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나 보낸 한 시절을 이곳에 남겨둔다.
*이 글은 2022년에 작성했다.
몇 달 전, 아이슬란드에서 지내던 친구와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3년 전 독일 교환학생 시절에 알게 된 독일인 친구였다. 그는 지금 아이슬란드에서 연구 활동을 마치고 졸업을 앞두고 있으며, 함께 친하게 지내던 그의 쌍둥이 자매도 졸업시험을 통과해 바이에른 어느 지역에서 임용을 앞두고 있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아, 이렇게 우리의 대학시절이 끝나는구나.
그는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말을 이 에세이의 서두로 써야겠다고 몇 달간 마음에 품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의 대학시절이 끝나는구나.
이렇게 한 시절이 지나가 버렸구나.
그리고 이미 다가온 시절을 나는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지, 를 생각했다.
취직을 한 후로 나는 도저히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는 일이 더욱 줄어들었다. 그건 내가 오직 내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 곱씹고 사유할 시간이 줄어들며 내가 가진 언어의 깊이가 얕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삶이라는 게 발화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굳이 시간을 들여 나의 경험을 되새기고, 그것을 글로 쓰고, 다듬고, 적당한 사진을 골라 포스트 버튼을 누르고.
그것이 또다시 게시되고, 누군가 그것을 눌러 읽게 되고.
어느 데이터베이스에 내가 잊은 후로도 반영구적으로 이 글이 보관되고.
어디에선가 쉼 없이 서버가 돌아가고.
그럴 가치가 있을까?
그럼에도 나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지나간 2021년의 반절을 꼬박 혼자서 울었고, 운 이유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고, 대신 주말이면 머리를 질끈 묶고 안경을 쓰고 무릎이 다 늘어난 오래된 바지를 입고선 멀고 가까운 동네를 홀로 걸었다. 걷다 보면 기분이 나아질 때가 있었고, 한 걸음 한 걸음마다 화가 치밀었다가 슬퍼져서 아무도 없는 등산로에서 짧게 울 때도 있었다.
마트에서 만 원짜리 위스키를 사다가 속이 아플 때까지 들이키고,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퇴근 후에, 주말엔 침대에 누워 눈물만 흘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나날이 이어지다가.
내킬 때면 높은 곳을 향해 걸었다. 야트막한 산 위 높은 바위 위에 주저앉으면 멀리 고가도로가 보였고, 그 위로 조그만 점처럼 오가는 자동차들이 보였다. 그걸 한참 보고 있으면 모든 게 견딜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저 점보다도 작은 존재고, 그런 내 안의 분노는 티끌만도 못하다고 생각하면.
생각하다 보면.
그곳의 바람과, 두런두런한 대화 소리와, 자꾸만 터져 나오던 재채기와,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오던 새소년의 노래를.
그 안에서 나는 티끌만 하다고.
그러니 다 괜찮다고.
그러다 보면 어느 화창한 주말 오후, 시장 야채 가판대 옆을 지나며 새 집에 어떤 조명을 달지 멍하니 고민하다가, 저녁거리로 브로콜리를 사 갈까 생각하다가, 문득 그래서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언제나 내 삶 어딘가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숨죽인 공허함과, 그 공허함이 나를 내려다보는 것을 방관하던 마음. 그런 지루한 온도의 냉소가 늘 머리 뒤쪽을 감도는.
딱 그 정도의 삶을 산다.
아득바득 돈을 끌어 모아 집을, 전셋집을 구하고, 예쁜 가구와 조명으로 집을 꾸미고, 끼니마다 좋은 것을 먹지는 못해도 큰 고민 없이 배달을 시키고, 만 원 이 만원 하는 와인과 위스키를 집에 들여놓고. 대출 금리가 또다시 오를까 전전긍긍하고. 6개월마다 폭이 크게 오르는 전세대출과 신용대출 이자를 다달이 납부하고, 회사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한참 웃고. 그런 생활을 향유한대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라는 존재가, 인간 하나가 아득바득 살아간다고 해서.
매일 수많은 쓰레기를 생산해 종량제 봉투에 담아 내놓으며 내놓을 시기를 놓친 음식물 쓰레기봉투 위로 꼬인 날벌레들과 그것이 깐 알에서 꼬물거리며 기어 나온 투명한 점 같은 애벌레들, 흠뻑 젖은 수세미에서 뚝뚝 떨어지는 주방세제를 바라보면서. 직장 동료와 점심을 먹고 당연하다는 듯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하면서. 또는 사내 카페 피크 시간에 정신없이 쏟아지는 주문들 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바쁜 직원에게 억지로 텀블러를 쥐여주면서. 그 텀블러를 다시 비우고 수돗물로 씻으면서. 불필요한 플라스틱 포장으로 겹겹이 싸인 샐러드를 사 먹고. 반드시 필요하지 않고 언젠가 스티커를 붙여 배출하게 될 인테리어 물품을 주문하면서. 무기력하게 침대에 늘어져 웹소설을 읽느라 놀아달라는 밥을 달라는 안아달라는 고양이의 시선을 무시하면서. 가끔은 거꾸로 나를 외면하는 부드럽고 동그란 뒤통수에 입술을 누르면서. 원하든 원치 않든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무신경한 말을 쏟아내면서. 누군가가 죽고 누군가가 수해로 전쟁으로 집을 떠나고. 그런 가운데 따뜻한 침대 위에 앉아 스스로를 수치스러워하면서. 그 수치심을 외면하면서.
내가 외면하는 수많은 것들을 계속 외면하면서.
내 삶을 깨끗하고 아기자기한 새것들로 채워가면서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필사적으로 바라보지 않은 채 무지의 상태를 영위하고 싶어 하면서.
그렇게 외면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어 하면서.
내게 과연 잘 살 자격이 있는 것인지.
외로울 때면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예전엔 그럴 때마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길 바랐던 것 같은데.
상담센터에서, 마지막으로 본 날 선생님은 내게 물었다.
“당신의 입장에서는 당신이 얼마나 소중해요?”
“당신은 스스로 자신을 얼마나 이해하고, 지지하고 있어요?”
저도 알아요. 아는데.
하지만 내게는 나를 이해할 이유가 있을지 몰라도, 그게 타인의 입장에서 날 이해해야 할 이유가 되어주지는 않잖아요.
나는 공평하고 싶어요.
나 자신을 그만 양해해주고 싶어요.
변명을 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판단하는 일을 멈추고 싶기는 해요.
하지만 그건 어떻게 하나요?
나는 크게 우울하지 않은 마음으로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 잔디 패인 흔적 하나 없이 휑한 공원에서, 빼곡히 하늘을 메운 신축 아파트 단지를 올려다보는 마음으로.
언제 또 이렇게 흉물스러운 게 자라났담.
나는 이것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런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