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연코 빛나는 존재였다. 세상의 눈부심을 알았을 때 환하게 웃을 수 있었으며 주변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스스로를 사랑했다. 그때의 내게 세상이란 특별한 것이었다. 태엽을 감으면 음악이 나오는 오르골도, 누르면 물이 칙칙 나오는 분무기도, 끼면 눈앞이 어지러워 보이는 아빠의 안경도 모든 게 특별했다. 그런 세상들을 볼 때면 나도 같이 특별해져서 웃음이 났다. 기쁠 때면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고, 행복할 때면 티 없는 미소가 그려졌으며, 재밌을 때면 바나나킥의 끝을 사선으로 잘라낸 것 같은 웃음이 그려졌다. 미묘한 차이의 다른 웃음들이 시간이 갈수록 채워졌다.
웃고 있는 어릴 적의 사진들을 보면 나는 그때의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안에 서 있는 아이가 너무 예뻐서 혹시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닐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 있는 나는 내가 맞다. 그 사실이 슬프도록 내 뒤통수를 때렸다.
사진 속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내가 빛난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세상이 뿜어내는 빛보다 그 그림자에 가깝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빛을 피해 그림자에 살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얼굴에는 그늘이 졌다. 환하던 낮이 밤이 되는 건 생각보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내가 보낸 시간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 흔적을 알 수 있는 건 희미하게 남아있는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들 덕분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얼기설기 얽혀져 잘 알아볼 수조차 없다. 너무나 반짝거려 속에 꼭 품고 있던 일도, 왠지 모르게 심장이 간질거렸던 일도, 떠올리기만 하면 눈물이 나던 일도. 내가 살았던 시간은 허무하게 사라졌다.
이런 일은 어딘가 허전하고 명쾌하지 못하다. 완성되기 직전의 퍼즐에서 자꾸 조각 하나가 사라지는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 그 자리에 똑같은 모양의 다른 퍼즐이 생기고, 다른 곳에 있는 퍼즐이 사라진다. 그렇게 퍼즐은 한 순간도 완성되지 못한다. 퍼즐을 계속 맞추다 보면 어느새 다른 그림이 되어 있다.
시간은 많은 걸 사라지게 하고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채워 넣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길어진 그림자가 들어찼고, 웃음꽃이 진 자리에는 가면이 덮여졌다. 장식장 구석에 박힌 오르골을 꺼내기엔 시간이 없었고 아이들이 뿌려대는 분무기는 성가실 뿐이었으며 아빠의 안경은 더 이상 어지럽지 않았다.
사라지지만 계속되고 채워지는 것, 시간이란 그런 것이었다. 투명한 벽처럼 기대는 순간 무너져 버려서 가지게 되는 의문 같은 것이었다. 나는 떨어지며 생각한다. 그 벽은 무너진 걸까, 사실은 없었던 걸까? 곧이어 도착한 깊고 높은 곳에서는 투명한 벽이 보인다. 나는 다시 떨어지며 생각한다. 저 벽은 있었던 걸까, 없었던 걸까?
그렇게 시간과 한바탕 추격전을 벌이면 모든 것이 흑백으로 보인다. 회색 빛깔의 무의미해진 삶은 나의 세상을 평범함과 비극의 경계선으로 이끈다. 하늘 위로 펼쳐져 있는 평범함과 아래로 출렁이는 비극은 섞일 듯 섞이지 않는다. 그 경계선 위에서 가라앉았다 뜨기를 반복하는 것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공포심으로 다가온다. 새까만 물이 귀를 뒤덮을 때 느껴지는 적막과 귀밑으로 찰랑거릴 때 들리는 물소리는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무늬 없는 잿빛 하늘은 초점을 헷갈리게 만든다.
그러는 중에도 시간은 여전히 태연하게 흘러갔다. 얄미울 정도로 바깥의 시간은 곧게 나아가기만 했다. 하지만 시간도 속에서부터 배배 꼬인 내 멋대로의 시야를 어쩌지는 못했는지 나의 하루는 점점 짧아졌다. 바깥의 시간과 불균형을 이루는 나의 시간은 고갈되어 갔다. 어떤 것을 해도 시간이 부족해서 나는 쫓기는 삶을 살았다. 누구보다 여유롭게 비춰졌지만 그 속을 파고 들어가 보면 항상 조급해져 있었다. 그러다 나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도 잘 소화해내지 못하게 됐다. 그건 마른 흙이 미처 삼키지 못하고 화분 받침에 고이게 된 물 같았다.
흐르고 흘러 바다를 벗어나 땅을 밟고 선 순간 나는 원하던 평범함에 도달했지만 그게 진정 내가 원하던 것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금세 잊어버리고 완전한 검은색도 아니고 하얀색도 아닌 채로 살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무늬 없는 잿빛 하늘이 되어 있었다.
이 과정을 거치고 온 나는 지금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무슨 색의 빛으로 빛나는지, 어떤 그림의 퍼즐을 가지고 있는지, 출렁이는 바다의 일부인지, 잿빛 하늘의 일부인지 알아볼 수 없다. 알아내고자 시선을 돌렸을 때 보이는 건 여러 차례 파도에 휩쓸려서 깎이고 쌓여 있는 시간의 무더기들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알아낼 수 있는 건 내가 시간과의 뒤엉킨 헤엄 속에서 살아남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간 것도, 시간의 무더기들을 만든 것도 내가 버텼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 사실은 자연스럽게 내 안에 스며들어 밤을 달릴 수 있는 힘이 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