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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사자클럽 Mar 03. 2022

사진 프로젝트 <목욕하는 여자들> 3

용접왕 B의 목욕

용접왕 B의 목욕

결혼도 아이도 없었다. 적어도 B의 인생 계획은 그랬다. 연기로, 영화로, 용접으로 종횡무진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어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과 정반대 성격의 짝지를 만났고, 또 ‘정신을 차려보니’ 햇빛이 잘 드는 소도시의 어느 아파트에서 임신 7개월 차 예비맘이 되어 있었다.

B의 다재다능한 삶은 출산 이후 어떻게 될까? 그저 ‘누구의 엄마’로만 남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B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몸과 무너지는 정신에도 짝지 손을 잡고 버티며, 나만의 삶을 오롯이 이어가겠다는 용기를 잃지 않는다. 곧 만날 아기는 그에게 ‘책임감으로 보살펴야 할 존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내가 사랑하는 작은 친구’이다.

(이후 마지아는 M, B는 B, 짝지(남편)는 K로 표기한다.)

M: 탱자(태명) 임신 중이다. 출산 예정일은 언제인가.

B: 1월 말에서 2월 초다.

M: 두 분 다 한창 육아 준비로 바쁘겠다.

B: 집안일과 육아 준비는 모두 짝지에게 일임했다.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압박감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는 지금 몸이 불편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임신이 무엇인지 실감하고 있다. 화장실도 너무 자주 가고, 위가 작아져서 밥을 먹으면 구역질이 올라온다. 임신성 당뇨가 올까 봐 음식도 마음대로 못 먹는다. 그런데 공부도 내가 해야 한다면 억울하잖나.

인터넷에서 육아 관련 글을 발견하면 바로 짝지에게 공유하고, 짝지가 그걸 열심히 읽는다.

K: 짝지가 보내준 글을 읽기도 하고, 기본적인 정보들을 따로 찾아보기도 하며 공부하고 있다.

M: K님은 퇴근하고 돌아와서 집안일과 육아 공부를 하시고, B님은 종일 탱자 관리하시고.

K: 퇴근하면 같이 저녁 먹고 산책을 나간다. 장모님께서 임신중독증이 있으셨던지라 짝지도 임신중독증이 우려됐다. 그래서 간단한 운동 삼아 산책을 시작하게 됐다. 병원에서도 권했고.

처음엔 가볍게 30분 정도로 시작했는데 점점 시간이 늘어나 요즘엔 한 시간 가까이 걷기도 한다. 비 오는 날 빼면 매일 함께 나간다.

B: 보통 산책 갔다 와서 같이 씻는다.

M: 같이?

B: 이상한 거 아니고(웃음), 내가 씻는 걸 짝지가 도와주는 정도다. 특히 짝지가 등을 밀어주는 게 시원하다. 머리도 말려준다.

K: 아니, 짝지가 머리를 감고서 안 말리는 거다. 내가 그렇게 말리라고 잔소리를 하는데도 귀찮다면서. 그래서 대신 말려주기 시작한 게 이어지고 있다.

B: 머리를 말리고 나면 두피에 약을 뿌린다. 임신하면 피지 분비가 원활하지 못해 없던 비듬이 생기더라. 이모가 약을 선물해주셔서 사용하고 있다. 이것도 짝지가 뿌려준다.

M: 하루가 어떻게 가는 지도 모르겠다.

B: 임산부를 위한 애플리케이션에 ‘슬슬 아기 옷을 준비하세요’라는 알림이 뜬다. 뭘 사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 내 배 속에 ‘아기가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태동이 있는데도, 잘 때나 밥 먹을 때 발로 차는 게 느껴지는데도 그렇다. 그저 ‘내 배에 뭔가 있군…’ 그런데 ‘가끔 움직이네…’ 정도? 아기 옷을 장만해야 한다는 말에도, 설레는 마음보단 ‘하아, 언제 사냐…’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M: 임신 후 몸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을텐데 꽤 무덤덤하다.

B: 그렇다기보단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고 생각하면 된다. 살면서 가슴이 이렇게 커질 수가 없다. 유륜도 어마어마하게 커진다. ‘뭐지? 어디까지 커질 거지? 가슴 전체가 유륜이 될 셈인가?’ 싶었다.

엄마를 닮아서 원래 가슴이 크다. ‘가슴 크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내 가슴을 좋아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불편한 것투성이다. 짝지와 길을 걷다 성희롱을 당한 적도 많았다. 임신하니까 거기서 가슴이 더 커졌다. 배 나온 게 티가 안 날 정도로. 차라리 배가 더 나오면 사람들이 만삭 임산부라고 생각할 텐데, 나는 그냥 뚱뚱한 사람 취급한다. 너무 힘들어서 출산과 모유수유가 끝나면 가슴축소수술을 받기로 했다.

M: 임신이 자기 몸을 부정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B: 그전부터 내 몸에 대한 공포가 있었지만 임신 초기엔 부정적 감정이 증폭됐다. 거울도 보기 싫었다. 배 나오는 건 임신하면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서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25kg가 넘게 찐 살, 엄청나게 커진 허벅지나 골반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털도 진해졌다. 촬영을 앞두고 털을 밀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냥 자연스러운 걸 보여주자 싶어서 놔두었다. 임신하면 여성호르몬이 많이 나온다는데 왜 털이 진해지지? 잘 모르겠다.

M: 몸이 변한다는 얘기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들어본 적은 없다.

B: SNS를 보면, 되게 예쁜 사람들이 만삭인데 9kg 정도밖에 안 쪘다는 글을 올린다. 출산하면 5kg 정도가 기본으로 빠지니까 거기서 4kg만 빼면 원래 몸무게가 되는 거다. 근데 난 기존 몸무게로 돌아가려면 20kg 넘게 빼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 거야, 왜 나만? 내가 폭식을 한 것도 아니고. 조금씩 먹었는데도 먹는 족족 몸이 붓는걸?

사회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몸과 내 몸이 다르면 다를수록 자괴감을 느낀다. 내 가슴은 왜 이렇게 처졌지? 왜 허리가 통짜지? 털은 왜 이렇게 굵어? 유륜은 또 왜 이렇게 크지? 사실 내 유륜 누가 본다고.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M: 아기를 만나는 미래와 몸이 변하는 현실 사이에 간극이 있다.

B: 처음 병원에서 임신이라는 얘길 들었을 땐 별 감정 없이 그저 얼떨떨했다. 계획한 것보다 빨리 일어난 일이어서인지 실감도 나지 않았다. 주변에선 다 축하하고 축복해줬다. 나도 운이 좋은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후에 내가 몸으로 직접 겪는 것들은 축복이라 말하기 곤란할 정도로 괴리감이 컸다. 생명을 잉태한다는 것은 축복할 일이다. 사람들이 축하하는 건 그런 면이겠지.

축하받으면 행복한 게 당연한데 난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겪는 몸의 변화가 나를 옥죄었기 때문이다. 마치 나에게 감옥 같은 결계가 주어진 느낌이었다. 죄도 짓지 않았는데 죄인이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먹고 자고 앉아 있는 것뿐이다. 내 몸을 유리조각 다루듯 조심해야만 한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탱자가 사라지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매번 이런 건 해도 되나? 이런 건 하면 안 되나? 생각뿐이다.

M: 조언받을 만한 곳이 많지 않나.

B: 찾아보면 없진 않지만 그렇게 자세하진 않다. 워낙 경우가 다양하고 알아야 할 게 많으니 그럴 수도 있다. 이제 조언보다는 공감을 받고 싶다. ‘맞아, 나도 그랬어’라며 같이 얘기할 사람이 있었으면 한다.


M: 코로나 시국이 불편함을 키웠을 수도 있겠다.

B: 하다못해 백신만 맞았다면(인터뷰 당시 임산부는 백신 허가가 나지 않았다) 조금 나을 텐데, 친구를 만나러 갈 수도 장을 보러 갈 수도 없다. 모든 게 금지됐다.

M: 그럼 잘 모르는 상태에서 몸의 변화를 감당하고 있는 건가.

B: 임신 전엔 막연하게 ‘만삭이면 배가 크겠지’ 정도만 생각했는데 지금부터 배가 엄청나게 자란단다. 신기하다. 얼마 전까지 탱자는 5cm 정도였는데, 벌써 800g이 됐단다. 그런데 여기서 더 커진다고?

생각해보면 신생아의 몸무게가 대개 2~4kg 사이다. 어떻게 뱃속에서 2kg가 넘게 자라지? 상상이 안 간다. 이걸 정확히 알아야 실감이 날 텐데 전혀 사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걱정은 되지 않고, ‘오…. 쩐다, 장난 아닌데’라는 생각만 든다.

M: 정말이다. 2kg가 넘는 존재가 어떻게 사람 몸에서 나오지?

B: 닥쳐보면 알겠지. 막연했던 것들이 시시각각 내 경험으로 다가오고 있다. 자연분만을 하면 회음부를 칼로 톡 째서 찍 자른단다. 거기서 아기가 나오면 슥슥 꺼내고, 그러면 출산 끝. 회음부는 며칠 있으면 아물고ー이렇게 들으면 쉬울 것 같지 않나?

M: 전혀 아니라고 알고 있다.

B: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래도 기술이 많이 발전했다고 들었다. 아직 결정은 안 됐는데, 만일 제왕절개를 하게 된다면 흉터도 별로 남지 않을 거란다. 아니, 그렇게 기술이 발전했는데 왜 아직까지 남자가 임신하는 기술은 없지?

M: (폭소)

B: 만약 그런 기술이 있으면 분명 짝지가 임신했을 거다. 난 절대 안 해.

K: 나도 정말 내가 하고 싶다. 임신 계획할 때 이 얘길 진지하게 했다. 그전부터도 혼자 하던 생각이었다. 여성이 짊어지는 임신의 굴레가 너무 크기도 하고, 힘들어하는 걸 옆에서 볼 수밖에 없는 것도 괴롭다. 내가 한다면 짝지는 힘들지 않을 텐데.

M: 그만큼 임신을 하는 것도, 곁에서 보는 것도 괴로운가 보다.

B: 내가 탱자 임신 중에 이사했다. 보통 태동이 주기적으로 오는데 이사 전날부터 태동이 아예 없는 거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공포가 엄습했다. ‘탱자가 배 안에서 어떻게 된 거 아닐까?’

포장이사고, 짝지가 일을 전부 맡았기 때문에 나는 차 안에서 인터넷을 뒤졌다. 태동이 두 시간 이상 없으면 병원에 가야 한다는 글이 나왔다. 다른 글에선 당분이 모자라서 그럴 수 있으니 초코우유를 마셔 보라고, 그럼 30분 안에 태동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난 임신성 당뇨 위험이 있어 마실 수 없었다.

K: 초코우유가 안 되니 부랴부랴 초코빵이라도 사 왔다. 30~40분 뒤에 미약하게 태동이 왔다. 이후 병원에 가서 검사했더니 이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일시적으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임신, 출산. 이 둘은 우리가 가장 많이 마주치는 단어에 속할 것이다. 인터넷, 언론, 심지어 지하철에서까지. 그럼에도 절대 친숙해지지 않는 이상한 단어다. 경험자들마저도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하물며 비경험자라면, 게다가 이제 막 첫발을 뗀 초보 엄마라면 어떨까. 사람은 낯선 환경을 맞닥뜨리면 온갖 감정이 들기 마련이다. 그중 하나가 ‘후회’인 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러나 사람들은 ‘후회’가 ‘임신’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M: 임신이 당신의 너무 많은 것을 무너뜨린 건 아닌가.

B: 막연히 알고는 있었다. 임신…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겠지. 겪어보니 ‘이상하고 신기하다’기보단 불편하고 후회되는 일이었다. 탱자에겐 미안하지만, 내 몸에 이렇게나 큰 변화가 오니까.

M: 임신을 후회하나.

B: 아니라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말할 데가 없다. 내 선택이니까. 결국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내 몫이란 걸 알지만, 마음 한편의 두려움을 지울 수는 없다. 내 몸이 임신 전처럼 돌아가지 않으면 어떡하지? 지금 당장의 변화가 힘든 건 어떡하지?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닌가? 섣부른 판단이었나? 겁이 너무 없었나?

이해해줄 사람도 없다. 다들 이미 뭐라고 답할지 정해놓은 그림이 있는 것 같달까. ‘정말 무섭겠다’라며 막연함에서 오는 공포를 표현한다거나, ‘그거 별거 아니야’ 오랜 경험자의 무던함으로 응수한다거나, ‘힘내’라는 말로 걱정을 대신한다거나. 그중 가장 많은 건 ‘아기야~ 빨리 세상에 나와~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라며 모성애에 대한 기대를 내비치는 거다. 근데 실제로 난 그렇지 않거든. 그러니 남들에게 내 심정을 말할 수 없어진다. ‘오늘은 이런 변화가 있었는데 너무 힘들었어’ 했을 때 ‘그랬구나’ 공감받고 이해받는 느낌이 그립다.

M: 탱자를 직접 만나면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

B: 출산한 사람들이 그렇게들 얘기하더라. 막상 아이가 웃으면 모든 걸 잊을 정도로 좋다고. 하지만 난 아직 탱자와 얼굴을 마주한 건 아니니까. 지금은 너무 힘들단 말야.

M: 탱자야, 귀 막고 있어 

M: ‘진심 어린 공감’이라는 게 참 쉬우면서도 어렵다.

B: ‘취업이 안 돼서 힘들다’거나 ‘대학 전공과 잘 안 맞는다, 이러이러한 선택을 후회한다’고 말하면 공감을 받지만 ‘임신이 힘들고 후회된다’라고 하면 다들 비난할 것 같아 선뜻 말을 못 하겠다.

온라인에서 공감을 받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떤 사이트에서는 임신 출산에 대해 부정적인 말만 가득하고, 또 다른 곳은 무조건 신성시하고. 어딜 가도 ‘‘B’의 인생이 있어!’라고 말하는 곳은 없었다.

M: 주변에 임신을 계획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얘길 해주고 싶나.

B: 다른 무엇보다 내 얘기를 해주고 싶다. 나는 이러이러했고 이런 부분이 힘들었다고, 이러저러한 부분에 대해 도움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충분히 고민하고 선택해 보라고. ‘임신 완전 추천! 너무 좋아!’는 아니지만, ‘고민해 보고 선택한다면 나쁘지 않아’ 정도. 다들 임신과 출산은 좋게만 얘기하니까 나 하나 정도는 이런 말 해도 되겠지.

M: 누군가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공적인 차원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면 좋겠다.

B: 출산을 경험할 일이 없거나 출산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도 출산이 가져오는 변화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다면 서로 존중하는 범위가 넓어질 것 같다. ‘너는 나와 다른 선택을 했으니까 내 적이다’가 아니라 ‘저 사람은 그런 변화를 알면서도 저걸 선택했구나’ 랄지. 지금은 서로가 상대방이 선택한 불행만 얘기하고 있다. 임신했다는 ‘선택’에 옳고 그른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줄 기반이 필요할 뿐이지.

M: 기반이라면?

B: 내 생각에 오해나 배척은 서로에 대해 잘 몰라서 일어나는 거 같다. 사실 이것도 이해가 잘 안 가는 게, 임신과 출산에 대해선 누구든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평생 아이를 낳을 일이 없더라도 말이다. 나는 여성의 삶을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학교에선 아주 기본적인 것만 알려줬다. 성교육 시간은 ‘임신? 축복이지, 행복이야’ 정도만 듣고 끝나기 일쑤였다. 임신하면 어떻게 되고, 출산하면 어떻게 되는지 등 정말 알아야 할 정보는 임신 후에야 알았다. 쏟아지는 이야기들을 읽고 처음엔 ‘오 맙소사,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M: 임신 7개월 차다. 지금은 그 ‘기반’을 좀 찾았는지.

B: 놀랍게도 전혀. 오히려 마음은 편해졌다. 인터넷에 있는 사람들의 경험담이 내 미래의 일부분이 될 수는 있겠지. 그렇다고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보장도 없고. 어찌 됐든 닥치면 잘 해결하겠지,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여전히 불안하지만 난 혼자가 아니다.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그리고 바로 옆엔 짝지가 있다. 혼자서 우울이나 불안을 짊어질 필요는 없다.

그리고 난 탱자를 ‘선택’했다. 탱자를 낳으면 나는 탱자 엄마가 되는 거고, 내가 탱자를 책임지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난 ‘B’로서 용접도 잘하고 연봉도 올리고 싶다. 새로운 친구들도 만나고 싶다. 탱자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내가 없어진다는 건 너무 잔인하잖나. 난 탱자를 선택한 거지, 불편한 미래를 선택한 건 아닌데.

이런 얘길 아무리 해도 여자들이나 공포를 공감하지, 남자들은 그 정도의 고통은커녕 생리통이 어떤 건지도 모를 거다.

M: 막연한 뒷동네 이야기라고 생각할 거다. ‘뒷동네는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더라. 아이고 무섭겠네.’

B: 정작 우리는 오늘 밤 저 뒷동네를 가야 하는데. 난 그 뒷동네에 살고 있는데.


B의 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단단했다'. 덤덤하게 임신하고, 용감하게 몸의 변화를 받아들였다. 저변에 깔린 불안 너머로 곧고 단단한 심지가 보였다. '짝지'는 그 심지를 꼭 잡아주는 존재였다.

M: 출산을 앞두고도 들뜨거나 기대 없이 덤덤해 보이는데, 임신을 계획한 이유가 있을까?

B: 좀 이상해서 웃길 수도 있다. 결혼 전 짝지와 동거하던 시절, 우울증이 심하게 왔었다. 밤에 이유 없이 펑펑 우는 날이 이어졌다. 그때 짝지가 안아주고 달래주면서 나중에 우리가 아이가 생긴다는 가정하에 앞날을 얘기했다. ‘너 잘 때 아기랑 나랑 몰래 찬장에서 간식을 꺼내 먹을 거야. 그리고 다음 날 입 싹 닫고 모른 척하는 거지.’ 그런 얘기가 굉장히... 큰 위로가 됐다. 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존재지만, 만약 아기가 있다면 행복한 가족이 되지 않을까 상상하게 될 만큼.

나는 짝지에게 매일 죽고 싶다고 했다.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짝지는 ‘무슨 소리야, 셋이 손잡고 산책도 하고 매일 맛있는 것도 먹자’라고 말했다. 신기했다. 그전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거든. 짝지랑 사귀기 전에는 결혼에 대해서도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짝지를 만나면서부터 ‘이 사람이라면 결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산 역시 마찬가지, ‘짝지랑 닮은 아기라면 낳아도 괜찮겠다’ 싶어 계획했다. 계획했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의 마음이었던지라, 천천히 낳을 생각이었다. 보통 아이를 가질 계획을 하고 실제 임신을 하기까지는 평균 1년 정도 걸린다고도 하고. 그런데 우리는 두 달 만에 아기가 생겼다. 탱자가 좀 빨리 와줬다. 얘도 오고 싶었나 보다.

M: 별거 아니라지만, 그 어떤 사유보다 아름답다.

B: 짝지가 힘든 시간, 잘 달래줬지.

M: 좋은 부부다.

B: 다른 부부처럼 다툴 때도 많다.(웃음)

M: ‘짝지’라는 호칭 특이하다. 어떻게 ‘발명’했는지.

K: 성별에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귀엽게 부를 수 있는 호칭을 찾고 있었다. ‘짝꿍’이란 표현이 귀엽길래 조금 변형해서 ‘짝지야’라고 불러봤는데 B가 너무 좋아했다. 이후 ‘짝지’가 아예 애칭으로 정착했다. 장모님도 특이하다고 하신다. ‘너희는 왜 서로를 그렇게 부르냐’며.

B: 짝지가 처음 ‘짝지야’라 부를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 기존의 관계와 다른, 내 옆에 특별하게 있어주는 사람을 표현하는 말로 느껴졌다. ‘짝지’라는 말이 서로를 더 가깝게 느끼도록 한다.

M: 사이가 굉장히 좋으신데, 어떻게 처음 만났나.

B: 영화학과 동기로, 7년 동안 아무 일 없는 친구 사이였다.

K: 사실 짝지를 만나자마자 좋아했었다.

B: 난 상상도 못 했다.

K: 티를 안 냈다. 대놓고 ‘내가 너 좋아하면 어떨 것 같아?’라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짝지가 ‘난 싫을 것 같아’라고 대답했었다.

B: 난 기억이 안 나지만.(웃음)

M: 순정만화 스토리 같다.

B: 학교에서 우리 둘 때문에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남녀 관계에 친구는 가능한가?’ 처음엔 가능하다는 의견도 많았는데, 우리가 덜컥 연인이 됐다. ‘친구는 가능하다’를 지지했던 학우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K: 거기다 결혼까지 했지.

B: 남녀 사이는 친구가 될 수도 있다! 그냥 우리가 이렇게 됐을 뿐이지.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누가 아나. 학우들에게도 얘기해봤지만 이젠 안 들어준다.(웃음)

B에게 임신은 모든 것이 ‘신세계’다. 몸은 변하고 생각은 널을 뛴다. 하지만 임신이 주는 변화보다 더 두려운 것은 B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껏 살면서 놓친 기회들이, 마치 미래에 놓칠것 같은 기회들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M: 임신이 어떻게 보면 새로운 기회이자 도전일 수 있겠다.

B: 그 이상이다.

M: 후회된다기보단 무서운 거 아닌가?

B: 그랬었지. 지금은 몸이 힘들 뿐 무섭지는 않다. 내가 무서운 건 출산보다 내 미래다. 출산? 어떻게든 겪으면 되겠지. 그런데 내 미래? 그건… (웃음)

M: 배우로 알고 있는데, 영화학과를 나왔다.

B: 고등학교 때 연극 동아리에 작가로 들어갔는데, 작은 동아리라 배우가 턱없이 부족해서 모든 스태프가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그랬고. 그렇게 처음 선 무대에서 연기상을 탄 뒤 고등학교 내내 연기를 계속했다. 무대에 설 때마다 연기상을 받았던지라 그 경력으로 영화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연출에 관한 욕심도 버릴 수 없었던 내겐 좋은 전공이었다. 지금으로선 ‘연기를 했었다’라고 말하기 민망하지만.

M: 무언가에 열중했던 시기가 있는 것은 민망한 게 아니다.

B: 알려진 작품 하나에라도 출연했다면 말할 텐데 딱히 남은 게 없는 느낌이다. 큰 영화의 주연 자리를 놓고 최종 5인 오디션까지 간 적이 있었는데 떨어졌다. 이후 계속 오디션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걸 생업으로 삼기는 정말 힘들겠구나.’ 누군가 캐스팅을 해서 카메라 앞에 서지 않는 이상 연기를 할 기회는 거의 없더라. 이런 기회가 있을 순 있지―꼭 필요하지 않은 장면에 등장하는 벗은 여자 역할, 뜬금없이 나오는 창녀 역할.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연기가 그런 거였나? 그 생각이 든 뒤로 오디션을 보지 않았다. 대신 짝지를 포함해 마음 맞는 친구들과 단편영화 몇 편을 찍었다. 내 나름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M: 연기와 영화에 올인하다가 어떻게 ‘용접왕’으로 자신을 칭하게 됐나.

B: 영화를 만들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기술을 배워야 했다. 기왕이면 돈 많이 버는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용접 학원을 다녔다. 짝지가 워킹 홀리데이를 갔을 때 용접을 한 경험이 있어 추천해줬다. 낮에는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 용접 학원을 다녔다.

가볍게 시작했지만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결과가 눈에 바로 보이는 게 좋았다. 더 잘하고 싶어졌다. 어느 순간 내가 그 반에서 제일 잘하는 학생이 됐다. 게다가 여자는 나 혼자였다. 완전 잘하고 싶었다! 이게 발전해서 어느 순간부턴 ‘용접왕이 돼야겠어’ 생각하게 됐다.(웃음)

M: 뭐든 할 땐 푹 빠져서 열중하는 것 같다.

B: 막상 문제는 취직이었다. 나보다 한참 못하고 불성실했던 남자 학생들은 취직이 잘 됐는데 나만 못했다. 군대를 막 제대한 남자애들이 취직이 제일 잘 됐다. 기술은 가르칠 수 있단 생각 때문인지, 실력 이전에 몸이 빠릿빠릿해 보이는 남자들을 채용하더라. 나에겐 기회조차 오지 않았다. 난 자격증도 있고, 걔네보다 용접도 훨씬 잘하는데. 나를 뽑더라도 시급을 낮추려 했다. 원래 일급이 13만 원이라면 내겐 10만 원을 제시한다든가. 하는 일이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M: 여자라서 그런 건가.

B: 내가 기업 입장이 아니니 알 수 없다. 그런 점도 짜증 났다. 자꾸 취직이 안 되니까 내가 스스로를 검열했다. ‘내가 여자라서?’ ‘내가 어려서?’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한번 계약직으로 현장에 간 적이 있었는데, ‘이십 대 여자애가 용접을 잘할까?’ 하는 시선으로 날 보더라. 막상 용접을 잘 해내면 ‘얘가 버틸까?’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그래도 그건 힘들지 않았다. 쇳가루가 눈에 박혀 병원에 실려 갈 때도 괜찮았다. 정말 아팠지만, 지금 다시 하래도 할 수 있다. 막상 불편함을 느꼈던 건 다른 부분이다. 일단 탈의실이 없었다. 여성 휴게실, 화장실도 없었다. 나도 불편했지만 같이 일하는 분들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옷을 갈아입다가 내가 문을 열면 화들짝 놀라셨다.

아저씨들과 밥 먹고 발 냄새 풍기며 휴게실에서 자야 했다. 그런 경험을 해 보니 20대 여자는 이 현장에 어울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연이어 물음표가 뜬다. 내가 30대 중후반이라면? 40대라면 그땐 과연 이 일이 어울릴까?

M: 임신보다 정작 두려운 건 따로 있었다.

아프고 힘든 건 괜찮다. 내가 성장하지 못하고 나를 뽑아줄 곳이 없는 미래가 올까 봐 무섭다.

탱자를 임신했을 때도 공사현장의 신호수 일을 지원했었다. 나중에 임신한 걸 알고 현장 분들이 혼내셨다. 신호수가 서 있기만 하면 되는 일 같아도, 임신부는 오래 서 있는 것만으로도 배가 당겨서 위험하다고. 진짜 절대 안 된다고. 난 하고 싶었는데.

M: 하고 싶은 게 많다.

B: 기회를 놓치면 아깝다. 이번 기회를 놓쳐서 나에게 기회가 또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항상 밑에 깔려 있다. 연기할 때, 용접할 때 모두 그랬다. 막상 기회를 잡아 일을 시작하면, 그 일이 나와 맞지 않더라도 별로 후회는 하지 않았다.

M: 출산 후에 다시 용접 일을 할 계획인가.

B: 탱자를 낳고 어린이집에 보낼 때쯤엔 내가 30대 중반일 테니까, 그때부터 조금씩 커리어를쌓으면 40대에 10년 차가 된다. 딱 좋지 않을까? 어차피 현장에선 초짜도 필요하다. 잡일을 해줄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외국에 갈 수 있다면 갈 의향도 있다. 실력으로 평등하게 대접받을 수만 있다면.

M: 영화는 아예 접은 건가.

B: 영화도 용접도 ‘이제 끝! 안녕!’하고 책 덮듯이 딱 덮은 건 없다. 오히려 언제든 열어서 다시 쓸 수 있는 공책 같다고 할까. 의지는 충분히 있으니 여건만 된다면 펼칠 준비가 되어있다. 

M: 에너지가 큰 사람이다.

B: 대신 감정 기복이 좀 있다. 우울할 때는 땅 파고 들어간다. 임신 초반의 감정 기복은 따라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과 똑같은 생각을 해도 ‘그래도 난 어차피 안될 거야’로 결론을 냈다. 그럴 때마다 짝지가 많이 도와줬다. ‘그럼 네가 일을 해! 내가 탱자를 볼게’ 한다. 우울감이 앞설 땐 모든 말을 비웃는다. ‘내가 너보다 훨씬 적게 벌 텐데 그걸로 어떻게 세 식구가 사냐’고 따지게 된다. 그럼 또 ‘살면 다 살아진다!’라며 떵떵거린다. 듣다 보면 그게 또 그럴듯하다.


M: 사람이 정신적으로 코너에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생각이 극단적으로 가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다만 자신이 극단적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많이 된다. 그걸 옆에서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 행운이고.

B: 내가 나를 불행으로 몰았던 것 같다. ‘이제 나는 없어. ‘탱자 엄마’만 있어’라고. 그럴 때면 짝지가 내 손을 붙잡고 현실로 다시 돌려보낸다. 나가 놀고 싶으면 나가 놀고, 여행 가고 싶으면 가라고. 내가 있지 않냐고.

M: 태교는 따로 하고 있나. 당신의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B: 전혀.(웃음) 낮에는 주로 숲에서 노는 게임을 하고 짝지에게 선물로 줄 목도리를 뜬다.

M: 목도리?

B: 딱히 비밀은 아니다. 털 색깔도 짝지가 자기 취향으로 골랐다. 우리 둘이 사귀기로 한 날이 1월 1일이고 결혼기념일이 4월 4일인데, 우리는 사귀기로 한 날을 더 챙긴다. 그날까지 잘 떠서 선물할 거다.




B는 임신 초기처럼 자신을 불행으로 몰지 않는다. 대신 현실을 살며 탱자와 짝지, 고양이와 작은 가족을 만들었다. 앞으로 B는 B이자 탱자 엄마로서의 삶을 살 것이다. 펼치고 싶은 꿈을 한가득 안은 채.



B는 지난 2월 제왕절개로 탱자를 출산했다.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다.


M: 지난 인터뷰에선 임신의 힘든 점을 얘기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을까?

B: 출산 직전이 되니까 ‘몸이야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디서 왔는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 드는 생각은 탱자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그리고 내 몸보다 큰 걱정거리가 생겼다. 과연 탱자와 짝지와 내가 새로운 가족이 되어 잘 맞춰 살아갈 수 있을까? 짝지와 나는 서로를 가족으로 선택했지만 탱자는 아니잖나. 우리가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이 잔뜩이다.

M: 그땐 ‘임신을 후회한다’고 말했었다.

B: 이젠 후회하지 않는다. 아프긴 정말 무지 아팠지만, 탱자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웠다! 아마 내가 내 생각보다 더 빨리 탱자를 좋아하게 되는 중인가 보다.



<목욕하는 여자들>에서는 모델을 찾고 있습니다.

그저 여성의 누드를 찍는 작업이 아닙니다. 카메라 앞에서 멋진 포즈를 잡고 싶으신 분들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이 작업은 도시를 살아가는 여성(서울에 국한되지 않습니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수집합니다. 대단한 이야기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당신 자체가 사회의 '여성'을 대표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여성, 외국인 여성, 이민 여성, 노동자 여성 등...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당신이 하는 '목욕(샤워)'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creole.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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