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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사랑한미술관 Jan 03. 2022

부드러운 연둣빛을 띈 이야기

김용선 작가 <일시 정지> & 이슬아 작가 「부지런한 사랑」


* 유튜브 영상의 스크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부드러운 연둣빛을  이야기 | 김용선 작가 | 일시 정지 | 아트로직 스페이스 갤러리 | 이슬아 작가 | 부지런한 사랑

https://youtu.be/UrSS-TXXhCY



안녕하세요. 내가 사랑한 미술관입니다.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은 작가가 글쓰기 교사로 일하며 제자들과 나눈 교감, 좋은 문장을 쓰는 방법 등 글쓰기라는 소재를 가지고 쓴 에세이집입니다. 이슬아 작가의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제자들은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연령대가 다양한데 아이들과 함께한 수업을 다룬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책에는 아이들의 글을 읽고 작가가 써준 짧은 편지들이 실려있는데 열두 살 김시후 학생이 쓴 글을 읽고 이슬아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네가 쓴 글 중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는 것'에 관한 글이 참 좋았어. 그 글에 적힌 문장들 정말 아름다웠는데. 또 너는 이렇게 쓰기도 했어. "낭독을 하고 나면 종종 내가 좋아진다."고. 나는 그 문장 또한 정말 소중하게 다가왔어. 우리는 가끔 어떤 일을 마치고 나면 스스로를 더 맘에 들어하게 되잖아. 시후에게 글쓰기가 점점 그런 일이 되었으면 해. 내년에는 더 제멋대로인 글을 써보자. 차분하지 않은 문장도 마구 써보고 무리도 해보자. 더 자유롭고 예측 불가능한 시후를 기대할게.'


모르는 것을 가르쳐 줘서 감사하다는 편지를 건넨 김세윤, 김채윤 형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걸 가르쳐줘서 고마워. 몰랐던 이야기를 잔뜩 들려주고 써줘서 고마워. 어떤 건 내가 알 것 같은 이야기이기도 했어. 어떤 글에 피드백을 적기 위해서는 내 삶의 경험치를 총동원해야 했어. 그걸 다 동원해도 모르겠는 이야기도 있었어. 더 잘 살아야 할 것 같았어. 계속 글쓰기 교사가 되려면 정말 그래야 할 것 같았어.'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아가는 아이들과 그들이 쓴 문장 하나 하나를 소중히 대하는 이슬아 작가를 보며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었는데요. 아이들의 글에 피드백을 적으며 자신의 경험이 얼마나 부족한지 깨닫고 더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대목에서는 글쓰기와 제자들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이들의 글쓰기 수업은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과 학생들이 글쓰기라는 매개체를 통해 교감하고 함께 성장하는 시간이 되어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슬아 작가는 수업에서 아이들과 이따금씩 주어를 바꿔가며 글을 썼는데 그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남겼습니다.


'그러자 우리의 마음이 바빠졌다. 주어를 늘려나갔을 뿐인데. 나에게서 남으로 시선을 옮겼을 뿐인데. 그가 있던 자리에 가봤을 뿐인데. 안 들리던 말이 들리고 안 보이던 것들이 보였다. 슬프지 않았던 것들이 슬퍼지고 기쁘지 않았던 것들이 기뻐졌다. 하루가 두 번씩 흐르는 것 같았다. 겪으면서 한 번, 해석하면서 한 번. 글을 쓰고 누우면 평소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든 채로 잠드는 듯했다.

우리는 글쓰기의 속성 중 하나를 알 것 같았다. 글쓰기는 게으르고 이기적인 우리를 결코 가만히 두지 않았다. 다른 이의 눈으로도 세상을 보자고, 스스로에게 갇히지 말자고 글쓰기는 설득했다. 내 속에 나만 너무도 많지는 않도록. 내 속에 당신 쉴 곳도 있도록. 여러 편의 글을 쓰는 사이 우리에게는 체력이 붙었다. 부지런히 쓸 체력과 부지런히 사랑할 체력. 이 부드러운 체력이 우리들 자신뿐 아니라 세계를 수호한다고 나는 믿는다.

아이들도 나도 글을 쓰며 간다.

모두가 처음 맞이하는 미래로.'


이슬아 작가와 아이들은 글쓰기를 통해 다른 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꾸준히 무언가를 쓰고 더 많은 것을 사랑할 체력을 기릅니다. 저는 전시회를 보며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시회에서 예술가의 눈을 빌려 세상을 보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또다른 전시를 계속해서 보고 더 많은 것을 사랑할 체력을 기를 수 있었는데요. 이 체력으로 작년에도 여러 전시를 보았는데 그 중에 이 책을 읽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한 전시가 있었습니다.


전시는 작년 봄 삼청동의 아트로직 스페이스 갤러리에서 열린 김용선 작가의 개인전 <일시 정지>였습니다.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은 대부분 오일 파스텔화였는데 그중에서도 오일 파스텔이라는 재료의 부드러운 물성이 드러나는 작품을 보면서 「부지런한 사랑」을 읽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알던 오일 파스텔화는 색칠을 한 뒤 표면을 문질러서 매끈하게 만든 것이었는데 김용선 작가의 그림은 오일 파스텔을 두껍게 칠한 채 그대로 둬서 화면에서 입체감과 재료의 질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유화나 아크릴화는 물감이 두껍게 발라져 있는 부분을 보면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이 들 때가 많은데 김용선 작가의 그림들은 반대로 아주 부드럽고 따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오일 파스텔을 써본 적은 없지만 아주 무르고 부드러운 물성을 가진 재료여야 이런 표현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데요. 오일 파스텔이 덩어리 져있는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가가 손에 주는 힘의 강약에 따라 종이 위로 부드럽게 뭉개지는 파스텔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데 파스텔이 뭉개질 때의 부드러운 질감을 떠올리면 제 마음까지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감정이 들게 한 데에는 김용선 작가가 그린 소재와 그것을 표현한 색감도 한몫 한 것 같은데요. 김용선 작가는 바닥에 비친 햇빛과 나무 그림자, 물결, 수풀 등 자연에 있는 것들을 선명하고 따뜻한 색채로 그려냈습니다. 저는 인공적인 것보다는 자연에 가까운 것에 더 마음이 가고 너무 탁하거나 강렬한 색감은 조금 부담스러워서 이 그림들이 편안하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갔던 작품은 <Still>이었습니다. 첫눈에는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흙 위로 돋아나있는 연두 빛깔의 작은 식물들이 보드랍고 귀여워만 보였는데 계속 보다 보니 이들이 품고 있는 작지만 분명한 생명력이 느껴졌습니다. 그림을 곁에 두고 볼 수 있다면 볼 때마다 저 작고 보드라운 연두색 이파리들로부터 무언가를 시작할 용기나 기운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요.


부드러운 오일 파스텔로 그린 여리지만 씩씩한 이파리들은 보드라운 마음을 가지고 쑥쑥 자라나는 이슬아 작가의 글쓰기 수업 아이들을 닮은 것처럼 보입니다. 좀더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이들과의 교감을 통해 성장해나가는 이슬아 작가나 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읽으며 마음이 자주 말랑말랑해지곤 했던 제 자신과 닮아 보이기도 합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무언가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고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은 이 이파리들처럼 부드러운 연둣빛을 띄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부지런히 배우고 성장하고 감동 받는 날들로 가득한, 부드러운 연둣빛 새해 되기를 바랍니다.


영상이 마음에 드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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