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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강인성 Apr 24. 2021

J에게

J에게 보내는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편지

세계와 나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던 때. 연극동아리 후배인 L에게 연락이 왔다. 또 다른 동아리 후배인 J가 졸업을 하는데 카카오톡으로 롤링페이퍼를 써야 한다는 소식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졸업식도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동아리 후배들이 귀여운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J는 내가 21살이 되었을 때 후배로 들어온 녀석이다. 그러니 가장 오랜 시간을 같이 해 온 후배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5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연극을 올리고, 술도 진탕 마시며 볼꼴 못볼꼴 다 보며 지내왔다. 어리숙하던 그 녀석. 하지만 심성만은 고운 그 녀석. 언제나 조용히 자기 역할을 다하면서 할 말은 다 하던 똘똘한 녀석. 그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커서 졸업을 다 했을까. 심지어는 작은 게임 회사에 취업까지 했다고 한다. 기특하기도 하지. 


 J의 빠르게 지나버린 시간은 내 시간도 뒤돌아볼 수 있게 해 주었다. 3년 전. 군대를 면제받은 탓에 다른 남자들보다 2년 빠르게 졸업할 수 있었다. 그 말은 남들보다 2년 먼저 사회로 내동댕이 쳐졌다는 걸 의미한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가 졸업식 날에 지겹도록 듣는 말이다. 하지만 저 말은 대학생, 그리고 누군가에겐 고등학생 때까지만 유효한 말이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라는 말은 사실상 '끝은 새로운 시작이어야만 한다.'라는 강압을 부드럽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대학생활의 끝이 다가올수록 새로운 시작, 그러니깐 결국 취업에 대한 압박은 숨 막히게 했다. 그 압박은 지금껏 즐겨온 캠퍼스 라이프의 모든 걸 부정하게 만들었다. 철학과에서 배운 학문도, 연극동아리에서의 경험도 모두. 마치 "지금까지 잘 즐겼지? 이제 그딴 건 집어치우고 남들 다하는 것부터 다시 하자."라고 하는 기분이었다.  
 조금은 과격하게 표현하겠다. 빌어먹을 토익.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노비의 성실성을 판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일 것이다. 적어도 나에겐 토익공부는 영어공부가 아니었다. 누가누가 열심히 외워서 사회의 기준에 맞는 사람이 될 것인가를 테스트하는 시험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꾸역꾸역 한 준비한 토익시험의 점수는 잘 나올 리가 만무했다. 


 내 2년간의 취업준비를 요약하자면 토익시험 준비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온갖 불만을 토로하며 되지도 않는걸 설렁설렁 붙잡고 있었다. 그러면서 취업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도를 열심히도 모색했다. 극단 조연출, 유튜버, 대학원 등등. 돌이켜보면 그건 그저 취업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당연하게도 모두 잘 되지 못했다. 
 2년의 방황에 마지막으로 도전한 대학원의 실패까지. 아버지 회사의 입사를 거부할 명분도 힘도 내게는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여섯 개의 마트를 운영하는 회사의 인사총무가 되었다.  
 인사총무가 된지도 어언 1년. 그 1년의 시간 동안 얻은 건 두 가지다. 적당히 안정적으로 모인 돈. 그리고 '나는 세계다'라는 깨달음. 내면의 평화와 경제적 안정이 찾아오자 그 이전의 애쓰던 시간들이 우스워보였다. 나는 무엇에 홀려 취업준비를 했고, 취업준비를 싫어했던 걸까.  
 그리고 J를 생각했다. J는 무엇에 홀려서 취업을 해버린 것일까. 그리고 지금은 어떤 마음으로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을까. 졸업 후의 기억과 감정을 더듬어보며 J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그리고 J에게 하고 싶은 말을 천천히 적어내려 갔다. 
 




"졸업이라 한다면 대학생활의 끝 아닙니까? 사회인으로서의 시작이고. 대학생과 사회인은 너무 다릅니다. 그래서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스럽죠. 대학생 때는 가만히만 있어도 시간이 잘만 갔는데, 그리고 앞으로 무얼 할지를 생각하면 두근거리고 즐겁기만 했는데. 사회인이 되면 쳇바퀴에 탄 햄스터처럼 계속 발을 굴려야 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과거가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근데 할 수 있는 건 쳇바퀴를 굴리는 것뿐이니 그저 달릴 수밖에요. 
 우리 J는 쳇바퀴를 아무리 굴려도 돌아가지 않는 취준생의 단계를 잘 빠르게 넘겨서 다행입니다. 스스로에게 아주 잘했다고 해주십시오. 
 이왕 탄 쳇바퀴 죽어라 한번 굴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봅니다. 그러면 거기에 맞는 정당한 급여가 나오겠죠. 그럼 저축도 하고. 보험도 들고. 주식도 좀 해보고. 효도도 하고. 사고 싶은 것도 좀 사고.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참 많아요. 
 그런데 그러다 어느 때가 되면 잠깐씩은 내려와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으면 합니다. 너무 빨리 달릴 필요가 없고요. 그렇게 내려와서 여행도 다니고, 새로운 것도 배워보고, 사람도 만나고, 책도 좀 읽고, 운동도 하고, 할 수 있으면 사랑도 하고. 
 그러다 보면 쳇바퀴를 돌리는 직장인으로서의 J가 아니라 훨씬 더 다양하고 가능성이 많은 J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대학생 때 느꼈던 설렘과 여유를 직장을 다니면서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갑자기 뭔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축하 글을 썼구먼요. 하지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도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뭐가 됐던 우리 J는 잘할 거라 생각합니다. 졸업 축하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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