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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개구리 Nov 17. 2022

소영이에게, 소영이가

내가 내게 쓴 편지들

 오늘은 수능날. 선생님들께서 수능을 치르는 고등학교에 지원을 나가시는 덕에 중3인 나는 학교를 가지 않는다. 이 기회에 나는 할 일을 모두 처리하겠다고 다짐했다. 역시나 다짐은 지켜지지 않았다.


 내일 있는 책 소개하기 수행평가를 준비하려고 아래한글을 켰다. 그러고 6시간이 흘렀다. 한글 문서에는 여섯 줄이 적혀있고, 내 코에는 눈물을 따라 나온 콧물이 자리 잡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처음에는 진짜 수행평가를 준비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웹소설이 너무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웹소설 문서를 켜고는 조금 구상하다가 밥을 먹었다. 그다음 다시 본격적으로 하려다가 내가 그린 그림을 수정하고 싶어졌다. 종이에 그린 그림을 스캔하고, 포토샵 앱을 다운로드하고, 그림을 수정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된 나머지 나중으로 미뤘다. 전에 그린 그림이 잘 안 되니 새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기분도 낼 겸 미술용품을 사러 밖으로 나가려고 씻으려는데, 마침 화장실 소독을 했다는 게 생각나서 안 씻고 밖에 안 나가기로 했다.


 그 후 진짜 정신을 차리고 수행평가 준비를 하려는데 예전에 받은 편지들이 생각나서 추억 상자를 뒤적거렸다. 오랜만에 편지들을 보니 마음이 데워져 눈에서 즙이 새어 나오려고 했다. 나는 입원했을 때 병원에서 받은 편지들을 보며 좋지 않았던, 그럼에도 추억으로 남은 그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추억 상자를 덮으려고 했다. 진짜로, 덮으려고 했는데…….


 하필 그때 그동안 펼쳐보지 않던 편지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일기 대신 스스로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는데, 그 편지는 13개나 있었다. 일기 쓰는 걸 싫어하는 내게 일기 같은 게 13개나 있다는 건 굉장한 것이었다. 나는 흑역사를 보는 심정으로 예쁘게 딱지 모양으로 접힌 편지를 펼쳤다.


 나는 어떻게든 감정을 표현하려고 싸지른 욕들이 편지에 가득 채워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을 깨고 편지의 내용은 생각보다 잘 정리되어 있었으며, 예쁜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편지는 주로 그 날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감정, 어떤 생각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온통 우울한 이야기뿐이었다. '언제는 자해를 했고, 어떤 날에 들켰고, 그래서 수간호사님께 무슨 이야기를 들었으며, 나는 그 이야기를 의심했고' 같은 이야기들은 자조적으로 적혀 있었다. 스스로에게 쓴 편지는 앞에서 본 편지들보다 그때를 더욱 생생히 떠올리게 했다. 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너무 힘들었다.


 2021년 11월 9일

-아, 살기 싫다. 이런 말이 습관처럼 드는 내가 여길 나가고, 밖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미래의 나에겐 미안하지만 솔직히 잘 못 지낼 것 같아. 자신이 없어. 왜 이렇게 나에게는 미안하기만 한지.

-수간호사쌤의 '혼내는 게 아니라 걱정하는 거야'라는 말을 믿고 싶어.

2021년 11월 13일

-요즘 기분이 너무 우울해. 왜 이러는 걸까? 지금쯤 넌 답을 알고 있을까. 아닐 것 같아. 내가 아는 넌 그런 애가 아니거든. ……. 짜증 나. 그냥 죽고 싶어. 울고 싶어. 내가 나아지긴 할까? ……. 그냥 하루 중 24시간을 자고 싶을 뿐이야.

2021년 12월 16일

-오늘 보건소에서 편지가 왔어. 나 입원 연장이래. 이유도 없어. 심사회에서 그렇게 정했대. 그래서 너무 우울했어. 또 울고 말았어. 하루에 한 번씩은 우는 것 같아. 나 대체 어떡하면 좋아? ……. 부디 이 편지를 읽고 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사랑해. 안아주고 싶은 소영이에게.

-(병원 전원을 추천 받고) 그래도 이 병원보다는 나을 거야. 그러니까 믿자. 나는 나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하자마자 믿음이 흔들리려고 해. 나 어떡하면 좋니.

2021년 12월 18일

-언제쯤 난 내가 좋아질까? 사실 지금도 싫지는 않아. 근데 조금 미워. 미안해... 이 편지를 네가 볼 때는 널 사랑했으면 해.

2021년 12월 19일

-간호사실에 말해봤자, 혹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는 것 같아. 내가 귀찮은 존재가 될 수도. ……. 이유는 찾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된 걸까? 수많은 물음표들이 머릿속에서 맴도는데 무엇도 답을 찾을 수가 없어. 포기한 것 같아. 내가 나를 바꿀 수 있기는 할까.

-넌 할 수 있고, 나도 할 수 있어. 그래도 지금은 좀 바보 같다. 미안해, 사랑해. 넌 소중해.

2021년 12월 24일

-내가 뭘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어. 퇴원? 퇴원하면 뭐할 건데? 다시 입원할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2021년 12월 25일

-친구들, 아니 그냥 나를 알던 밖에 있는 사람들 모두와 멀어지는 느낌이야. ……. 고민하다가 간호사실에 갔는데, 내게 필요한 건 온기였는데 보호실에 들어가서 진정하고 나오라고 말하더라. 할 수 없이 그냥 계속 울었어. ……. 울면서 '나는 왜 이래? 왜 난 힘들고 아프지?'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어. 미안, 털어놓을 곳도 여기밖에 없다. 미안해.


 내가 내게 쓴 편지의 내용 중 일부다. 편지는 모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인 '안녕'으로 시작했다. 모든 편지가 다 그런 걸 보고 '나는 나구나'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편지는 우울했지만 때로 희망찼고, 우울함 속에서도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의 행복을 빌어줬다. 펑펑 울고는 생각했다. 내가 나한테 기댈 수도 있구나. 과거의 나도 알았던 내용을 왜 지금의 나는 모르고 있나.


 친구가 없다며 외로워서 울던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화, '바람의 꿈'에 나왔던 말처럼 중요한 건 '나'라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다. 진정한 혼자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있어 과거의 소영이가 버텼고, 과거의 내가 있어 지금의 소영이가 있다.


 지금은 좋은 병원을 만나 그토록 원하던 퇴원을 했다.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학교생활도 하면서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다. 편지를 보기 전까지 미워했던 아픈 나를 이제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도 잘 버티고 있을 너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안녕. 난 지금 여기 있어. 고마워, 소영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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