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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강인성 Apr 10. 2021

다시 궁극적 질문으로

'세계는 곧 나이다'에 대한 체험적 논증


문제가 생겼다. 철수와 영희가 싸웠단다. 우선 사실관계를 알아봐야 한다. 얘기를 들어보니 철수와 영희는 연인 사이인데 철수가 영희 몰래 민지와 밥을 먹었다고 한다. 누구의 잘잘못일까? 문제들을 한 꺼풀씩 벗겨보자. 연인 사이라면 말하지 않고 다른 이성과 밥을 먹어선 안되는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연인 사이란 무엇인가? 말하지 않는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밥을 먹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연인 사이란 사랑을 약속한 관계이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을 의미한다. 밥을 먹는다는 건 긴밀한 사이임을 의미한다. 여전히 모호하다. 한 꺼풀 더 벗겨보자. 사랑이란 무엇인가? 거짓말은 악한 행동인가? 가까운 사이라는 건 어떤 관계를 의미하는가? 답이 나왔는가? 하지만 아직이다. 
 사랑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사랑이 없다면 나는 어떤 존재로 남는가? 악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악을 규정하는가? 관계를 맺다는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없는가? 이렇게 모든 질문의 껍데기를 끊임없이 벗기다 보면 궁극적 질문이 나온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세계란 무엇인가?  




 나는 철학 전공생이다. 더 정확히는 서양철학, 그중에서도 심리철학을 전공했다. 심리철학의 궁극적 질문은 이렇다. "의식이란 무엇인가?". 즉 나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의식에 관한 것이었다. 
 심리철학 속 '의식'에 대한 정의는 이러하다. (많은 내용이 생략된 아주 거친 설명이라는 걸 알아주었으면 한다.) 의식은 자극으로부터 반응을 이끌어내는 '기능'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능은 원인과 결과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의미한다. 철수가 민지와 밥을 먹었다는 알게 된 영희는 화가 났다. 의식은 영희가 그 사실을 알게 된 시각적 청각적 반응을 분노라는 감정으로 이끌어내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의식에 대한 이러한 접근을 '기능주의'라 한다.  
 이러한 의식에 대한 설명에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고 누군가는 굉장히 흥미로워할 것이다. 나는 후자의 쪽이었다. 서양철학을 배우며 스스로 합리주의자이자 물리주의자라 여긴 나에게 이러한 의식에 대한 설명은 마음에 쏙 드는 설명이었다. 심리철학을 공부하던 24살의 나는 '나'에 대한 질문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또한 심리철학도 '나'에 대해선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현상만이 전부였다. 나에게 영혼이니 내면이니 하는 것은 무의미한 허상이었다. 
 그런 생각과 함께 나는 졸업을 했고 사회로 내던져졌다. 번뇌와 고통으로 가득한, 생각한 모든 게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그러나 반드시 시간 내에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그 사회로 말이다. 그런 사회 앞에서 내가 배운 철학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철학이 내게 알려준 질문하는 태도는 고민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고민을 더 만들었다,  
 도전하는 모든 걸 실패했다. 연속된 실패는 자연스럽게 자기 객관화를 불러들였다. 나름대로 세계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게 희뿌옇게 보였다. 그건 아는 게 아니라, 알고 있다 착각한 것일 뿐이다. 모든 게 둥둥 떠나 니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의식에 대해 생각했다. 기능주의적 의식. 그건 그럴싸해 보이는 설명이지만 궁극적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는 못했다. 언뜻 보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인 것 같지만 실은 겉으로 보이는 세계에 대한 관찰일 뿐이었다. 껍데기뿐인 설명으로 나를 규정하려 했으니 모든 게 공허해진 것이다. 내가 배운 모든 철학이 그러했다. 나는 내가 쫒아온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방황을 하다 사회적 의미의 '자리'를 잡았다. 매달 일정한 수입이 생겼다. '인사총무'라는 직함이 생겼다. 부모님의 언덕 위에서 몸을 뉘 킬 수 있었다. 내면은 여전히 폭풍과 같은 혼란은 상태였지만, 외적으로는 안정이 찾아왔다. 
 외적인 안정은 내면의 혼란을 더욱 심도 깊게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혼란의 껍데기를 벗겨 기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는 무엇인가. 
 끝없는 고민의 길에서 운 좋게도 세 가지를 만났다. 에세이 쓰기. 칸트. 그리고 미지의 길이었던 동양철학의 세계이다. 
 에세이 쓰기. 철학적 글쓰기는 끊임없이 세계를 정의하는 글쓰기이다. 그렇기에 나는 어떤 글에서건 개념에 대해 파고들고 현상에 대해 분석했다. 그래서 사실 글쓰기만큼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에세이의 세계에 발을 내디뎠을 때 선생님은 내 글을 보고 늘 이렇게 말하셨다. '나'의 글을 써야 한다. 이건 '나'의 글이다. 모든 에세이엔 '나'가 있어야 한다. 그때 직시했다. 지금껏 해온 철학적 글쓰기에는 '나'가 없었다. 그저 분석, 분석, 분석. 그런 글쓰기만 해왔던 나에게 에세이 쓰기는 너무나 어색했다.    
 그러나 점차 에세이가 익숙해지며 동시에 '나'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고통의 시간도, 즐거웠던 시간도, 부끄러운 모습도 멋진 모습도 모두 멋진 에세이의 주제가 되었다. 그 모든 것이 '나'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사유의 방향이 외부에서 내부로 바뀌었다. 
 칸트. 에세이 쓰기를 배우는 책방에서 '왜 칸트인가'(김상환 저, 21세기 북스)라는 책이 눈에 들어온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칸트라는 두 글자를 보는 순간 부끄러움이 밀려왔으니깐. 서양철학의 끝이자 시작인 칸트를 애석하게도 나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었다. 그 부끄러움을 해소하고자 나는 '왜 칸트인가'를 집어 들었다. 
 칸트의 철학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왜 이제야 칸트를 만난 것일까.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을 통해 세계와 나의 관계를 정의 내렸다. 그리고 실천이성비판에서 그 세계에서 나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선험적 경험을 통해 물자체를 있게끔 하는 나. 그리고 빛나는 자유의지로 도덕률을 가지고 있는, 세계의 궁극적 입법자로서의 나. 그 설명은 너무나 명료해서 모든 사유의 시작을 다시 칸트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와 나에 대한 정의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양철학. 무의미하고 공허하다는 이유로 무시했던 철학. 그러나 사유의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그 철학. 동양철학을 접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지금껏 반쪽짜리 철학을 배웠구나. 
 채사장 작가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시리즈는 내가 참 좋아하는 책이다. 세계에 대한 단순하고 명료한 정리는 조각나 있던 나의 지식을 큰 줄기로 엮을 수 있게끔 해주었다. '지대넓얕' 책의 역할은 거기까지라 생각했다. 3편인 '지대넓얕: 제로'를 만나기 전엔. 
 '지대넓얕: 제로'는 단 한 가지 문장을 이해시키기 위해 쓰였다. "세계와 나는 하나이다." 그 문장을 이해시키기 위해 책은 세계의 절반인 동양의 철학, 베다, 도교와 유교, 그리고 불교철학을 설명한다. 서양철학은 세계를 언어라는 도구로 끊임없이 나누고 쪼개고 분석한다. 하지만 동양철학은 전혀 다르다. 오히려 끊임없이 설득한다. 쪼갤 필요가 없다. 세계와 자아는 하나이다.라고. 책을 통해 그 문장을 이해한 순간, 공허했던 내 안에 무언가가 채워졌다. 
 나는 누구인가. 세계는 무엇인가. 서양철학은 내게 세계가 무엇인지, 그 세계를 어떻게 인지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에세이 쓰기는 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칸트는 세계와 나의 관계를, 그 세계 속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지대넓얕: 제로' 속 동양철학은 그 모든 것을 정리해주었다. 범아일여. 내가 세계이고 세계가 곧 나였다. 




 당연하게도 궁극적 질문에 대한 답을 완전히 알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 그 답이 어디에 있는지는 어렴풋이 보인다. 그리고 궁극적 질문이 해결되자 그 밖의 복잡한 질문이 명료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진정으로 내면의 평화가 내 안에 찾아왔다. 
 이 짧은 글 속에서 내가 느낀 것을 다 담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겐 지금 이 글의 내용이 공허하고 알 수 없게 다가올 것이다. 또한 나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기엔 아직 한참은 먼 상태이다. 이제 조금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한 단계일 뿐이다. 
 우리는 궁극적 질문에 다다르기에 너무 복잡하고 피곤한 세상에 살아간다. 막상 눈 앞에 보이는 얇은 껍데기 하나도 막막한데, 그걸 벗겨내는 게 피곤하고 무의미한 일처럼 보이곤 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고민하고 끈질기게 질문에 매달려 세계를, 그리고 내면을 파고든다면 분명 그 안에는 있다. 그리고 그걸 본 순간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주식회사 에스엠케이의 인사총무이다. 나는 강진한과 신우경의 아들이다. 나는 한때 연극인을 꿈꿨던 실패자이다. 나는 자유를 갈망하는 철학자이다. 하지만 그딴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시 궁극적 질문으로. 나는 누구인가. 세계란 무엇인가. 
 나는 세계의 관찰자이다. 세계는 나의 관찰로서 존재한다. 나는 자유의지를 가진 궁극적 자아의 입법자이다. 세상의 기준은 나다. 나는 내면의 항해자이자, 세계의 여행자이다. 나는 곧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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