘겨운 - 이유는 영어가 어렵기 - 거리감이 있어 행동하기가 조심스럽고 거북하기 - 때문이라고 했었는데요.

이 글에서는 왜 우리가 그러는지 조금 더 자세히 짚고 넘어가려고 해요.


다 아는 이야기 왜 굳이 파고드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그래도 굳이 이 이야기를 집어 드는 이유는, 이것을 잘 알고 이해해야 영어를 내 것처럼, 명품 재킷이 아니라 10년 입은 청바지처럼 편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왜 우리는 영어가 조심스럽고 거북할까요. 왜 우리는 어디서나 당당하게 걸으면서도 영어 원어민 앞에서는 비실비실 웃으면서 땀이 날까요. 왜 말끝마다 sorry가 나오고 진짜 마음까지 죄송해지는 걸까요?


가장 큰 이유로는 영어 사대주의가 있어요.

영어는 이 시대의 권력의 언어, 즉 power language에요. 일단은 미국이 워낙 강력하고 부유하다 보니 정치경제적으로 영어가 힘을 가지고 있어요. 국제기구나 글로벌 기업들이 미국에 있고, 세상과 영어로 소통하지요. 내부에서도 영어가 공용어이고요. 미국 유명 대학 출신들이 많은 나라에서 리더 포지션에 있으며, 이 세상의 뉴스와 미디어도 영어가 지배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에요. 기축통화인 달러의 힘이 영어를 떠받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데요. 달러가 패권을 가지기 전의 세계의 기축통화는 영국의 파운드였어요. 전성기의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 불리며 전 세계에 영어를 쓰는 식민지를 건설했지요. 1400년대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스페인-네덜란드-프랑스가 각 100년씩 기축통화를 가진 패권국가였고, 그 이후 1815년경부터 영국의 파운드, 1900년대 초부터 미국의 달러가 그 지위를 이어받았어요. 무려 200년에 걸쳐 영어는 세계적으로 힘을 가진 권력 언어인 거예요.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에 걸쳐 한반도에서는 한자를 읽고 쓸 수 있는 것이 높은 신분을 가진 자의 특권이었어요. "글을 안다"라는 것은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하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었다는 뜻이며, 이는 자동적으로 귀한 집 자제로 성장한,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는 뜻이었지요.


첨언하자면, 조선이 건국될 때는 '양천제(良賤制)'라고 해서 양반과 양인-중인의 계급 차이가 없었습니다. 노비-천민을 제외한 누구나 과거시험을 거쳐 벼슬을 할 수 있었어요. 다만, 아이가 청소년기까지 글공부를 했다는 것은 농사와 같은 노동에 종사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결국 여유 있는 집안에서만 그것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결국 세습되는 반상의 구별로 굳어졌겠지요. 사실, 양반이라는 말도 문반과 무반을 통칭해서 2개의 반, 즉 양반이라고 부르는 것인데요. 이것은 개인의 신분이지 사회적 계급이나 집안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세습처럼 굳어지긴 했지만요.


특권층은 자기들끼리 결집해서 외부와 자신들을 구분하는 성벽을 쌓아요. 자기들끼리 인맥과 혼맥을 만들어 계급을 구축합니다.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특권층 결집의 중심이 된 것은 한자능력이었지요.


조선이 멸망하고 개화기가 오면서 수천 년간 지탱해온 한자의 위상에 금이 갑니다. 산업혁명을 통해 월등한 생산력과 경제력을 가지게 된 서구 열강이 동북아를 찾아오면서 청나라와 조선과 일본은 맥없이 무너지게 되지요. 나라가 무너진다는 것은 그 나라의 지배층, 즉 특권층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수천 년간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 열도를 지배해온 한자 학습자들의 권력이 흔들린 것이지요. 더 강력한 세력이 나타났으니까요.


그 이후로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현대사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어가 한반도의 power language였지만, 미군과 함께 625 전쟁을 거친 후, 미국의 언어인 영어가 한반도의 power language가 되었지요. 그래도 산업 현장에서 80년대까지는 일본어가 어느 정도 힘을 발휘했지만, 90년대 말 IMF사태 이후로는 영어가 완벽히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영어 이야기하면서 역사 이야기가 너무 길죠? 여기에서 꼭 짚어야 할 중요한 부분이 있어요. 수천 년 동안 한반도에는, 더 나아가 동북아에는 "특권층의 언어"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들을 특권층으로 묶어 주고, 그들을 일반 사람들과 구분해 주는 "특권층의 정체성", 즉 신분 그 자체가 바로 power language였던 거예요.


2011년 윤종빈 감독의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는 최익현 (최민식 분)이 어린 아들에게 "English is power."라고 가르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난한 서민 출신으로 온갖 수모를 당하며 나쁜 일로 큰돈을 번 가장이 좋은 집으로 이사해서 '가문'을 만들기 시작하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저 보이스카웃 아이는 미래에 대한민국 검사가 되죠.


수십 년 전에도, 지금도, 부모님들이 어떻게든 아이들에게 영어교육은 모자라지 않게 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로 인해 한국에는 영어학원이 엄청난 수로 성업했었구요. 사랑하는 내 자식에게 power language를 어떻게든 선물하려는 보호본능인 셈이지요.



이야기가 많이 돌아왔는데요. 그래서 영어가 어렵습니다. 영어는 세계를 지배하는 power language이자 한반도를 수천 년간 지배한 한자 권력의 자리를 차지한 새로운 권력 언어니까요. 정치, 경제, 학문, 산업, 심지어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까지 영어 권력은 모든 곳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영어를 잘하면 능력 있는 사람이고, 영어를 못하면 능력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영어를 아주 잘하면 자동적으로 금수저로 의심받기도 하죠. 경찰공무원 시험에도 토익점수가 필요한 세상이에요.


이러니 영어 사대주의가 없을 수가 있을까요? 수천 년간 한자 사대주의가 단단히 뿌리 박힌 동북아의 한반도에, 영어는 한자가 쌓아 올린 언어 권력의 자리를 손쉽게 차지해 버렸는걸요. 비옷보다 레인코트가, 줄무늬 주름치마보다는 스트라이프 패턴의 드레이핑 스커트가 더 비싸고 좋게 느껴지는 그 느낌이 바로 영어 사대주의예요.


그 대단한 영어 앞에 우리는 당당하지 못해요. 우리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오랜 문화예요. 완벽하지 않으면, 또는 완벽할지라도, 우리는 겸손합니다. 더군다나 상대방은 모든 영역에서 완벽한 글로벌 권력을 쥐고 있는 존재예요. 겸손을 미덕으로 삼고 위아래가 뚜렷한 우리 한국인은 더욱더 상대방이 어렵습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원어민보다 오히려 내 주위 한국인들이지요. 내가 부족한 실력이나마 영어로 말하려고 하면, 내 주위 한국인들은 완벽하지 않은 내 영어를 비웃어요. 아니, 그들이 비웃기 전에 내가 먼저 내 영어가 민망해서 쪼그라들어요. 왜냐하면 영어는 너무 대단한 언어이니까. 높은 사람들이 멋지게 사용하던 power language를 나 같은 보통 사람이 이렇게 함부로 쓰면 그거 자체가 어렵고 죄송한 거예요. 실례 같고, 완벽하지 않아서 부끄러워요.



우리 잘못이 아니에요. 수천 년의 역사와, 격동의 근대사 때문이에요.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객관적으로 영어 잘하는 사람도 한국에서 한국인 앞에서 영어로 말하기 부담스러워요.

우리만 그런 거 아니에요. 일본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영어가 어려워요.

공부가 부족해서라구요? 아니에요. 사대주의예요. 대단하신 영어를 내가 감히 막 쓰기 거북한 거예요.


그리고, 이제 이런 이야기 할 때 됐어요. 월드컵 4강에 갔다고 나라가 마비될 정도로 전 국민이 기뻐하던 게 2002년이고, 강남스타일이 빌보드 1위 한 게 2012년이에요. 그때만 하더라도 영어와, 미국과, "외국"과 세계는 너무나도 거대한 존재였고, 사대주의라는 생각도, 그것을 깨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는 위상이 달라요. 그 "외국"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고, 한국이 좋다고 찾아와요. 이제 우리도 생각 바꿀 때 됐어요.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다음 글에서는 영어가 조심스러운 또 다른 이유를 이야기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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