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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사랑한미술관 Dec 20. 2021

예술 작품을 보는 가장 쉬운 방법

노충현 작가 & 허우중 작가 & 요시모토 바나나


* 유튜브 영상의 스크립트입니다. 영상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예술 작품을 보는 가장 쉬운 방법 | 노충현 작가 | 갤러리 챕터투 | 허우중 작가 | 금천예술공장 | 요시모토 바나나 | 데이지의 인생

https://youtu.be/kP4jhacfHsM



안녕하세요. 내가 사랑한 미술관입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데이지의 인생」은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주인공 데이지가 죽음과 추억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만은 아직까지도 가끔 떠올리며 위안을 받고는 합니다. 지금부터 그 대목을 읽어 드릴게요.


'그러고 보니 웃으면서 밤길을 걸어 돌아올 때, 이렇다 할 일이 없었는데도 나중에 되돌아 보면 아주 즐거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중략) 헤어질 때가 되면 늘 좋은 일만 많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추억은 언제나 특유의 따스한 빛에 싸여 있다. 내가 저 세상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이 육체도 저금통장도 아닌 그런 따스한 덩어리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세계가 그런 것들을 몇백 가지나 껴안은 채 사라진다면 좋겠다. 이런 저런 곳에 살면서 쌓인 갖가지 추억의 빛을 나만이 하나로 이을 수 있다. 오직 나만이 만들 수 있는 목걸이다.'


'나라는 상자에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전부가 꼭 꼭 들어차 있다. 누구에게 보이지 않고 누구에게 말하지 않아도, 그리고 내가 죽어도 그 상자가 있었다는 사실만은 남으리라. 우주에 둥실 떠 있는 그 상자의 뚜껑에는 '데이지의 인생'이라 쓰여 있으리라.'


번역가 김난주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데이지의 인생」에서 우리가 보고 느끼고 그리고 공유할 것들은 이렇게 세월과 함께 멀어진 행복했거나 아팠던 기억들, 사람은 가고 없어도 남은 사람의 기억에 새겨진 잔상, 또 기억하는 사람마저 가버렸어도 우주의 오랜 역사에 한 사람의 인생으로 영원히 보존될 온갖 기억의 집적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이중에서도 ‘추억은 언제나 특유의 따뜻한 빛으로 싸여 있고 우리가 저 세상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그런 따스한 덩어리뿐’이라는 대목을 자주 떠올립니다. 과거를 떠올리다보면 좋은 기억뿐만 아니라 대수롭지 않고 특별할 것 없는 기억도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많은데요. 추억은 누구도 들여다보거나 빼앗을 수 없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데이지의 말처럼 인생은 어쩌면 우리 각자의 이름이 적힌 상자에 추억을 차곡차곡 담고 그것을 꺼내보며 울고 웃는 것이 전부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억을 공유한 이들과 유대감을 느끼고, 추억을 더 오래 간직하기 위해 일기나 사진 등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겠죠. 가끔 우리는 무언가를 매개로 상자 안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기억들을 떠올립니다. 매개체는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일 수도 있고 어떤 장소나 냄새일 수도 있습니다. 그림 같은 예술 작품 역시 매개체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가을 갤러리 챕터투에서 열린 노충현 작가의 개인전 <그늘>은 작가가 작업실 근처에 있는 홍제천을 오가며 보았던 천변 풍경을 주요 소재로 삼았습니다. 제게 인상적인 작품은 <산책>과 <망원의 눈>이었습니다. 그림을 보자마자 기억 저편에 있던 어느 날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인데요. <산책> 속 하천변의 모습은 해가 다 뜨지 않아서 가로등 불빛이 아직 켜져 있는 새벽녘을 떠올리게 했고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 시간대에 느낄 수 있는 축축한 공기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흩날리는 눈송이로 가득한 <망원의 눈>은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린 지난 겨울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특히 눈 구경을 하겠다고 신이 나서 나갔다가 눈보라를 만나서 눈에까지 눈이 들어갔던 어느 밤이 생각났는데요. 어제도 서울에 많은 눈이 내렸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눈 내리는 모습을 보니 이 그림이 생각나서 재밌었습니다.


지난 10월 금천예술공장에서는 올해 입주한 작가들의 스튜디오를 공개하며 전시 <온앤오프>를 선보였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허우중 작가의 작품은 여러 점의 회화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걸려있었는데 몇몇 그림들은 벽에 그려진 희미한 선으로 연결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선뿐만 아니라 계산을 하기 위해 벽에 낙서처럼 흘겨쓴 숫자도 작품의 일부처럼 보였는데요. 희한하게도 저는 이 숫자들에 제일 관심이 가더라고요. 일의 자리 뺄셈을 할 때 결과가 음수면 십의 자리에서 10을 빌려오는 연산 과정이 고스란히 벽에 쓰여있었는데 이를 보니 이런 방식의 뺄셈을 처음 배웠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저는 학습지를 하고 있었는데 매일 꼬박꼬박 일정 분량을 풀지 못해서 거의 매번 수업 시간 직전에 일주일치를 몰아 풀었거든요. 하루는 저희 집에 놀러 오셨던 할머니가 그런 제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옆에서 문제를 같이 풀어주셨는데 그 장면이 아직도 기억이 나서 웃음이 납니다. 할머니와 저만의 비밀이었는데 이렇게 공개를 하게 되었네요.


이렇게 어떤 작품이 나만의 고유한 경험이나 감각과 결부되면 그렇지 않은 작품보다 훨씬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작품을 매개로 접점을 가졌다는 생각에 작가분과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여러 작품을 보다 보면 누구나 본인과 접점을 갖는 작품을 만날 수 있는데 저는 이런 경험이 예술 감상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이나 작가, 미술사 등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가능하니 가장 쉽지만 자신 말고는 누구도 들여다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가장 주관적이고 고유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각자의 이름이 적힌 상자에 담을 새로운 기억이 되죠.


제겐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다니며 여러 작품을 통해 저만의 추억을 만들고 그것들을 제 상자 안에 담아놨다가 나중에 꺼내보고 하는 것이 인생의 큰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영상에도 작가나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보다는 작품을 본 뒤 제가 느낀 감정이나 생각 같은 주관적인 감상을 더 많이 담고자 합니다. 그래서 지극히 개인적인 영상들이 대부분인데 예상외로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좋아해주셔서 댓글 읽으면서 뭉클할 때가 정말 많았어요. 그 마음에 보답할 수 있게 앞으로는 좀더 자주 정기적으로 영상을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도 제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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