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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사랑한미술관 Jun 15. 2021

한 것도 없는데 시간은 왜 이리 빠른가 속상한 이들에게

안규철 작가 <먼지 드로잉> &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


* 유튜브 영상의 스크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s://youtu.be/4t7M5BV_PTo




안녕하세요. 내가 사랑한 미술관입니다.


어느새 올해도 벌써 유월이라니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언제 올해가 이렇게 갔나 하던 차에 안규철 작가의 책 <아홉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을 읽게 되었는데요. 안규철 작가가 쓴 짧은 수필들을 모아 놓은 책인데 작품으로 이어지는 아이디어가 대부분이고 아이디어를 어떻게 작품으로 구현할 것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삽화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밌는 아이디어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먼지 드로잉'이었습니다.


먼지 드로잉은 안규철 작가가 자신의 재능이나 예술적 성과에 대해 불안해하는 예술가들을 위해 고안한 것인데요. 적당한 크기의 종이 위에 원하는 모양으로 그림을 그리듯 양면 테이프를 오려 붙이고 테이프 껍질을 벗깁니다. 그 종이를 먼지가 잘 쌓이고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 한달 정도 놓아둡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양면 테이프에 먼지가 달라붙어 의도했던 형상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면 먼지 드로잉이 완성됩니다. 안규철 작가는 먼지 드로잉에 대해 '미술가로서 아무 일도 하지 않더라도 매일같이 무언가가 나로 인하여, 그리고 나를 위하여 창작되고 있다는 믿음과 위안을 제공함으로써, 이 같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 먼지 드로잉에 도전해보게 되었는데요. 어떤 그림을 그릴까 고민하다 보니 먼지 드로잉에 꼭 필요한 요소인 '시간'에 관심이 가더라구요.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림 대신 '오월'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이때가 4월 말이었는데 5월 역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릴 거란 생각이 들어서 한달 동안의 시간이 쌓여서 만든 작품을 통해 여기 5월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안규철 작가의 설명에 따라 이렇게 '오월'이라는 글자를 양면 테이프로 종이 위에 쓰고, 한달 동안 먼지가 잘 쌓일 법한 곳에 놓아두었습니다. 한달이 지난 뒤, 저의 먼지 드로잉은 이렇게 완성되었답니다. 생각보다 먼지가 많이 붙지 않아서 글자가 엄청 뚜렷하진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먼지들이 모여 이 정도의 형상을 만든 것만으로도 너무 신기하더라구요.


'오월'이라는 단어를 만든 아주 작은 먼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 인생도 이렇게 먼지 같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순간들이 모여 완성되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렬하고 인상적인 순간들이 기억에 오래 남을 수는 있어도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지는 않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대부분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죠. 그런 생각을 하니 매일 마주하는 출퇴근길 풍경이나 친구, 가족들과 주고 받는 농담, 회사에서 들은 격려의 한마디 같이 자세히 들여다보고 기억하지 않으면 쉽게 잊혀지고 말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구요.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도 이와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요. 국세청에서 일하는 주인공 해롤드 크릭은 틀에 박힌 하루 하루를 보냅니다. 매일 같은 시각에 일어나 정해진 횟수만큼 칫솔질을 하고 똑같은 걸음 수를 걸어 항상 같은 시각에 출근 버스를 타는 등 그의 모든 일과는 숫자로 정해져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이 무미건조한 하루 하루를 보내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의문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목소리는 해롤드 인생의 서술자처럼 그의 생각이나 행동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곧 있을 그의 죽음을 예견합니다. 목소리를 추적한 끝에 그는 자신이 비극적인 작품만 쓰는 유명한 소설가가 쓰고 있는 작품의 주인공이란 걸 알게 되고 직접 소설가를 찾아갑니다.


그즈음 해롤드는 체납된 세금을 걷기 위해 방문한 빵집에서 가게 주인인 안나 파스칼에게 반합니다. 그로 인해 숫자로만 채워져 있던 그의 일상에 다양한 감정이 생기게 되죠. 그러던 어느 날 안나는 일과를 마치고 지친 해롤드에게 갓 구운 쿠키를 내어주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법대에 들어갔지만 자기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일은 베이킹이란 걸 깨닫고 대학을 중퇴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안나는 누군가의 지친 하루를 위로해주는 쿠키를 만들 때 세상을 더 멋진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죠.


언제 닥칠지 모를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안나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해롤드는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봅니다.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싶었던 기타를 배우고 다른 이들과 좀더 마음을 터놓고 지내고 칫솔질이나 발걸음 수를 더 이상 세지 않게 됩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뭘 원하는지, 왜 사는지 알아가기 시작하죠.


영화는 다음과 같은 소설가의 내레이션으로 마무리됩니다.


'때로 우리가 두려움과 절망을 느낄 때, 판에 박힌 일상에 빠질 때, 희망 없는 비극에 빠질 때, 우린 바바리안 설탕 쿠키를 주신 신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쿠키가 없을 때 우리는 친근한 손, 자상한 몸짓, 미묘한 격려, 사랑을 담은 포옹, 혹은 위안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다. 병원 침대는 물론 코마개, 먹지 않은 빵, 부드럽게 속삭이는 밀어, 펜더 스트라토캐스터스, 특별한 소설 작품에서도. 우리는 뉘앙스, 예외, 미묘한 차이 등 우리가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사실은 훨씬 더 크고 고귀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을 구해주기 위해 존재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난 그게 진실이란 걸 안다.'


안규철 작가의 먼지 드로잉과 영화 <스트레인저 댄 픽션>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이 어떻게 우리 삶을 지탱하는지 보여줍니다. 속절없이 지나가버린 세월 앞에서 특별히 이룬 것이 없는 것 같아 속상할 때면 아주 작지만 모여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먼지와 안나가 해롤드에게 내어준 쿠키를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요? 텅 빈 채 마냥 흘러가버리기만 한 시간은 결코 없다는 것을, 얼핏 보면 그렇게 보이는 시간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지만 의미있는 것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에요.


영상이 마음에 드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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