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현 작가 <Reconstruct> & 황정은 작가 <백의 그림자>
* 유튜브 영상의 스트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숨을 고르게 하는 예술의 순간들 | 정지현 작가 | Reconstruct 연작 | 황정은 작가 | 소설 | 백의 그림자 https://youtu.be/kLUP9Pw8K28
안녕하세요. 내가 사랑한 미술관입니다.
황정은 작가의 소설 「백의 그림자」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오래된 전자상가를 배경으로 그 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전자상가는 총 다섯 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한 개 동이 철거되는 과정을 소설은 은교와 무재라는 두 주인공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낡고 오래된 것은 없어져야 하고 자신들의 동네를 슬럼으로 여기는 세상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하게 됩니다.
소설에는 그런 시선과 반대되는 가치를 보여주는 장소가 등장하는데요. 전자상가 한 켠에 있는 '오무사'라는 작은 전구 가게입니다. 30년 전 모습 그대로인 듯 낡고 어두컴컴한 가게엔 백발의 칠십 대 노인이 빽빽하게 쌓여 있는 전구 상자들 틈에서 전구를 팔고 있습니다. 은교는 오무사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바쁜 일로 서두르며 오무사까지 걸어갔어도 그거 주세요, 하고 난 뒤로는 오로지 그의 패턴으로만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오무사를 방문한 손님들은 입구에서 넋을 놓고 선 채로 가게 안을 들여다보거나, 근처 구멍가게에서 삶은 계란을 까먹으며 기다렸다가 전구를 받아 가곤 했다. 노인은 느릿해도 대단히 집중해서 움직였으며 그 움직임엔 기품마저 배어 있어서, 손님의 처지에선 재촉할 틈이 없었다. 대단히 성급한 사람 중에 몇 마디 투덜거리는 경우는 있어도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경우는 없었다. 오무사의 상자들이 워낙 오래전부터 쌓여 왔던 것들이라 어디서도 구해 볼 수 없는 전구를 거기서는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잘 보면 볼펜으로 조그만 표시가 된 상자들도 있었지만 표시조차 없는 상자들이 더 많아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곳의 주인 뿐이었고, 사실 오무사의 노인은 어떤 전구를 달라고 해도 헤매는 법 없이 곧장, 느릿느릿하기는 해도, 그 전구가 담긴 상자가 있는 선반을 향해 걸어갔다.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전구는 다 어떻게 되나. 그가 없으면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까.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지는 않을까. 오무사에 다녀오고 나면 이런 생각들로 나는 막막해지곤 했는데, 수리실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엔 수리실과 여 씨 아저씨를 두고 이것과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서 나는 그때마다 수리실의 내력을 생각해 보고는 했다.'
오무사는 바깥 세상의 속도와 상관없이 자신만의 속도로 존재하며 가게를 방문하는 이들까지 그 속도에 발을 맞추게 합니다. 세월이 켜켜이 쌓인 공간과 그 세월을 함께한 주인 할아버지에게서 풍기는 고고한 분위기 때문일 텐데요. 은교가 오무사를 묘사하는 부분을 읽을 때는 저도 함께 삶은 계란을 까먹으며 넋을 놓고 주인 할아버지가 전구를 찾는 모습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무사는 건물이 철거되는 과정에서 한번 이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내는 사라지게 되는데요. 오무사는 점점 빨라지는 사회의 속도와 그에 맞춰 오래되고 낡은 것들은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세태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합니다.
「백의 그림자」가 오무사를 통해 오래되고 낡은 것들이 가지는 가치를 보여준다면 반대로 잠시 머무르다 금새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습니다. 지난 여름 송은 아트 스페이스에서 열린 단체전 <Artist Take-Over Part.3>에서 본 정지현 작가의 사진 작품 <Reconstruct> 연작인데요.
저는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사진이 아니라 추상화인 줄 알았는데 액자 속 공간이 3차원 입체라기보다는 2차원 평면처럼 보이고 피사체가 익숙하지 않은 소재라 그것이 카메라 앞에 놓여있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로 존재하는 무언가를 찍은 사진이라고 하기엔 작품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기 때문인데요. 단순한 형태의 직선과 곡선으로 널찍하게 분할된 면들이 흰색, 회색, 하늘색 등의 창백한 색들로 채워져 있는 화면을 마주하니 제 마음도 차분하고 매끈하게 정돈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진보다는 작가의 의도가 더 많이 반영되는 방식으로 만든 작품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체 무엇을 찍은 사진이길래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궁금하실 텐데요. 정지현 작가는 재건축이나 리모델링 현장에 관심이 많아서 이를 소재로 한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Reconstruct> 연작은 1970년에 완공되어 우리나라 근대 건축사의 한 획을 그은 삼일 빌딩의 리모델링 현장을 찍은 사진입니다. 현장에서 건축 자재들이 건물의 일부가 되기 전에 잠시 어딘가에 놓여있는 모습을 포착한 것인데요. 제가 작품을 보며 느낀 감정과는 상반되는, 시끄럽고 어수선한 환경에서 탄생한 작품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백의 그림자」 속 오무사와 정지현 작가의 <Reconstruct> 연작은 각각의 소재가 품고 있는 시간의 길이만 놓고 보면 서로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오무사가 빠르고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반대로 오래되고 낡은 것의 가치를 보여주고 <Reconstruct> 연작은 액자 바깥의 동적이고 소란스러운 환경과 대조적으로 고요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접점을 가집니다.
은교를 포함한 오무사의 손님들이 주인 할아버지가 천천히 전구를 찾아 담아주는 모습을 별말 없이 지켜보고 제가 정지현 작가의 작품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던 것은 현실에서 흔히 접하기 어려운 가치와 분위기를 발견했기 때문인데요. 이런 순간들이 있기에 우리가 빠르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책을 읽고 미술관에 가고 거기서 느낀 바를 글과 영상에 담는 것도 모두 이런 순간들을 더 자주 접하고 싶기 때문인데요. 제 영상과 글에서도 누군가는 그런 순간을 발견하고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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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