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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사랑한미술관 May 10. 2021

좋은 예술 작품이란

양혜규 작가 <솔 르윗 뒤집기> 연작 & 김초엽 작가 <인지 공간>

* 유튜브 영상의 스크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s://youtu.be/IApwdiomyro



안녕하세요. 내가 사랑한 미술관입니다.


2020년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 중 하나인 김초엽 작가의 소설 <인지 공간>은 제목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인지 공간'이라는 장소를 주요 소재로 다룹니다. 소설 속 인류는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살고 있는데 이들의 뇌는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진화해 단기기억의 경우 겨우 하루 동안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거대한 격자 구조물인 인지 공간에 모든 지식과 생각을 영구적으로 보관하는데 열두 살이 되면 이 공간에 진입할 수 있게 됩니다. 무수한 입방체들이 층층이 쌓긴 공간 사이를 거닐며 사람들은 지식을 흡수하고 사고를 전개하는데 아주 낮은 층에는 공동체 생활에 필수적인 정보들이 담겨 있고 높은 층에 보관되어 있는 정보일수록 소수의 사람만이 접근 가능합니다. 이들은 뇌의 한계로 인해 인지 공간을 벗어나 사고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 인지 공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공 제나 역시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인지 공간의 관리자가 됩니다. 반면 몸이 약해 인지 공간의 제일 낮은 층만 겨우 접근할 수 있는 그의 친구 이브는 이 공간에 대해 의구심을 품습니다. 그는 인지 공간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곳에 담겨 있는 지식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불완전할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그는 제나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만 제나는 이를 터무니 없고 허무맹랑한 것으로 여기죠. 그러던 중 이브는 실제로 어떤 이야기가 인지 공간에 저장되지 못해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아예 없었던 일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인지 공간의 유한한 지식이 사람들의 모든 기억을 점령해서는 안되며 공동의 인지 공간과 더불어 사람들마다 개별적인 인지 공간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여러 실험을 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이브는 세상을 떠나고 제나는 이브에 대한 기록을 인지 공간에 남기지 않을 거란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그제서야 이브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브의 실험을 이어 나갑니다. 개별적인 인지 공간이 필요하다는 증거를 찾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연구 끝에 만들어낸 개별 인지 공간을 가지고 제나가 인지 공간 바깥으로 떠나면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층층이 쌓인 격자로 이뤄진 거대한 인지 공간을 상상하며 소설을 읽다 보니 이와 비슷한 모양을 가진 양혜규 작가의 <솔 르윗 뒤집기> 연작이 떠올랐습니다. 이 작품은 미니멀리즘 작가 솔 르윗의 <세 개의 탑이 있는 구조물>을 확장하고 뒤집어 재해석한 작품인데요. 솔 르윗의 작품이 입방체의 뼈대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양혜규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블라인드라는 소재를 사용해 입방체의 면을 만들고 솔 르윗의 작품을 제목 그대로 뒤집어서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해석은 공동 인지 공간에 대한 이브와 제나의 생각과 맞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브와 제나는 공동 인지 공간의 한계를 인지하고 이를 보완할 목적으로 개별적인 인지 공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 한계는 사소하고 개별적인 기억이나 정보는 인지 공간에 기록될 수 없고 정해진 기준에 따라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 정보만 보존된다는 데서 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블라인드라는 소재는 쉽게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만들었다 없앴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특성을 가진 인지 공간을 상상해보면 그 안에 담긴 지식이나 기억이 전보다 더 유동적으로 인지 공간 안팎을 넘나 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지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절대적인 믿음도 점차 약해질 것이고 약해진 믿음 사이로 개별적인 인지 공간과 같이 또다른 가능성이 떠오르게 되겠죠.


소설 속에서 제나는 인지 공간의 맨 아래층에만 접근할 수 있는 이브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맨 위층에 보관되어 있는 지식을 습득해서 이브에게 알려줍니다. 양혜규 작가의 작품처럼 인지 공간을 뒤집을 수 있다면 이브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도 높은 곳에 위치한 입방체 속의 정보들을 접할 수 있게 되겠죠. 그렇기 때문에 양혜규 작가의 뒤집기는 지식의 위계 질서를 뒤집는다고 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인지 공간을 통째로 뒤집어서 그 안에 담긴 모든 정보를 쏟아버린 듯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후자의 경우는 엄청난 전복처럼 느껴져서 통쾌한 기분마저 들더라구요.


소설 속 인류처럼은 아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 공유하는 인지 공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안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옳다고 믿거나 절대적인 것이라 여기는 지식이나 규범 같은 것들이 담겨있고 평소에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거나 의심을 품지 않습니다. 마치 이브의 의견을 허무맹랑한 것이라 여기던 제나처럼 말이죠. 솔 르윗의 작품을 재해석한 양혜규 작가나 인지 공간 너머의 바깥 세상을 꿈꾼 이브와 제나를 보면 어떤 개념을 전복시키거나 기존의 체계가 아닌 새로운 가능성을 도모하는 자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렇게 예술 작품은 제가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드는데 저는 이런 자극을 주는 작품이 좋은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랍니다. 그런 면에서 제 영상도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었기를 바래 봅니다.


영상이 마음에 드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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