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친구와 간만에 카페에서 수다를 떨던 중이었다. 시간은 저녁 여덟 시 삼십 분을 조금 넘어가던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어디니, 로 시작해 얼른 씻고 쉬어라, 로 끝날 게 분명한 안부전화. 한창 재미있던 이야기를 끊기 싫어 울리는 진동을 멈추게 한 뒤 얼른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뒤집힌 핸드폰 화면은 몇 초간 더 불빛을 번쩍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엄마에게서 걸려오는 전화에 자주 이런식으로 대처하곤 했다. 엄마는 보통 바쁜 일과가 얼추 끝나갈 시간에 전화를 걸고, 나는 그 전화를 놓치곤 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모른척하고 싶다는 쪽에 가깝다. 보통 엄마의 전화는 일상적인 안부 확인이기 때문에 하루를 걸러도 별 다를 것이 없다. 또 다른 이유는, 같잖게도 '나 먹고살기 바빠서'다. 어디 나만 그렇겠느냐만은, 가끔은 하루 이십사 시간을 '사는'것이 아니라 '살아내는'느낌으로 버텨야 하는 날이 있다. 크지도 않은 잔이 찰랑찰랑하게 차서, 티스푼 하나만 담가도 왈칵 넘쳐버릴 것 같은 그런 날에는 엄마에게서 전화 오는 전화가 무섭기까지 했다.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검은 물살처럼 넘실대는 날에는, 늘 하는 안부인사조차 날 선 말로 받아치게 되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밥 잘 챙겨 먹고 다니라는 말에는,
차려주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시간 맞춰 세끼를 챙겨 먹느냐 는 말이.
파마도 새로 하고 옷도 예쁘게 입고 다니라는 말에는,
누구는 그렇게 할 줄 몰라서 안 하나, 돈 없고 시간 없으니 못하는 거지 라는 말이.
시간 날 때 한 번 내려오라는 말에는,
회사생활이 그렇게 내 마음대로 되는 줄 아냐 는 말이.
작정이라도 한 듯 입에서 마구 튀어나온다.
어쩌다 엄마가 왜 이렇게 통화 한 번 하기가 어렵냐고 이야기하면,
- 내 친구는 엄마랑 일주일에 한 번 통화할까 말까래.
나이가 서른인데 뭔 전화를 맨날 해야 돼?
라고 툴툴대곤 했었다. 자식은 자식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서로 간섭하지 않고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게 쿨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정과 간섭은 종이 한 장 차이도 못 되는 것을. 하루 오 분, 길어봤자 십 분 이십 분의 시간 동안 엄마가 하는 것은 간섭이 아니라 대부분 내 걱정이었다. 혹은 함께하지 못하는 일상의 공유였다. 다 큰 딸의 밥과 옷을 챙기는 그 전화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나는 많이 지쳐있었나 보다. 그렇게나마 변명을 하고 싶다.
'나중에 전화할게'.
엄마한테는 그 말을 참 많이 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지금은 출근 준비하느라 바쁘니까 이따 얘기해,
회사야 나중에 전화해,
방금 퇴근해서 이제 밥 먹으려던 참이야 밥 먹고 할게.
내가 고등학생 시절 가장 좋아했던 책은, 신경숙 작가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이다. 내용도 그러하지만, 특히 제목이 주는 아련함이 사춘기였던 나에게 무척 크게 다가왔었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난 지금, 서른을 맞이한 나는 어느 날 아침 문득 깨닫는 것이다. 나를 찾는 엄마의 전화벨은 언젠가 멈추게 되어있다는 것을. 살면서 수백 번을 눌러온 그 전화번호로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엄마가 받지 않는 그런 날이 온다는 것을 어쩌다 잊고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어제도 채 받지 못한 엄마의 전화, 아침에 생각나자마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어딘지, 밥은 먹었는지, 파주에 비가 많이 왔다던데 괜찮은지, 그리고 시답잖은 드라마 이야기를 했다. 어려울 것 하나 없는 것을. 이제는 엄마를 기다리게 하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