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거 김 대리가 최종적으로 더블 체크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저는 러프한 초안만 전달했을 뿐인데요."
오후 2시, 본부장 주재의 주간 업무 보고 시간. 빔 프로젝터의 냉각 팬 돌아가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리던 회의실의 공기가 일순간 차갑게 얼어붙었습니다. 다음 주 런칭을 앞둔 대형 프로젝트에서 치명적인 데이터 누락이 발견되었고, 본부장의 미간이 좁혀지며 펜 끝이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박 과장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너무나도 매끄럽고 자연스러웠습니다. 잘못된 기본 자료를 최초로 넘겨 병목을 만든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막내인 김 대리에게 부드럽게 화살을 돌렸습니다. 검수를 꼼꼼히 하지 않은 최종 실무자의 선에서 책임의 꼬리를 자르려는 방어막이었습니다. 황당함과 억울함에 말문이 막힌 김 대리의 목덜미는 붉게 달아올랐고, 반박할 타이밍을 놓쳐 입술만 달싹였습니다. 하지만 박 과장의 표정은 무고한 길 잃은 어린양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철저하게 연기된 당혹감이 그의 얼굴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는 흡사 최고급 테플론 코팅이 된 프라이팬 같습니다. 어떤 끈적이는 문제나 무겁고 더러운 책임이 위에서 떨어져도, 그에게 닿는 순간 마법처럼 미끄러져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 찰싹 달라붙습니다.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전사적인 칭찬이 쏟아지면 "제가 처음부터 그 방향으로 이끌었죠"라며 성과의 정중앙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습니다. 하지만 작은 문제라도 터지는 순간 그는 이미 사건 현장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호 속으로 숨어버린 그곳엔 그러게 제가 처음에 약간의 우려를 표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혀를 차며 말하는 건조하고 객관적인 평론가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부류를 책임 회피의 달인 혹은 오피스 미꾸라지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겉보기엔 무능하지도 않고 횡포를 부리지도 않지만, 조직의 근간인 신뢰를 가장 조용하고도 치명적으로 갉아먹는 독소입니다.
거대한 조직이라는 정글에서 오피스 미꾸라지들이 살아남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언어의 연금술'입니다. 이들의 사전에 제가 잘못했습니다 또는 제 판단 미스였습니다라는 1인칭 주어의 문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구사하는 언어에는 항상 얼굴 없는 제3자가 등장하거나, 상황 자체가 생명력을 얻어 주어가 되는 기이한 문법이 적용됩니다.
"갑자기 서버가 다운되는 바람에 일정이 완전히 꼬였습니다."
"타 부서의 데이터 공유가 예상보다 늦어져서 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위에서 자꾸 기획의 방향을 틀어버리는데 실무 라인에서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이들의 화법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모든 문제는 불가항력적인 외부 환경의 장난이거나 타인의 치명적인 무능 때문에 발생한 우주적 차원의 재난처럼 들립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3인칭 관찰자 시점에 머무릅니다. 자신이 몇 달을 쥐고 흔들며 기획하고 결재를 올린 프로젝트조차 문제가 감지되는 순간, 마치 남의 부서 일인 양 김 과장이 무리하게 주도했던 그 건으로 명칭을 스윽 바꿔 부릅니다. 능동태는 철저히 배제되고 오직 당했다는 수동태만이 그들의 서사를 지배합니다.
이러한 유체이탈 화법은 놀랍게도 꽤 빈번하게 생존율을 높여줍니다. 매일 수십 건의 사안을 결재하느라 사건의 전말을 제대로 파악할 물리적 시간이 없는 상위 임원들에게는, 논리정연하게 외부의 원인을 분석하며 남을 원망하는 그들의 태도가 꽤 객관적이고 거시적인 보고처럼 둔갑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상사의 불호령이 두렵고 자신의 무능이 들통날까 두려워 숨죽이던 방어 기제였습니다. 하지만 회피의 쾌감을 반복해서 학습한 이들은 점차 교묘한 진화를 거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로 조직 곳곳에 기생하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는 '메일 참조자 스나이퍼'입니다. 이들은 결코 직접적인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애매모호한 문장들로 가득 찬 메일을 금요일 밤 11시 30분 기습적으로 발송하며, 수신자와 참조자에 팀장부터 타 부서 팀원까지 무려 15명을 걸어둡니다. 이들의 목적은 소통이 아닙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저는 분명히 금요일에 모두에게 메일로 공유했습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무적의 면죄부를 확보하기 위한 사격일 뿐입니다.
두 번째는 '구두 지시의 유령'입니다. 이들은 중요한 결정일수록 절대 텍스트를 남기지 않습니다. 흡연장이나 복도 귀퉁이, 커피 머신 앞에서 스치듯 다가와 알아서 적당히 예전 방식대로 진행해 보라는 식의 형체가 없는 지시를 내립니다. 그리고 막상 일이 잘못되어 감사가 내려오면, 내뱉었던 공기를 즉시 지워버립니다. "내가 언제 그렇게 하라고 했어? 내가 말한 건 A가 아니라 B였잖아" 라며 안면을 몰수하면 그만입니다.
세 번째는 '사후의 예언가'입니다. 기획 단계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때 이들은 회의실 구석에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찬성도 반대도 명확히 하지 않고 애매한 미소로 일관합니다. 그러다 수개월 뒤 프로젝트가 완전히 엎어지고 나서야 이들은 봉인을 해제합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내가 기획안 처음 봤을 때부터 이 부분이 리스크 폭탄이라고 생각했어." 이들은 실패를 자양분 삼아 자신의 통찰력을 과시하며, 혼자 고군분투한 실무자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립니다.
책임 회피자들의 파괴력이 두려운 이유는 한 사람의 성향으로 끝나지 않고, 조직 전체의 DNA를 방어적으로 개조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같이 밤을 새우며 고생한 동료가 결정적인 배수의 진 앞에서 이건 네 몫이야라며 혼자 살길을 찾는 서늘한 모습을 한 번이라도 목격한 사람은 영구적인 트라우마를 겪게 됩니다. 그들은 두 번 다시 조직 안에서 날것의 진심을 다해 협력하지 않습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을 파헤쳐 물을 흐리면, 그 물을 마시던 나머지 팀원들 역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거운 방어의 갑옷을 껴입기 시작합니다.
팀워크는 사라지고 알리바이 축적이 업무의 1순위가 됩니다.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결정 하나를 내릴 때도, 나쁜 결과에 대한 책임을 1/N로 나누기 위해 불필요한 결재 라인을 대여섯 개씩 추가합니다. 동료의 실수를 보완해주기보다 메신저를 캡처하여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할 증거 폴더를 만드는 데 혈안이 됩니다. 누구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거나 파격적인 리스크를 감수하려 하지 않는, 철저한 각자도생의 참호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책임지지 않는 문화가 낳은 비극적인 복지부동의 실체입니다.
이 교묘한 동료들이 당신의 땀방울에 무임승차하고 종국에는 당신을 방패막이로 쓰지 못하게 막으려면, 당신 역시 철저하고 냉정한 행정관이 되어 촘촘한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애매함의 그림자 속에서 서식하는 그들을 햇빛 아래로 끌어내는 단 하나의 무기는 바로 집요한 명확함입니다.
1단계: 강철 같은 R&R의 장막 치기
업무가 부여되는 첫날, 모든 역할과 책임을 수술대 위의 해부학처럼 조각내어 공론화하십시오. 회의 중 구두로 대충 넘어간 부분은 스스로 멈춰 세워야 합니다.
"박 과장님이 15일 자정까지 로우 데이터를 확정해주시면, 그것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제가 17일까지 구조화를 진행하겠습니다. 이후 결과값에 대한 데이터 신뢰도 책임은 박 과장님이 지시는 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
우리끼리 뭘 그렇게까지 빡빡하게 따지냐는 둥, 믿음이 없냐는 둥 사람 좋은 미소로 뭉개려는 그들의 시도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친목이 아닌 비즈니스의 영역임을 명확히 하고, 회사 공용 채널에 그 역할을 박제하는 순간 그들이 준비하던 도주로의 절반은 무너집니다.
2단계: 유체이탈에 역질문으로 응수하기
사고가 터지고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혹은 중간에서 전달이 누락된 모양이네요" 라며 꼬리를 자르려는 그들의 시도를 마주할 때 절대 당황하여 방어전을 치르지 마십시오. 당신은 담담하고 건조한 톤으로 날카로운 역질문을 찔러 넣어야 합니다.
"박 과장님께서 전달받지 못하셨다니 당황스럽습니다. 지난주 화요일 오후 4시에 박 과장님 메일로 제가 보낸 초안이 있고, 읽음 확인까지 되어 있습니다. 혹시 그 메일을 읽으시고도 피드백을 누락하신 특별한 업무적 사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
그들의 핑계를 변명으로 받아주는 대화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들의 패턴을 업무태만이나 절차적 누락으로 전환시켜 본질적인 책임을 추궁하십시오. 당신은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대신 미꾸라지가 숨어있는 바로 그 진흙탕 한가운데 돌을 던져야 합니다.
3단계: 기록, 기록, 그리고 또 기록
미꾸라지들이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왜곡되거나 지워질 수 없는 투명한 팩트입니다. 구두나 전화로 오간 중요한 결정 사항은 통화가 끝난 직후 무조건 3줄 요약 메일이나 사내 메신저 문자로 전송하여 흔적을 남기십시오.
"방금 티타임에서 합의한 대로 B안을 폐기하고 A안으로 돌려서 진행 픽스하겠습니다. "
너무 피곤하고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보일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번거로워 보이는 이 건조한 텍스트 한 줄이, 훗날 내가 언제 그랬어 내 말은 그 뜻이 아니었잖아 라며 안면을 갈아끼우는 그들의 입을 틀어막아 줄 가장 견고하고 강력한 방패가 될 것입니다.
자신의 과오를 남의 책상 위에 슬쩍 밀어놓고 자신은 진흙탕을 우아하게 빠져나가는 그들의 처세술은, 당장 내일만 놓고 본다면 꽤 효율적이고 상처 없는 완벽한 생존법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타인의 성과에 무임승차하며 조용히 연봉을 올려가는 직장 생활의 숨은 승리자라고 스스로 위안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 결정적인 진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책임을 피하는 사람은 결국 그 어떤 진짜 권한이나 리더십도 거머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이 가져온 실패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땀방울과 눈물범벅이 되어가며 바닥에서부터 그 파편들을 주워 사태를 수습해 본 뼈아픈 경험의 축적 없이는 어떤 직장인도 진정한 프로페셔널로 단련될 수 없습니다. 한계를 돌파해보지 못한 근육은 퇴화하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당장의 고통을 교묘히 피한 대가로 영원한 성장의 멈춤이라는 값비싼 영수증을 받아들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억울함에 입술을 깨물면서도 그 질긴 책임의 무게를 묵묵히 등에 짊어지고 견디어 낸 불면의 밤들은, 결코 허비된 시간이 아닙니다. 내 탓이 아닌 비명까지 끌어안고 문제 해결을 위해 발로 뛰었던 그 거친 시간들이야말로 당신의 영혼을 단단한 무쇠로 벼려냅니다.
그러니 저 얄팍한 처세술에 흔들리거나 상처받지 마십시오. 오늘 당신이 감내한 그 무거운 책임감의 무게는, 훗날 미꾸라지들이 영원히 헤엄치는 좁은 진흙탕을 벗어나 넓은 바다를 항해할 수 있도록 당신의 등 뒤에 달아주는 크고 찬란한 날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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