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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이네집 Mar 31. 2021

설렁설렁, 삶의 보약을 삼킬 것

- <김중석 그림 에세이, 그리니까 좋다>를 읽고

'그리니까 좋다' <김중석 그림 에세이, 창비>


글을 쓰고 싶다거나, 그림을 마음에 품거나, 노래하고 싶다 등 가슴 속에 자기만의 오래된 꿈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안 쓰면 녹스는 것처럼 오래 품은 꿈도 그것이 내 것이었나 싶게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진다.

오래전 접었던 꿈에 대해, 가슴 속에 간직했던 망설임에 대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 기쁨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계속 의심하고 있구나      


“나의 상상력은 왜 이렇게 빈곤하고 나의 그림은 왜 새롭지 않은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예전에 써 둔 메모를 살펴보다가 이런 글귀가 눈에 띄었다.

힘들어하면서 그림을 그려 온 날들이 있었다.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을지 의심한 날이 많았다.

지금도 가끔은 그러지만……. -p.22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의심하는 습관은 평가와 점수에 길들여졌기 때문일까.

글쓰기 수업을 듣고, 글쓰기 책을 사고 글 언저리에서 오랜 시간을 서성거렸지만 내가 정말로 열심히 한 건 글쓰기로부터 ‘도망치기’였다. 읽기도 힘들만큼 넘치는 좋은 글과 책속에 초라한 문장을 더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앞섰다.      


설렁설렁 그리는 기술      


 그림 수업을 하다 보면 어떻게 해야 그림을 잘 그리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잘 그리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편안하게 그리면 됩니다.”

 모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게 가장 정확한 방법이다.

 모든 일은 힘을 빼기만 해도 더 잘할 수 있다.

 내가 오랫동안 그림 작가로 일할 수 있었던 건 설렁설렁 그렸기 때문이었다.

 힘을 빼고 설렁설렁. 부담 없이 설렁설렁. -p.14          


무언가를 창작하고 싶은 욕구는 어린 아이의 놀이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잘 하고 싶은 마음 즉 힘이 들어가면 도전 자체가 어려워진다. 게다가 먹고 사는 굴레 속에 들어가면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손쉬운 쾌락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마음에다, 잘 하지 않으면 의미 없다는 생각에, 밥벌이의 굴레까지 합쳐지면 아무 것도 안하는 시간을 쌓게 되고, 무심히 세월이 흘러간다.      


이 책에는 뒤늦게 그림을 배운 ‘순천 소녀시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사이사이 담겨 있다. 할머니들이 그림 그리는 기록을 들여다보면, 기쁘고 슬픈 묘한 감정이 인다.     

 

 그림을 그리니까 속의 화가 다 풀리는 것 같다.

 그림을 이상하게 그려도 선생님 칭찬을 들으면

 신이 나서 그림이 더 잘 그려진다.

 꽃을 그리고 나비를 그리고 내가 어찌 이 그림을 그렸을까.

 신통방통해서 사진 속 우리 영감한테 자랑한다.

 그림을 그리니까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된 것 같고

 자식들한테 자랑거리가 생겨 너무 좋다.

 - ‘순천 소녀시대’ 김영분     

  

그림 그리는 할머니들의 다양한 사연은 이어진다. ‘생전 처음 하는 일이라 겁이 났지만’, ‘식구들이 잘 했다고 하니까 보약 먹은 것 같’았다고, ‘병상에 있는 남편을 생각하면 그림은 내게 사치인가 생각이 들다가도 그림 덕분에 잠시나마 근심 걱정을 잊어 버’렸다고. ‘그림을 그리니까 우울했던 마음이 밝아지고, 건강이 좋아졌다’고, ‘그림을 그릴수록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잠을 설쳐도 피곤하지 않’았다고, ‘새댁 때 남편이 글을 가르쳐 준다고 해 놓고 내가 못 따라 한다고 포기했을 때는 자존심이 상했는데 나도 잘 하는 것이 있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고 고백한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고 밭으로 일을 나갔다는 할머니 사연은 나의 머뭇거림은 그저 게으름에 대한 핑계였나 싶다. 할머니들에게 그림은 보약이고, 낙이고, 세상의 시름을 잊는 방편이었다. 나의 그림책 글쓰기도 그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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