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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규 Jan 06. 2023

눈에 대한 추억


눈이 내린다.

그 옛날 내 고향에 눈이 내리면 기본이 20~30cm였다.


눈이 내리면 항구의 등대에서는 안전귀항을 위해 무적(霧籍)을 울리고, 멀리 사라져가는 무적 소리와 함께 등대 불빛에 내리는 함박눈이 환하게 빛나다가 사라지곤 했다.


눈 내리는 밤이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장사꾼의 "찹싸알떠억~ 메밀무욱!" 소리가 골목에 퍼졌고, 문천당 앞 길가 가판 리어카의 카바이트 불빛은 내리는 함박눈에 흔들렸다.


머리엔 하얀 눈을 얹고, 학교에서 언덕길을 내려갈 때면 여기저기서 넘어졌다 일어서는 친구들이 보였고,

맞은 편에서 속여고 학생들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걸어올 때면 짐짓 사내다운 척 씩씩하게 걸으려 애썼지.


환한 상가의 불빛 아래 인도에서 함박눈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가다가 맞부닥친 여고생과 서로 피한다는 것이 연거푸 같은 방향으로 피하다가 민망해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를 보고 눈이 동그래지던 옆 성당 여학생.


크리스마스 미사를 마치고 언덕길을 내려갈 때 내가 내민 팔을 꼭 붙잡고 매달리듯 내려오던 소꼽친구.


다음날 아침 창문을 열고 내다봤을 때 병풍처럼 펼쳐져 보이던 눈덮힌 설악산과, 처마 밑으로 살짝 미끄러져 내려온 고드름.


그 고드름을 따서 입안에 넣어도 더럽다는 느낌이 없었다.


몇년후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날, 비선대 가는 길이 마치 눈터널처럼 변했던 그날.

아무도 들어간 발자국이 없는 숲 속에서 꽁꽁 언 첫사랑의 볼을 감싸쥐고 맞추었던 입술.


이제는 눈이 내리면 낭만이 아니라, 오늘같은 날 비행하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라는 감성도 메말라버린 중년으로 살지만, 창밖에 소복히 쌓인 눈을 보니 그 옛날 기억만은 또렷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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