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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개구리 Nov 18. 2022

1분 30초

 부서진 기억의 조각들 사이로 내가 걸어 나왔다. 나는 조각들을 사뿐히 지르밟고는 깨진 유리가 붙어 있는 시계 앞에 섰다. 유리는 깨졌지만 시계는 잘 돌아가고 있었다. 팔딱팔딱 뛰는 시계의 심장 소리가 귀에 들렸다. 내 앞을 지나가는 초침을 잡아 매달렸다. 나는 30초 동안 반원을 그리고 올라가 제일 높은 곳에 도착했고, 다시 30초 동안 반원을 그리며 내려와 처음 자리에 도착했다. 결국 시작점과 도착지는 같은 여행이었다.


 시간은 돌아온다. 그리고 흘러간다. 내 하루는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가 고이 접혀 내게로 돌아왔다. 접혀진 하루를 펴는 동안 또 다른 하루가 흘러갔고, 나는 잘 펴진 하루를 살았다. 반복되는 행동들 속에서 풍경은 흘러갔고 내 하루는 조금씩 변해갔다. 군데군데 찢어져 오기도 하고 구겨져 오기도 했다. 접혀진 하루 속에는 깨진 조각 같은 것이 비집고 나와 따끔한 상처를 내고 한 방울 피를 맺히게 했다. 고였던 피는 팔의 각도를 틀자 흘러내렸다. 나는 계속 똑같게 하루를 보냈다. 깨진 조각은 계속 내 몸에 상처를 냈다. 그 조각들은 하루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나를 밀어내고 자리 잡은 조각들은 합쳐져서 나를 비추는 끔찍한 거울이 됐다. 얼기설기 이어 붙여진 거울 속의 나는 금이 가 있었다.


 보고 싶지 않아서 외면하다가 이제야 마주하게 된 나는 생각보다 더 보잘것없어서 A4 크기의 하루를 벗어났다. 무작정 걸으니 못 보던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도로 위의 자동차, 단풍으로 물든 나무, 높은 건물에 걸려있는 간판들이 유난히 빛나 보였다. 보고 싶지 않아서 외면하다가 이제야 마주하게 된 세상은 생각보다 예뻐서 나는 잠시 멈춰 섰다. 내가 살던 A4와는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세상에 압도당한 나머지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주변의 공기가 거대한 신발로 변해 나를 찌그러트릴 것 같은 느낌에 나는 근처 건물로 들어갔다. 주변에 나를 가두는 벽이 생기자 조금 살 것 같았다.


 건물 안은 왠지 익숙했다. 나는 이유 모를 기시감을 느끼고는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문 위에 있는 비상구 표지판을 보고 두꺼운 철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린 문은 철커덕 닫혔다. 나는 잠시 손잡이의 차가운 금속에 여운을 빼앗기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아무도 없는 계단에는 내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꼭 물속에서 들리는 일정한 투레질 소리 같다고 난 생각했다.


 계단을 올라가며 중간중간 보이는 창문 너머로 내가 땅과 멀어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어느 정도 올라왔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창가 옆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투레질 같은 발소리 대신 올라오느라 지친 내 숨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들은 숨찬 소리와 폐 속에서 느껴지는 찬 공기, 이마에 맺힌 약간의 땀이 내가 살아있음을 떠올리게 했다. 그건 꼭 과거의 한 장면 같았다. 온몸에서 뛰는 맥박에 기분이 이상해져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그러고는 투레질 소리와 함께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저 생각 없이 계단을 오르다 보니 금방 끝이 보였다. 계단을 오르는 것이 끝나자 내 짧은 삶도 끝이 났다. 더 이상의 계단은 없다. 눈앞에 보이는 사실이 하얘진 머리를 강하게 때렸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문을 열었다. 들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두꺼운 철문이었다. 손잡이는 차가웠고, 풍경은 눈부셨다.


 높아진 위치에서 보는 여전히 높은 건물과 간판들은 빛났다. 나는 난간 앞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푹신한 구름 위에 누워 아무 생각 없이 빗물과 같이 떨어지고 싶다. 떨어지면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공기들에 베일 듯 아리면서도 비집고 나오는 눈물에 얼굴이 일그러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나는 가만히 비를 기다렸다. 날씨는 아주 화창했다.


 비가 내렸다. 죽은 시계의 소리가 A4 크기 서랍에 담겼다. 나는 시계의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져 가장 낮은 곳에 안착했다. 결국 시작점과 도착지는 같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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